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에스겔서 34:11-15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그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여러 시냇가와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기름진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아멘.
베드로전서 5:1-4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0:11-16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는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저희에게 주신 말씀뿐만 아니라 항상 성경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시고, 우리는 그 분의 양떼로 살아갑니다”라는 말씀이 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구약의 말씀, 신약의 말씀을 다 합쳐 시대가 변해도 장소가 바뀌어도 만고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만고의 진리인 이 말씀이 쓰였을 때 그 글자는 하늘 글자가 아니고, 사람들이 쓰던 글자였습니다. 신약은 예수님 태어나신 뒤에 승천하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헬라어 글자로 쓰였고, 구약은 히브리 사람들이 쓰던 히브리어 글자로 쓰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언어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직접 관계된 것입니다.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고, 사고방식이 있고, 여기에 맞춰 언어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만고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의 진수를 깨우치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인 언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 말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언어를 공부하다보면 그 언어의 토양인 문화도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말을 듣고 서로 감을 통하고, 이해하고, 그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검증해 내야합니다. “왜 하나님이 만고의 진리를 구체적인 상황에, 구체적인 언어로, 구체적인 시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말씀은 붕 떠서 땅에 닿지 않는 말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쓰인 본래 언어 연구, 상황 연구, 역사 연구, 사고방식 연구 또 글을 쓴 사람들의 의도까지 다 합쳐 연구 하는 것이고, 그렇게 깊이 연구할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오늘 신약성경 본문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헬라어로 말해야 하는 것인가요? 구약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면 반드시 히브리어로 말해야 합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외국사람으로서 아무리 헬라어를 배우고, 히브리어를 배워도, 그 말을 생활언어로 쓰고 말했던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감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원어를 그만두자는 뜻이 아닙니다. 연구를 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감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자는 것입니다. 일례로 성경말씀 읽으며 오늘처럼 양떼 이야기, 목자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동남 아시아나 한국 같은 지역에 오셨더라면 목자와 양떼 이야기 대신 논에서 농사 지는 농부와 씨앗 뿌리는 이야기 같은 농경문화가 예수님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시던 지역이 중동의 이스라엘 지역이고, 그와 비슷한 풍토의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이 유목민 문화와 관련되어 있기에 양과 목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양이야기. 양떼이야기. 목자이야기가 성경말씀에 자주 나오면서 이 당시 삶의 틀을 통해, 구약은 구약대로 신약은 신약대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다른 문화권의 풍토 이야기긴 하지만, 양떼와 목자 이야기를 잠시 들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양떼 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 양떼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목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목자가 아닌 선한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받들어, “나 예수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인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분을 지켜주는 선한 목자가 되겠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선한목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목자란, 잃은 양을 찾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찾을 때까지 찔리든, 매 맞든, 야수를 만나든, 목숨을 담보로 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입니다. 잃어버린 양 말고도 목장에 사는 양떼들이 있습니다. 밖에 있는 야수들은 이 양떼들도 그냥두지 않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렇듯이 야수는 항상 와서 먹이감인 양을 잡아먹으려 합니다. 야수가 오는 때 목자는 자기가 관할하는 양떼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을 보니, 목자도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양떼를 돌보라고 고용된 소위 ‘삯꾼’이라 이름하는 삯꾼목자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용된 목자’입니다. 이 사람은 일급, 주급, 월급을 받고 채용된 사람입니다. 삯꾼 목자는 양들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한 마리 야수가 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야수를 물리치고, 양떼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단, 두 마리 이상의 야수가 오면 이를 혼자 감당할 수가 없으니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 피해 버려도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삯꾼 목자는 그렇습니다. 삯꾼 목자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목자는 임금 받고 고용된 사람이니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삯꾼 목자와 다르다. 야수가 두 마리가 오든, 세 마리가 오든, 내 목숨을 잃을망정 나는 한 마리 양의 목숨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어 놓을 것이다. 내 목숨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는 목자이기 때문에, 내 양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삯꾼 목자가 아닌 선한 목자로 여러분에게 왔다. 내 말을 들으라.”
