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예루살렘이 열리다

2012년 4월 1일 종려주일 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0:6-9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아멘.

히브리서 12:1-3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12-19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아멘.
 
설교본문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호산나가 울려 퍼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다 나왔네요. 오늘 예배드리는 이곳은 예루살렘 이고,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제목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제가 울거나, 옆집 아이가 울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호랑이가 나와서 잡아간다. 그러니 울지 마라.” 그러시더니 그 다음에는 “순사가 와서 잡아 간다.”하시더라고요. 저는 호랑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랑이 무서운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사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호랑이와 순사를 함께 말씀하셔서 “순사는 무서운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보니 아이들 양육할 때 말은 신경 써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듬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는데 굉장히 오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순사가 정말 무서운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무척이나 무서웠습니다. 순사가 가까워야 하는데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되면 안되잖아요?

또 다른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주변 어린들을 통해 듣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배고프고, 어렵고, 사회가 혼란한데 정도령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라고요. 여러분 정도령 이야기 많이 들어 보셨죠?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해 보니 정도령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 정확하게 들어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한말 우리 나라가 어려웠을때 때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이 땅에 자유와 민족의 자주를 고대하면서 정도령이, 한 메시야가, 오시는 걸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사실은 알고있습니다. 저는 정도령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말속에 정도령이 오면 우리민족에게 큰 기쁨이 온다는 식의 사람들의 희망은 알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다른 분들에게 그러시더라고요. “정도령은 어디서 오나요?” 라고 물으니, 주변 어른들이 “계룡산에서 온다”고 하더라구요. 계룡산은 논산과 공주 근방에 있으니, 제가 사는 보령에서 가까웠습니다. 저는 정도령이 오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정도령과 함께 가까운 곳에 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도령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 분이 오시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를 2천 년 전으로 옮겨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순사가 누구이고, 호랑이가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도 “로마군대가 온다.”고 하면 순사가 와서 잡아간다는 말하고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그 이전 사람들에게는 로마 군대 전에 식민지배자였던 알렉산더의 헬라군대였습니다. 또 그 이전에는 현재 이란인 페르시아 군대가, 그 이전에는 현재 이라크인 바벨론 군대가 와서 잡아간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 보다 훨씬 이전에는 지금 시리아에 해당되는 앗시리아 제국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의 헬라 군대에게, 이제는 로마군대의 속국으로 전락해 완전히 잡혀 먹힌 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를 기다리자. 그 분이 곧 오신다.” 이 이야기는 아 주 옛날부터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메시아(Messiah)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메시야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분 메시아는 우리에게 와서 모든 백성을 구원하고, 행복을 주고, 자유를 주고, 아름다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의 꿈과 희망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면 아픈 사람이 낫을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불의가 정의로 바뀝니다. 속박이 자유로 바뀝니다. 세상은 온통 뒤집어 집니다. 메시아가 가지고 오는 선물이 있는데, 오늘의 이사야서 본문을 보면, 그 선물의 이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 선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도 새로운 모습으로, 인간도 새로운 모습으로 메시아가 전해줍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고 물으면, 답은 간단합니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오시는데, 오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메시아는 다윗의 왕가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구체적인 꿈이고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는 다윗 임금 시절입니다. 자세한 역사이야기는 여기서 못 드리겠습니다만, 다윗 왕은 이스라엘 종파와 부족들을 다 통합해 통일국가를 세운 최초의 임금입니다. 처음 왕권은 사울이 만들었지만 그 다음 다윗 왕 시절에 와서야 마지막 적국인 블레셋을 물리치고, 유대 땅을 통일시킨 통일왕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33년 동안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 이스라엘의 행복, 이스라엘의 자주,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오늘 성가대가 예루살렘 찬가, 호사난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본래 이스라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이 남북을 통일하고 나서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닌 중간지대 한 도시를 선택해 만든 신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 도시가 평화의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갖고 그 이름을 ‘예루살라임’ 그렇게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 예루살라임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나는 곳,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새로워지는 모습이로 등장하는 곳이고, 바로 그곳 예루살렘이 온 세계의 중심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식민통치로 인하여 외세에 빼앗긴 예루살렘에 “새로운 메시아가 오셔서 새 예루살렘을 만들어 주십시오”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정신적 신앙적 중심은 무엇입니까? 영적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성전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곳에서 만나 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예루살렘에 새 하늘, 새 땅을 만들어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 기대는 우선적으로 성전에서부터 샘처럼 솟아나야 했습니다. 다윗왕은 성전이 세워진 그곳, 예루살렘의 중심이 있는 언덕을 시온산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예루살렘도 뜻하고, 성전이 서있는 산 이름도 뜻합니다. 다윗 왕은 성전을 다 짓지 못하고, 아들 솔로몬 왕 때 비로소 완공했습니다. 솔로몬도 왕으로 등극해 아버지 유산에 따라 37년 동안 통일 된 왕국을 아주 멋있게 이끌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역사는 아버지와 아들 둘이 합한 70년뿐입니다. 통일왕국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이천여년이 지나고 1948년에 이르러서서야 이스라엘은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왕국의 모습은 아닙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종교적으로 사분할 되어 있습니다. 