1. 제4강의 3가지 화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
오늘 공부할 요한복음 본문은 제1장 13절-18절이다. 오늘 본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도덕경 제2장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을 요한복음을 숙고하는 고전자료로서 참고하면서 음미할 것이다.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들이다”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도덕경 제2장 후반: 시이성인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 만물작언이불위시 ,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2. 혈통, 육정, 사람 뜻으로가 아닌 하나님께로 부터 난자들
요한복음 기자는 빛이 세상에 와서 어둠을 밝히면서 비취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빛을 반갑게 환영하면서 받아드리고 빛 앞으로 나아오지만, 어떤 다른 사람은 나아오지 않고 외면하고 심지어 방해하거나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이상하였다. 가문혈통을 자랑하거나 많이 배운사람들, 부유한 사람들, 사회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복음을 쉽게 받아드리지 아니함을 보았다. 왜 그럴까?
복음의 빛을 심령에 받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의 논리에는, 기존 기독교신자들의 삶과 언행이 신선한 매력을 주기는 커녕 그들이 빛을 도리혀 가리우므로 빛에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인간적인 자랑과 허세와 권세가 하나님의 은총의 빛과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점이 분명히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명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갈릴리 청년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이러한 고백이 자신의 종교지식적 종합 판단이거나 윤리도덕적 비교판단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물론 내가 고백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나의 주님이라고 결단했지만, 그 나의 결단과 선택 행위 안에는 나의 지성을 넘어선 초월적인 은혜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택하신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성화 시키시고, 영화롭게 빚어가신다고 증언한다(롬8:29-30).
기독교 신학적 진리론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동시에 가장 위험하기도 한 예정론이나 선택론을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시간낭비요 정력낭비이다. 말하려는 핵심은 신앙의 사건은 자유의지적 인간의 인격적 결단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사건이라는 역설적 일치인 것이다.
자유인격적 결단이 동반되지 않는 은총론은 잘못하면 ‘싸구려 은총론’이나 혹은 모든 것을 하나님책임으로 돌리는 불신앙에 이른다. 하나님의 은총사건으로서 진리빛의 내면적 조명없는 인격적 결단론만 강조하면 신앙은 공로신앙 경쟁터로 만들고 마침네 겉으로만 경건과 겸손을 강조할뿐 실지로는 성공업적을 추구하고 자기가 이룩한 종교왕국에서 하나님 없이 왕노릇하려는 반신앙에 이른다. 신앙의 역설은 자율도 아니고 타율도 아닌 것, 그 둘이 함께 작동하면서도 그 둘을 넘어서고 온전케 하시는 은총의 신율적 사건인 것이다.
3. 육신이 되신 말씀생명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
기독교진리의 핵심에 성육신 신앙의 진리가 있다. 그런데, 고대 힌두교나 인류종교사를 공부해보면 초월적 진리, 신, 법신, 천계신이 세상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출현하시고, 자기의 구원사업을 완수한 다음엔 본래 천계의 자리에로 귀환한다는 ‘구원신화’는 기독교 이전에도 많이 있다. 얼른 겉으로만 보면, 요한복음서의 ‘로고스 그리스도론’ 역시 그러한 오랜 인류의 구원신화 범주에 속한 셈족계 종교버전(semitic-religious version)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요한복음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제1장에서만 보면 ‘위에서 아래로’라는 표현으로 총괄되는 영지주의적 구원신화의 구성형식(Format)을 보이지만, 요한복음서 21장 전체가 전개되어가는 이야기를 따라 가노라면, 도리혀 ‘아래에서 위로’라는 신학적 논리구조를 띄는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으로 변형되어간다. 요한복음서란 하나님의 영 안에서 ‘변화의 복음’(Gospel of Transformation)을 증언하는 경전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자연인이 물과 영 안에서 새사람으로 변하고, 문둥이의 피부에 변화의 새살이 돋고, 죽은자가 산자로 변화한다는 진리를 말한다.