여러분, 선하다는 말은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하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부모 되신 여러분, 자식들에게 선한 어머니, 선한 아버지이십니까? 자식 된 여러분,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드리는 선한 아들, 선한 딸이십니까? 그렇습니까? 나라, 가족, 우리사회 지도자, 또는 한 구성원, 서로가 ‘목자와 양떼’가 어떤 관계인지 한 마디 말만 가지고도 열 길까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선한목자란 한 마디 말만 가지고도 양떼와 소통할 수 있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목자와 양떼는 소통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같으면 더 소통하기 쉽겠지만, 목숨을 내어 놓은 소통을 한다면 어떻게든 소통은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목숨을 담보로 사랑할 수 있으면, 소통은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목숨을 내어 놓지 않으면, 월급 받은 만큼만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입금 받은 만큼만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더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입금 받은 것을 넘어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하다는 말은 목숨을 바치는 걸 의미합니다. 양떼 이야기와 목자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금방 알아차렸으며, 유목민이 살았던 중동과 북아프리카 주변 지역 사람들도 목자와 양떼 이야기의 진수를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저희도 이 이야기를 알아듣지만, 남의 것을 소화시켜서 알아듣는 것뿐입니다. 가슴으로 직접 와 닿지 않지만 그 뜻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유목민이 살았던 중동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중동에서는 3개의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에서 생긴 유대교, 두 번째는 시간이 많이 흐른 다름에 생긴,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 세 번째는 유대교에서 새끼쳐 나온 기독교입니다. 세 종교 모두가 성경에 있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모시는 종교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3개인 것이지요. 이삭의 후손을 따르는 종교가 유대교이고, 유대교 후손인 예수님을 따르는 종교가 우리 기독교, 이삭의 동생 이스마엘을 따르는 종교가 이슬람교입니다. 세 종교 모두 똑같이 조상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희망도 되고, 골칫거리도 되는 이 세 종교의 조상이 모두 아브라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중심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s)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종교 강의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양떼 이야기와 관련하여 조금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현재 아프리카는 어렵게 사는 대륙이고, 1900년대 기독교인 비율은 9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무슬림 비율은 36나 되었습니다. 60년이 지난 후 통계를 보니 기독교인 비율이 44, 무슬림 비율이 40로 역전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 이유를 살펴보니, 서구식민지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그 영향을 받아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진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이슬람 신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수단 신학자가 쓴 글을 읽으며 새로운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신학자는 점점 증가하는 수단의 기독교인에 대해 분석하며 새로운 복음의 전파에 대해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 언론 보도에서 <수단>(Sudan)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 보셨지요? 작년 국민투표를 통해서 남북이 분할하기로 하였습니다. 북부는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남부는 기독교도가 많이 삽니다. 북부는 부자이고, 남부는 가난합니다. 무함마드 등장 이후 아랍에 살던 사람들이 수단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여 수단 전체를 아랍화 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아랍민족이 많습니다. 이렇게 북수단을 이루었는데, 이곳의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종교는 이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단 남쪽의 수십만 원주민은 토속어를 쓰고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력으로 기독교 복음을 받았습니다. 방금 언급했던 수단 신학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슬람 신자였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랍어를 배워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아랍문화를 깊게 알지 못하면 무함마드의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슬람 경전은 실제로 번역이 불가능합니다. 무슬림들은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했듯이 메카에 수백 만 명씩 모여 성지순례를 합니다. 그래야 구원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반대로 남수단 사람들은 각자 여러 토속어를 쓰면서도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서로 말은 다르지만 예수님의 목자 이야기를 똑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기독교는 하나의 언어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 수천 가지 종류의 언어로 전파되면서도 예수님은 단 하나 주인이시며,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아마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양한 언어로 전파된 것 같습니다. 수단의 경우는 식민지와 상관없습니다.