한쪽은 유대교 성지가, 다른 쪽은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지가, 기독교 성지가, 이슬람 성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통일된 모습이 아니죠? 지금의 형편이 그렇습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이 로마 식민지배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메시아가 곧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맞이할까 고민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가지로 길 위에 펴드리자, 필요하다면 옷도 벗어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마련해 드리자.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오늘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아로 칭송 받아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옛날 장군들처럼 말을 타고 오지 않고, 조랑말을 타고 겸비한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스가랴 예언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메시야는 어린 조랑말을 타고 올 것이다"라고요. 큰 말 타고 오시지 않으며, 로마, 알렉산더, 바벨론의 점령군과는 전혀 다른 그런 모습으로 오신다고요. 메시아가 입성하실 때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맞이합니다. “호산나!",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 제사장들, 그들 지도층은 예수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요"라면서 말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들에게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 서민들, 이방사람들만 모여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유대 땅의 유대신앙의 사람들은 아직도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예수를 메시아로 모실 때 왜 사람들은 그리도 열광 했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요한복음 12장에 예수께서 입성하신 이야기를 읽으셨죠? 예배 후에 집에가셔서 요한복음 11장을 1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꼭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1장에는 메시아가 종려주일에 등극하게 된 이유와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게 된 이유가 자세히 쓰여져 있습니다. 제가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시기 1주일 전 그곳에서 약 5km 떨어진 가까운 동네 <베다니>에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베다니 동네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두 여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의 오라버니 되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온 동네가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서 유하실 때 두 자매와 동네 사람들이 간청합니다. "예수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일찍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텐데...예수님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실 수 있습니까?"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느냐? 그럼 내가 죽은 나사로 살려주마". 엄청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믿겠다고들 대답을 했지요. 그에 대해 예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11장을 읽어보시면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라고 하십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니까 주를 믿는 사람은 나사로처럼 죽어도 부활하여 살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첫째 축복입니다. 죽은 자를 살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나사로 말고 여러분은 살아 계시죠? 목숨이 붙어 있지요? 살아 있는 동안에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메시아가 주시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행복과 생명은 메시아가 보장하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그렇게 메시아를 믿고,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을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중요한 선물하나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영원한 선물은 죽음 이후에만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은 죽음 이후의 생명이긴 하나 그걸로 영생이 다가 아닙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생의 축복이 여러분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대한 이야기를 예수께서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 쉬고 살아 있는 동안 이 땅이 영원한 세상처럼 진정으로 살만한 세상이 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서 이 땅이 새 예루살렘으로 바뀌어진다고 합니다.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세계가 고침받고 치유받아 생명의 세계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만 생명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 전에도 메시아는 여러분 속에서 오늘도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살아가면서 건강하시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까? 살아가면서 직장에서 하는 일마다 정의롭게 되고, 그렇기에 아릅답게 일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기뻐서 찬양하고, 기도하려하지 않으십니까? 몹쓸 세상이라면 무엇 하러 사십니까? 인간의 현재 목숨의 죽음이 있기 이전에도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가 작용하는 현장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끝나도 영원한 생명은 죽지않습니다. 새 세상에서 살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그 두 세계를 다 구원하시며 죽지않는 생명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분 주님이 말씁하십니다. "지금 내가 나사로 살리기 위해 가야겠다.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다". 예수님의 중대한 선언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라 잠자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은 잠자는 것일 뿐이랍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잠"에서 깨워 죽기 이전의 세상에서 다시금 하나님 나라를 맞보며 살게 해야 겠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갔습니다. 돌문을 열고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살아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자는 곳에서 "깨어나라",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살아났죠. 이렇게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보고 유대백성들은 이런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야 말로 정말 메시아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등극했더니 자연히 모든 사람들이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는 지금의 예루살렘 말고, 지금의 유대 종교와 성전 말고, 지금의 세상 말고, 전혀 새로운 예루살렘, 전혀 새로운 신앙과 성전, 전혀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겠노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옛날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옛날 성전을 지키고 있던 제사장, 바리새파 사람들은 겁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실직’당해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싫어합니다. 예수만 싫어한 게 아니고, 예수가 살려 낸 나사로도 싫어해서, 나사로를 죽여없애려고 제사장들이 흉계를 꾸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옛날 사람, 옛날 세계, 옛날 기치관이 지배하는 옛 예루살렘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인간을 만들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세상을 만드실 메시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갑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합니다. “다 틀렸다. 온 세상이 이 분을 따라 갔소.”