다시말하자면, ‘로고스 그리스도론’의 연역적 논리 혹은 선험적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본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로고스 곧 영원자요, 창조에 참여한 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출생한자 였기에 예수는 당연히 구세주(메시야)이고 하나님 아들로서 독생자 신적 존재라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이라고 일컫는 귀납적 논리 혹은 후험적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들과 같은 진짜 사람이요 다윗혈통을 따라 세상에 태어난 유대남자이지만, 그의 은혜충만한 진리말씀, 치유와 사죄치유능력, 하나님의 나라 통치권의 실현을 통해서 볼 때, 역사적 인간 예수가 성령의 능력을 물붓듯이 받아서 메시야(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거나 대언한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가 ‘말씀’ 이였기에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다”고 파격적표현을 한 것이다. ‘로고스 그리스도론’과 ‘성령 그리스도론’은 함께 귀중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증언하는 신학적 담론 방식이다.
사도행전(행2:14-24)의 베드로 설교나 바울서신(롬1:1-4)의 원시 초대교회 증언자들의 목소리 논조는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에 더 가까운 신학적 담론을 펼치고 있음을 본다. 사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로고스 기독론’이 압도적으로 정통교의로서 자리를 굳히게된 계기는 4세기 초 니케야공의회(AD.325) 이후 부터라고 말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말로서 표현하자면 요한복음은 겉으로만 읽으면 ‘선포적 기독론’(케류그마 기독론)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복음서로 보이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서 읽어보면 ‘역사적 예수로부터 고백적 예수’로 나아가는 절묘한 역설적 복음서라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는 너무 재미없는 전문신학적 기독론의 문제이므로 그런정도로 해두고, 오늘 본문의 정말 중요한 핵심화두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몸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화육자 그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증언이다. ‘은혜와 진리’라는 두 단어는 마치 한개 쌍가락지 처럼 늘 함께 언급되는 성경적 하나님체험의 특징인 것이다(출 34:6) ‘은혜’(헬라어 charis, 영어 Grace)는 사람이 받아 감당하기엔 항상 분에 넘치고 예상을 뛰어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우와 신령한 선물을 의미한다. ‘은혜’를 입은자에겐 자연스럽게 감사, 감격, 기쁨, 찬양이 나온다. ‘진리’(헬라어 aletheia, 영어 Truth)는 철학적 진리개념이라기 보다는 진실, 신실, 참되심, 거짓없으심, 미쁘심, 공의로우심을 뜻한다.
정리해보면 ‘은혜와 진리’가 그 분 생명 안에는 충만했다는 요한의 증언은 예수 생명과 그 분의 활동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신 긍휼과 자비가 나타났고 동시에 진실과 공의로우심이 항상 동반되었다는 것이다. 더 줄여 ‘은혜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과 진실’이 충만했다는 말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진실’은 항상 ‘공의, 정의’와 함께 가는 것이다. 따라서 ‘은혜와 진리’는 ‘사랑과 정의’ 라는 어휘로 바꾸어 이해하면 더 실감이 나면서 본래적 증언의 뜻에 가까워진다. ‘은혜와 진리’는 두리뭉실한 감정적 느낌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철학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위의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한국교회들은 입만 벌리면 강단에서 목사들이 ‘은혜와 진리’를 너무 쉽게 남발하는데, 그 말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사랑과 진실’이 살아있는가 여부로서 검증되어야한다. ‘사랑과 진실’은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는가 문제인 것이다. 성경종교의 영성에 있어서 ‘은혜와 진리, 은혜와 진실, 사랑과 공의, 사랑과 정의’는 마치 심장의 심방과 심실 관계처럼 분리되면 죽는 것이다. 심장구성에서 심방과 심실이 불가분리적으로 작동하면서 심장의 수축 팽창 운동이 가능하고 신선한 혈액을 온 몸에 보내는 이치와 같다. 심장의 쉼없는 수축팽창 운동은 곧 죽음을 의미하듯이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작동하는 영적 생명운동이 그칠 때, 교회공동체도 죽은 시체가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강단에서 목사들의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말’은 무성한데 교회는 죽었다고 한다. 교리적 예수 그리스도론의 대속적 교리강론은 넘치는데, 뜨거운 생피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론은 많은데 예수살기는 가뭄에 콩나듯 하다고 한탄한다. 왜 그런가? 한편에서는 은혜를 강조하지만 진실과 정의가 죽었기 때문이며, 다른편에서는 공의와 정의를 강조하는데 은혜와 인애가 죽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증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생명현실 안에는 항상 은혜와 진리가 충만 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를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 심령과 신앙공동체 안에도 마땅이 ‘은혜와 진리’가 ‘은혜와 진실’이 ‘사랑과 정의’가 충만해야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예수 시체를 갇우어 놓은 돌무덤에 불과한 것이다, 회칠한 무덤이 된다. 가증한 진실왜곡이 판을 친다. 거룩을 빙자한 파렴치한들 ‘거룩한 사기꾼’들의 종교극이 연출될 뿐이다.
