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0절
일본의 성자 우찌무라 간조가 쓴 [구원론]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가 십계명 하나하나를 지키려고 얼마나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하나님 앞에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탐욕을 부리지 않겠다, 나는 거짓말은 모양도 내지 않겠다, 나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그는 단호하게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은 헌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것은 낡은 의복 조각과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낡은 의복은 떨어진 데를 기우면 거기에 또 구멍이 나고, 저기를 기우면 또 다른 데가 구멍이 나고, 또 여기를 꿰매면 저기에 구멍이 나곤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이미 구멍이 나 터진 데를 메꾸면 다른 데가 구멍이 또 나서 물이 새버립니다. 이런 낡은 의복과 낡은 가죽부대가 자신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 썪어 버린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기우면 또 떨어져 버리는 낡은 의복과 같이 자기가 얼마나 낡았고 또 부패하였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십계명을 실천하느라고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과 행동과 언행을 조심하면 할수록 자신이 부패한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외친 바울의 비탄 소리를 부르짖으면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파산했음을 선고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비탄이 많고, 탄식이 많고, 고민이 많다 하나 도덕적인 고민과 비탄의 소리처럼 더 절실하고 더 애절한 것이 또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구나! 나는 부정한 사람이로구나! 나는 거짓된 사람이로구나! 나는 죄인이로다. 나는 탐욕스런 사람이로다. 음란한 사람이로다.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구나. 아,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가 이렇게 자신의 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총파산을 선고한 순간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의이시며, 나의 주이시니, 나는 당신 때문에 선함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때부터 의인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에게 사랑이 깃들었고, 새로운 생명이 용솟음쳤다고, 그때부터 평화가 왔다고, 그때부터 기쁨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하는 과정을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비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고 그의 부활에 참여했다고 하면서도 무기력하고 그 무엇을 할 능력도 없이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우리가 따르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장사된 것처럼 무기력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신자들같이 되었습니다. 그리나 우리는 이렇게 위축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셔서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픔 가운데서 눈물 흘리면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사단의 세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꺾였습니다. 사단은 이미 예수의 부활로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축되지 말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도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 부활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절).”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보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류 역사 가운데 죽었다가 3일 후에 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마 같이 의심이 많은 자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예수 부활을 그 먼 인도까지 가서 전하다가 순교까지 했겠습니까?
실상 예수의 부활을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는 곤란합니다. 이는 부활이 과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기적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 드려야 하는 신앙의 영역이지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우리 마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분은 자연과 과학을 초월한 기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제법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 성경을 통해서 부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즉, 4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 근처라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무덤에서 말을 전해준 사람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부활에 반대합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말을 전한 사람은 ‘한 젊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젊은이’가 무덤에서 말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사람은 ‘천사 하나’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두 천사’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이 있으니 부활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확실히 모순이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어떤 드라마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이고, 사건의 외관 문제일 뿐이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중심 내용에 관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비유로써 생각해 봅시다. 세 사람이 축구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한 사람은 A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B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아무개 선수는 매우 지저분한 선수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선수가 다만 지나치게 열심히 싸우더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하면, 심판이 훌륭했다고 보는데 반해, 한 사람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가지 생각이나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득점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형식을 변경할 수는 있으나, 얻은 점수만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라는 사건은 시종 불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젊은이’가, 요한복음에는 ‘두 젊은이’로 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주후 60년경에, 요한복음은 주후 1백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40년간, 이야기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면, 도중에 그 이적에 대해서 점점 구체적이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점은 시종 변하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상심하고 환멸에 빠졌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일곱 제자는 갈릴리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얼굴은 짙은 슬픔으로 가득 차 그들의 발걸음은 힘이 없었습니다. 아무 힘도 없이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을 겪은 후 영적인 소원을 버리고 먹고 살 것이나 찾아 엠마오로 가고 있는 불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변했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그들은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뛰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승리감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의심이 많던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다음 참된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용기와 담대함으로 세계를 향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불의와 죄악과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것이 실망스럽고 좌절할 것 밖에 없습니다. 사업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는 절망적인 모습 밖에 없습니다. 가정적으로는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장사된 후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진 상태인 제자들의 허탈한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확고하게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절).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에는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복음을 무시무시한 로마 세상에 전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무서운 세계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가 순교했습니다. 사도들은 순교를 앞에 두고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후로는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자신들의 몸을 다 바쳤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칼빈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 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부활의 신앙을 귀하게 여겼는지를 생각하고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도 칼빈처럼 아름다운 영적인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임을 믿고 부활의 희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임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합니다. 이 복음으로만이 온 세계는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이 복음으로만이 우리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복음만이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