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만져보고 믿으라

2012년 04월 15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40:26-31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아멘.

골로새서 2:12-15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또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20:24-29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아멘.
 
설교문  
  
우리는 지난주 부활절을 맞아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부활절에 만난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 어떻게 만나 보셨습니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주님도 계시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느끼면서 같이 사는 주님도 계신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제자 도마가 예수님과 대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찾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간구한 도마에게 자기 상처 난 옆구리와 못 박힌 팔과 손을 보여주면서 “만져보아라.” 그래서 도마는 만져보고, 자기가 따르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믿고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도마 너처럼 믿는 신앙도 있지만 또 다른 신앙도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은 더 복이 있다.” 두 가지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보지 않고 믿는 예수 말고, 보고 믿는 예수가 누구인지 도마를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가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하필 이곳에 도마 이야기를 실어 놓았을까? 예수님의 열두 제가 가운데 가롯유다는 배반했으니 빼고, 열 한 제자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가롯유다를 대신해 제자로 뽑힌 맛디아를 합쳐 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믿었는지 일대기적 형식으로 구성이 되었더라면 비교하기 좋았을 텐데,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몇 군데 듬섬듬섬 나오는데, 그 중에 오늘 본문이 도마 이야기를 하이라이트 시켜 놓았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셔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모신 사람입니다. 소위 직계제자입니다. 예수님께로 부터 직접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막상 자기 선생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줄 알고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직계제자의 의문입니다. “내 선생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본 모습,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을 내가 만져 보아야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알겠다. 창에 찔려 돌아 가셨는데, 창에 찔린 옆구리를 내 손가락으로 만져 본 다음에야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겠다.” 이것은 제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의 직계제자였고, 생전에 예수님을 모셨던 제자 도마의 고백입니다. 불경한가요?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가 아닌가요?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아주 진실 된, 아주 인간적인,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우리대신 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져 보아야, 느껴 보아야,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 이런 믿음도 있지요. 어떻게 보이지 않는 믿음만 있습니까? 왜 성경말씀에 이런 도마의 믿음을 썼어야 했을까요?