예수는 이렇게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메시아로 온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온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 있는 정치체제의 구원 뿐만 아니라 오고 있는 세계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이 너무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의 예언대로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노라”면서, 고난을 받을 줄 알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뺨은 맞아야 하고, 수염은 뽑혀야 하고, 등은 매질 당해야 하고, 손가락은 못에 박혀야 하고, 창에 찔려서 피는 쏟아야 함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앞에 계신, 앞서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당당히 이 길을 가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봉독해 들으신 히브리서의 고백을 들어보시죠. “온갖 수난과 아픔을 뒤로하고 앞에 놓여 있는 부활의 기쁨을 보기 위해 십자가로 가는 예수는 당당히 앞을 향해서 걸어갔노라.” 메시아 예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낳기 위해 십자가를 참아야 함을. 온 세상의 기쁨을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 함을. 세상이 끝나기 전에 이 기쁨을 모든 믿는자들에게 줘야 함을. 이 땅은 새로운 땅이 되어야 함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루살렘에 줘야 함을. 예루살렘을 구원해야 함을.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의 기대도 그랬습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자기가 갈 테니 이제 사랑하는 우리는 자기를 양식 삼아 먹고, 우리들의 생명의 구원을 열매로 맺으라고요.

제가 언제가 설교에 괴테(J. W Goethe)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일부분을 조금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엄청난 문인이고,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생전에 살았던 생가에 가보면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또 그 분이 일하던 도시인 바이마르(Weimar)에 가보면 그 분의 살던 집이 있고 그분과 함께하던 시인 쉴러의 두 동상이 늠늠히 서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훌륭한 문호가 여기 서 있구나 하는 감격을 받습니다. 니체는 괴테를 보고 “이 사람은 문호가가 아니고, 시인도 아니고 이 사람 자체가 문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도 훌륭한 괴테의 <파우스트>책 내용을 살펴보면서 “영원을 팔아 세상의 정욕을 즐기고 싶은 사람인 파우스트"가 옛날 유대 땅에도 있었고, 지금 이 땅에도 수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가롯유다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말씀 들리려고 하는 게 아니고요. 괴테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을 정리하면서 하는 고백이 너무 공감되어서 몇 줄만 인용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정말로 제것이라고 생각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저한테 준 감정, 생각, 살아온 이야기, 일거리, 경험들이고, 그것들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 다니며 만나며 배운 것도 여러분이 저에게 주신 이런 씨앗들 입니다. 다만 저는 그 씨앗을 기르고, 가꾸었고 그 열매를 거둔것 뿐입니다.” 참 겸손한, 그러나 아름다운 고백인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나 메시아는 여러분을 지배하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여러분을 위한 육적, 영적, 세계적, 초시간적/시간적 씨앗이다. 나를 자양분 삼아 먹어라. 나를 자양분 삼아 마셔라. 나를 수용해라. 수용하되 수용한 나를 여러분이 잘 소화해서 자양분으로 삼아라. 성령이 역사해 주시면 자양분으로 먹은 다음에 자유라 이름하는 열매로, 신앙의 열매로, 행복이라는 열매로 여러분이 거둬드려라. 내가 오늘 여러분을 위한 씨앗이 되겠다. 그렇기 위해서 나는 오늘 십자가 희생을 감당하겠다”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려고 하실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오면 여러분 나를 "호산나!"하고 받아드리면 내가 나 자신을 주겠습니다. 소화해서 열매 많이 거두십시오"라고요. 그러나 그가 찾아 가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옛날 예루살렘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어제치고 들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문을 닫으면, 예루살렘이 문을 닫으면, 강제로라도 열고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예루살렘입니까? 바로 여기가 예루살렘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여시면 오늘 종려주일에 오신 예수께서 기꺼이 들어가시고, 마음을 닫으시면 오늘 메시아는 강제로라도 열어서 여러분한테 들어가셔서, 하늘나라, 새 하늘 새 땅인 새 예루살렘의 복음을 여러분한테 심어 주십니다. 단지 여러분은 소화해서 새 열매를 맺으시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새 예루살렘이 되신 여러분, 주님이 들어갈 문 좀 열어 주세요. 안열어주면 주님이 직접 열고 들어가서 씨앗을 뿌리겠답니다. 하늘의 은총인 씨앗입니다. 그 은총을 착실하게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맛있게 먹고 자양분을 맘껏 받으십시오. 좋으면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오늘 성가대 찬양처럼, 기쁘게 노래하십시다. 찬양합시다. 예배합시다. 그리고 이 축복을 온 하늘과 온 땅과 함께 나누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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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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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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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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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