아프리카 지도를 펴 보시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살펴봅시다. 여러분 측에서 보면 왼쪽 밑으로 내려가서 서쪽에서 중부까지는 프랑스 식민지입니다. 프랑코폰 지역입니다. 중간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전부 영국식민지여서 앙글로폰 지역입니다. 리비아 국가원수 이었던 카다피는 죽기 전에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의장이었습니다. 카다피의 죽음 이후 프랑크폰과 앙글로폰의 경쟁으로 인해 신임 의장을 선출하는 과정에 난항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이야기를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만, 프랑스 배경과 영국 배경의 국가들이 서로 싸우면서 갈등이 있는 모양입니다. 수단의 종교는 식민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과 북의 두 분단된 종교입니다. 그러면서 이 저자가요 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말씀을 읽었더니 이런 확신을 가졌다고 책을 썼는데. 제가 감동 받았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120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주셨고,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 다른 언어로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 알아 들었습니다. 이방에서 온 사람, 유대에서 온 사람,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 말이 달랐는데, 모두가 다 성령을 받고 감동 받아 “예수는 우리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의 복음은 언어가 달라야 맛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언어 만을 쓸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전파돼서 마음과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소통, 교통, 공감시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꾸란이라는 경전은 아랍어로만 읽을 때 좋다고 그러는데 맞는 것 같고요. 성경말씀은 원어로 읽으면 좋긴 하겠지만 우리 한국말로 읽어도 은혜 받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를 초월해 감동과 공감의 언어로 우리한테 다가옵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목자를 주시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수단이야기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1990년대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수단에 남북갈등이 있었고, 이로 인해 200만 명이 죽었는데, 남쪽 기독교인들이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를 돕겠다고 헌금과 헌물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도움의 손길을 편 곳은 영락교회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수단정부에 구호의 손길을 펼쳤더니, 그것이 북쪽의 이슬람 정부의 의해 원조물자가 무기를 사는데 사용되었고, 그 무기는 남쪽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한국교회가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수단은 남쪽은 가난하지만 유전이 많고 대신 운송할 항구는 없고, 북쪽은 땅은 부자지만 석유는 적고 대신 항구가 있어 두 지역이 서로 복잡한 형국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는 양들이 사는 목장이 많다는 것입니다. 목장마다 목자가 있습니다. 어떤 목자가 필요합니까? 오늘말씀대로 목숨을 바쳐서 구원해 주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셔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 지는 목자가 진짜 목자입니다. 어떤 십자가 입니까? 죽음으로 끝내는 십자가가 아님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서 양떼를 구한 예수라고 이름하는 목자는 부활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목숨을 바쳐 죽은 목자가 아니고, 목숨을 바쳐서 양떼를 구원하고, 자기도 양떼도 다 부활로 새 생명 주시는 부활이 있는 십자가의 목자입니다. 목숨을 바치고, 새 생명을 주는 목자. 그 목자 이름이 선한 목자입니다. 이 목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목장이 있습니다. 경동교회 목자는 바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분이 있는 곳마다 목장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다고 목장이 되는 게 아니고, 목자가 있는 곳에 교회가 생깁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목장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 가 없습니다. 전 세계로 번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들도 새로운 목장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은 "내"가 다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겠다. 여러분 이슬람 신자는 메카에 가서 성지 순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양떼는 예수님을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 성시순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기위해서는 꼭 필요한게 아닙니다. 어디에 성지가 있습니까? 예루살렘이 전 세계로 퍼졌는데, 그러면 어디로 가야 다시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옛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그 예루살렘 말고 이제는 "새 예루살렘"에 가면 "나"를 만난다고 하십니다. 새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 그런 목자가 찬양되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저는 오늘 경동교회가 이런 신앙 가지고 만들어 졌고, 오늘 모이신 여러분이 새 예루살렘인 "경동교회"에 와 있습니다. 우리 목자를 만나려고 와 있습니다. 목자는 지금도 여러분 한 분, 한 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에 동참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울;는 사순절을 지켰고, 부활절 지난 다음 오늘처럼 예배를 드립니다.
양떼 중에 한마리는 자기의 멋대로 꼴을 먹고 물 마시려고 하다가 대호를 이탈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어떤 고난과 아픔을 불구하고서라도 양떼를 찾아 우리안에 있는 수를 본래의 백명으로 다 채웁니다. 양떼가 양이 아니고 우리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학식이 있고, 의식이 있고, 판단력이 있고, 지성도 있고, 결단도 있고, 자유의지도 있고, 양떼 같지 않은 특권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람집단이 잃은 양처럼 주인을 버리고 나가면 어떻게 할까요? 그 이야기는 오늘 양 이야기에는 없습니다만, 예수님 비유 중에 탕자 이야기 보면 아버지는 집나간 양, "사람 양"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단 사람 양은 의식적으로, 독자적인 판단으로 집을 떠났기 때문에 돌아오려면 믿음으로, 자기의 결단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짐승 양"은 사람이 아닙니다. 먹으려다가, 마실려다가 부주의 하여 이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아버지 제 분깃 주십시오. 내 멋대로 즐기고 싶습니다.”하고 자기 의지로 아버지를 떠났음으로, “의지"로 회개하고 결단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는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우리 주변에 수많은 어려움들, 갈등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품이 넓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 받아 주신답니다. 단 사람 양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올지라. 다 용서하고, 받아주마. 목장을 아름답게 꾸미라. 새 예루살렘이라고 내가 칭찬해 주마. 그냥 길 잃은 사람은 내가 찾으로 돌아다니면서 맞아 주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곳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분이시고,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분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와라. 내가 받아주마. 내가 목숨으로 죗값을 치러 주마. 나한테 와서 구원의 동산에 참여하자"고 말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목장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가. 사회가 정말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축복받는 목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땅이 주님의 새 예루살렘 목장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