제가 도마와 관련 된 이야기를 한 부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부터 시작해 많은 제가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全)세계에 돌아다니며 선포했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모든 제자가 최고로 멀리 간 곳은 로마입니다. 배를 타고, 걸어서 간 곳이 겨우 로마입니다. 그런데 의심 많은 도마는 가장 먼 곳까지 갔습니다. 그곳이 어디냐 하면 인도입니다. 인도, 남인도까지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마가 왔다는 자세한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남인도와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로만 알뿐 자세한 건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남인도 케랄라주에 서기 52년에 와서 20년 동안 예수를 전파하고 서기 72년에 남인도 마드라스에 올라가 순교를 당했다는 기록입니다. 그 이외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손가락으로 만져 본 다음 확신에 차 예수 부활의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하며 인도까지 갔습니다. 한국까지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곳까지 오지 못하고 인도에서 끝났습니다. 이 보고 가운데 중요한 게 있는데 남인도에 있는 교회는 도마의 이야기를 이렇게 발전시켰습니다. 교회 이름은 도마의 이름을 딴 교회로, 마르 토마교회(Mar Thoma Church)입니다. 마르(Mar)는 영어로 세인트(Saint)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세인트 토마스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파로는 정교회에 속합니다. 정교회 교구단위로는 시리아 감독의 지휘를 받는 시리아 정교회 교구에 속합니다. 이 부분은 교회사니 여기 설명에서는 빼도록 하겠습니다. 이 마르 토마교회가 지금도 이 케랄라 지역에서는 가장 큰 기독교 교파 중에 하나입니다. 수장되시는 대주교님이 저와 같은 WCC 중앙위원이어서 몇 년 동안 함께 활동 했습니다. 아주 순박하시고, 좋으신 감독님이신데 이 분을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 도마가 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못 자국을 만졌다. 창에 찔린 옆구리도 만졌다. 만져보고 믿은 예수 그 정신을 살리자.” 베드로처럼 아침에 삼천 명을 모아 놓고 복음을 설파해 삼천 명 모두 회개하고 구원 받도록 한 언어선포의 복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마교회는 도마와 같이 작은 손가락으로 손등을, 발등을 만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먼저 신학과 이론을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기에, 지금도 못 박혀 울고 있는 사람들, 엄청난 권력의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 가장 작은 사람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못 박히신 주님을 도마가 손으로 만지고 감사하며 믿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믿자고 결단 했었답니다. 이 교회는 요즘 말로 “작은 곳에서 봉사하는 교회”, “어려운 자들을 손으로 만져서 믿게 하는 교회”입니다. 신도는 약 백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들이 잘 하는지, 못하는지는 우리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만, 봉사도 하고, 또 매 맞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서 따뜻한 부활신앙으로 어루 만져주고, 보살펴주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 보려고 했죠. 그래서 이 마르 토마교회가 이처럼 봉사하는 교회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손으로 만져 보는 신앙의 교회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말씀에 도마 이야기도 쓰였다고 생각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으로 믿고 선포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가 함께 우는 교회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온 우주를 구원하신 분이시지만 가장 작은 밑바닥에 있는 자들의 어려움을 끌어안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아울러져 예수를 믿는 교회로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가 던진 수많은 질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질문이 다 쓰여져 있지 않지만 “나는 만져봐야 믿겠다”하는 말속에 “만지지 않으면 못 믿겠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마가 예수를 부활하고 처음 만났을 때 못 믿겠다고 하니 8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예수를 만났고, 그 시간이 지난 후 주님의 손과 팔 옆구리를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회적 표현이긴 합니다만 혹시 여러분 자신 누구든지 예수에 관해, 부활에 관해, 하나님에 관해 질문이 있으시면 그냥 하십시오. 질문을 막을 필요 없습니다. 도마도 했습니다. 마음대로 질문하게 하십시다. 그 대신 우리에게 기도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8일만 참아 주세요. 8일 후에는 꼭 답변 주세요.” 이 8일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8주가 될지, 8년이 될지, 80년이 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3일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이 상징적인 사건이듯이 8일 후에 모였던 것도 그렇습니다. 도마는 8일 후에 답을 듣고 싶은데 그는 언어로 깨우침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 몸을 만져봐야 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삶 속에 들어가야 한다. 증거를 봐야겠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는 도마처럼 증거를 통해 복음을 주십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우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이 질문 합시다. 의문도 던집시다. 그러나 꼭 한 가지 말은 이것입니다:“만져보세요”. 호흡 해보시고, 그래도 없으시면 버리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반드시 만지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마는 만지고, 호흡을 느꼈을 때 내가 아닌 나를 주재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우리 선생님, 선생님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죽어도 믿었고, 살아서도 믿은 싶은데 살아서 믿는 사람은 내가 꼭 엊그제처럼 옷자락이라도 만져봐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한 가지 만은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내 주님이 안 보인다고, 내 필요에 따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만든 신을 신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시간이 지나도 좋은데, 그 분을 꼭 만져봐야 겠다. 나는 내가 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을 대용품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언제일지 모르나 그 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입니다. 소위 "대용품 신!", 이런 신이 세상에 많죠? 지금도 대용품 신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이야기입니다만 이번 선거 때 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을 팔고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내왔습니다. 한쪽에서는 진짜 보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 당을 만들어 가지고 이상한 사람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진짜 보수가 됩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독교 당을 만들면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또 다른 한쪽에서는 진짜 진보해야겠다고 하면서 꼼수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진보가 바꿔집니까? 양극단을 보면서 느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정치나, 경제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팔지 맙시다. 그냥 사람이 한다고 하십시다. 잘못할 수 도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대용품 신을 만들어 놓고, 대용품 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비판하든, 찬성을 하든 그런 거 하지 마십시다. 대용품 신, 만들어진 신, 그것은 꼭 금덩어리로 만들어야지만 우상인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을 믿는 신앙은 제대로된 신앙이 아닙니다. 정품의 신앙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명품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일종의 "짝퉁 신앙"이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앙의 "신"이 있다면 그런 신은 또 하나의 "짝퉁 신"이겠지요. 하나님을 대용품적인, 짝퉁 신과 섞지 말아야 하듯이, 십자가와 부활을 바탕삼는 신앙도 짝퉁신앙과 섞지 말아야 합니다. 신에게 진실하고 솔직하면, 신앙도 진실하고 솔직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일입니다만 실존주의 철학자 중에 우리들이 잘 아는 덴마크의 철학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입니다. 이 분의 책을 읽다보면 도마 이야기를 꽤 많이 썼습니다. 자기 자신도 인생에 관해, 세계의 관해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도마가 철학적 테마로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이 분이 염려했던 건 ”나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오늘날 세계는 너무 대용품 신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책을 보면 이런 용어를 썼습니다. 대용품의 신, God-substitute. 이 분의 설명 몇 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결혼해 부부간에 잘 사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진실 된 인감임을 고백하면 행복한데, 어느 남편은 아내를 신처럼, 아내는 남편을 신처럼 그렇게 살면 불행합니다. 부모는 자신을 의지하며, 자식이 신이기를 바라며 온갖 정성을 쏟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공하면 몰라도 실패하면 저주하게 됩니다. 일과 커리어에 미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말로 워커홀릭입니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끝나면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함에 빠지고, 친구도 잃고, 가족도 잃고, 결국에는 자신도 잃게 됩니다. 일이 신은 아닙니다. 돈과 재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향락 또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구 누구냐 하는 것 보다는 나는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지에만 신경 쓰는 사람, 남의 눈치만 보고 사는 사람은 자기는 없고 갈등도 싫어하지만, 남의 눈치나 보고 살다보니 괴롭고, 외롭습니다. 다른 사람이 신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고상한 도덕을 가지고 이것만이 제일이라고 사는 사람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욕합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상대방은 악입니다. 선악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자신의 종교, 도덕,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종교를 신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진짜 신은 누구인가요? 키르케고르는 내용상 우리가 고백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도마가 한 질문이나, 키르케고르가 한 질문 모두 “나는 진짜 신을 만나고 싶지, 만들어진 가짜 신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입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을 보세요. 살다보니 못살겠습니다. 피곤해 죽겠습니다. 하나님 지칩니다. 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호소합니다. 골로새서를 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죄라 이름하는 빚문서를 다 불태웠는데 여러분의 죄가 불태워 졌습을 믿습니까? 하나님, 왜 저한테는 빚문서가 여전히 있습니까? 죄악 리스트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어쨌든 이런저런 불평불만이 많을 텐데 이럴 때 일수록 도마를 닮아 질문 한 번 해보십시다. “나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못 자국으로 만져 보고 확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죄 때문에 못 박히셨음을 내가 확인하게 좀 해 주십시오. 내 스스로의 잘못을 당신이 끌어안고 창에 찔렸다는 사실을 내가 깨닫게 해주십시오”라고. 다른 곳에서 당신을 찾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찾아봅시다. 우리는 이 신앙을 지난주에도, 오늘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신을 만져 볼 수 있습니까? 만져 보지 못한다면 믿을 수는 있습니까? 그 믿음이 아니면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이런 말씀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내버려 뒀다. 요즘 용어로 ‘하나님의 아동학대’(divine child abuse) 입니다. 맞습니까?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렇지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끔 "학대" 하셨습니다. 십자가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왜 나를 이렇게 죽음 속에 내버려 두시고, 학대 하십니까, 그런 말이죠. 주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 5장 1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습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죽어가는 아들 속에 하나님 아버지가 그 죽음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죽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하나님도 함께 죽음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낼 수가 없어 죽은 아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죽은 아들이 끌어안은 인간도 살려 내셨습니다. 죄악도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니까, 그 말은 살려 놓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려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나"하고 같이 살자면서요. 그 하나님은 함께 죽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밖에 놓고, 만들어 놓고 우리를 중심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 돌아다니게 하지 마시고, 여전히 그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주변을 돌면서 삽시다. 이렇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 도마의 충고 입니다. 의심나면 만져보면 됩니다. 우리를 위해 죽은 못 자국을 만져보면 됩니다. 오늘부터는 손자국, 발자국 흔적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으면 됩니다. 마르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1500년대, 즉 16세기에 교회가 썩었다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종교개혁 잘 알고 계시죠? 그 때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온 우주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특히 교회 중에서도 로마에 있는 교회가 중심이다. 그 중심을 온 세계 역사가 빙빙 돈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루터 생각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든, 서울에 있는 교회든 교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거다. 하나님이 교회를 중심으로 도시는 게 아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겠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중세시대에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지구의 주변을 우주의 모든 행성이 빙빙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입니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갈릴레오라는 사람이 나와 “태양은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돈다”고 했지요. 그래서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사실 갈릴레오는 17세기니까 루터 백년 후의 일입니다. 루터와 동시대를 살던 폴란드 과학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름이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입니다. 이 분이 말한 내용이 로마교회에 직접 알려지지 않아 종교재판은 면했습니다. 독일에는 루터가 있었고, 폴란드에는 코페르니쿠스가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다. 그 중심을 지구가 자전하면서 빙빙 돈다면서 지동설을 제일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루터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와 온 세계는 하나님 주변을 돌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도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신학적 지동설입니다. 엄청난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루터와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는 같습니다. 종교개혁과 똑같은 혁명을 이루었던 사람인데 과학자라고 해서 교회역사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야기를 빌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온 우주의 중심인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스스로 자전하면서 공존하며 그 분의 주위를돕니다”라고.