4. 말씀의 화육자 예수 삶을 ‘도를 몸으로 체득한 성인’ 행태로써 조명해보면
노자의 도덕경 제2장 후반부에는 다음 같은 말이 나온다: “그래서 도를 지닌 성인은 무위로서 세상사를 처리하고, 호령하거나 명령함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만물을 낳고 기르면서도 가지려 않고, 만물을 기르면서도 자신의 능력이라 주장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렇게 자기공로에 머물지 않기에 이룬 공적이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이 말하는 ‘성인’이란 유교에서 말하는 자기수양을 완성한자로서의 도덕적 이상자 개념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성인’이란 ‘도(진리)’를 몸으로 체현한 사람을 말한다. 요한복음식으로 다시말하자면 말씀을 입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곧 생명으로 육화시킨 사람을 말한다. 그 사람은 자기능력으로 세상을 평화롭게하고 초능력으로 다스린다고 큰 소리치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시어 하늘 아버지가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신 능력으로서 일한다. 모든 앙떼들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자기를 따르는 대중이 호칭하는 것도 사양하셨다. 하나님 한분 외엔 선한이가 없다고 겸허하셨다. 진정한 도인 성인은 ‘공을 세워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공성이불거).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은 그 공로업적에 연연하지 않고, 그 공로업적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자기의 공로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거나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고보면 그가 이룬 공이나 업적이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뭇 이름없이 희생봉사한 생명들의 피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교계현실을 돌아본다, 과연 ‘공성이불거’하는 존경하는 교계지도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숨겨진 진정한 분들이 몇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 눈에 비취는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이룬 ‘종교왕국’에 영원히 공로자로서 머물고 존경받으려는 명예욕과 탐심 때문에 자기를 비울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찼다고 본다. 그것이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엄정한 ‘세평’이다. 복음선교를 빙자하여 헌금을 기반으로하여 ‘기독교은행’을 만들려는 놀라운 발상을 하기도 하고 교인양떼들의 머리숫자를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정당’을 만들겠다고 설친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이룬 공적에 머물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실 것이요,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길이 기억 할 것이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빌2:5-11)가 바로 그것을 증언한다. 요한복음 기자는 태초이래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속 마음을 투명하게 보이신 사람도 없었지만, 예수의 생애와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그분의 자기희생사랑과 사랑의 저항열정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보이셨다고 증언한다.
기독교인란 어떤 사람인가?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역사속에 많이 나타났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자란 성인들 중에서도 갈릴리 나사렛 예수의 33년의 짧은 생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장 투명하고 또렷하게 보았고, 하나님의 심장박동과 그 뜨거움을 느꼈고 체험하여 자기가 변화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부탁하신 ‘이웃사랑’ 계명의 실천을 통하여 예수와 하나 되는 체험을 오늘도 계속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요14:20).(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