우리가 만든 신을 빙빙 돌리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 분의 중심을 돌며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내 주위를 빙빙 돌아 봐라. 그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아이들과 같은 아주 단순한 생각인데요. 하나님 믿으면서 왜 항상 기쁨이 없고 슬픔이 있느냐고, 또는 왜 따뜻한 햇빛만 있지 않고 추위도 있냐고 불평하십니까? 구약성경의 본문도 마찬가지로 묻습니다. 사실은 지구가 도니까 그렇습니다. 봄도 있고, 여름도 있고, 가을도 있고, 겨울도 있습니다. 햇볕은 똑같은데 자기가 자전하면서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니까 그렇습니다. 자기가 돌면서 왜 태양 빛이 적냐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빙빙 도니가 적을 때도 있고, 많을 때도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고난이 있다는 말은, 행복이 있다는 말은, 불행이 있다는 말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좋을 때가 있고, 매 맞을 때가 있고, 사랑 받을 때가 있는 거 아닙니까. 살아 있으면서 태양의 둘레를 돌면서 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인간 삶의 중심에 오셔서 항상 사랑의 햇빛과 구원의 빛을 주시고 우리는 그 주변을 돌면서 그 분이 주신 햇빛과 사랑과 아픔과 가난과 고통을 다 짊어 져 주시니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그런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니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합시다. 우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해방을, 부활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런 신앙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제자 도마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도마의 고백을 통해 여러분 은총 받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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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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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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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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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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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