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8장 18~25절
설교문
우리나라의 성자인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에서 조만식, 이승훈, 유영모, 이광수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하고 오산 교정을 떠나 연희 전문 상과에 입학하여 민족 산업의 중흥과 민족구원의 꿈을 불태우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 안질로 시달림을 받아 시력이 약해져서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와 쉬다가 우연히 김익두 목사의 부흥사경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그때 은혜를 받아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목사가 되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국토를 강점하는 것을 넘어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우리 조선을 정신적으로도 병합시키려고 했습니다. 주 목사는 그 신사참배라는 우상으로부터 한국교회를 건지려고 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서서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설교 말씀은 한국교회에 남긴 주목사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는 요한복음 11:16에 있는 도마의 결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겁이 많고 확신이 부족했던 도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주님을 따르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고 청하였습니다.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도마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주목사는 사경회에 모인 많은 성도들에게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버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나에게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위한 제물이 되겠습니다. 주님 위한 십자가 고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 앞에 서서 어찌 주님 얼굴 뵈오리이까 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한때 의심의 사람이었던 도마조차 주님을 따르고자 죽음을 각오했다면 우리도 도마처럼 못 할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순교의 길이 너무 험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목사는 하늘나라에서 주어질 영광 때문에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은 험한 십자가의 길이요 고통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주목사는 무서운 고문 때문에 그의 육신이 찢어지고 문드러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고 그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본문을 쓴 바울은 다메섹 회심 후(AD 34년경) 소아시아 지역과 마게도냐와 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과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아마 종교인 중 바울 보다 더 고난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고난을 받았습니다(고후11:23-27). 바울은 그 자신이 당하는 고난보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의 어린 자식이 당하는 고통을 말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 바로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갖도록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아무리 고난의 역사라고 하지만 바울이 처음 기독교를 세워 나갈 때의 고난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본문의 로마서는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로마 교회는 당시 갈리큘라 황제와 네로 황제 시대였기 때문에 박해는 더욱 심했습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 정책에 반대되기 때문에 기독교를 핍박하여 희생 제물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엄청난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이겨 나갔습니다. 그가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절)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 때 당시 로마의 대 박해 때문에 사자 굴에서 사자 밥이 되고, 배고픔과 추위와 채찍질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미래의 영광을 보고 현재의 고통을 참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즉, 현재 당하는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여 미래의 약속된 영광스러움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고난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의 강도는 미래에 받을 영광의 강도보다 세지 못합니다. 그 때의 영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라고 했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신중하게 심사숙고한 끝에 얻어낸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고난은 바울이 이미 당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너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장차 우리가 갈 하늘나라의 영광(고후12:3-4)을 보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고난을 감사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요셉은 이 영적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버림받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그 때 '아! 주님은 나의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 맞아, 어떤 고난에도 주님은 나를 도와주실 거야‘라는 믿음으로 견뎠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까, 요셉은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노예시장에 종으로 팔렸을 때도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었고, 보디발 장군집에 팔려갔을 때도, 보디발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갔을 때도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 덕분에 고난을 겪을 때 이길 힘이 생긴 것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축복이 열렸습니다. 꿈을 꾼 애굽 바로 왕이 그 꿈을 풀어 줄 사람을 찾던 중에 요셉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 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기에 바로의 꿈도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다윗 소년도 사울 왕으로부터 오해 받아 공격받을 때에도 절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날을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쓰라린 고난을 당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편 31:19절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고난은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침내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이스라엘의 최고로 축복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가장 큰 축복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병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부도를 맞아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을 체험시킵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됨으로 축복이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아픔과 상처 때문에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우리에게는 은혜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이 세상의 고난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시련과 환난을 이기려면 믿음으로 그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위한 고난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보상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거룩한 일을 위하여 고난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신자는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해야할 믿음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한 여집사님이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그녀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여자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며 주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여자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지니라”(막8:34) 그 여인은 이에 “아멘! 아멘!”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애기도 있습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여자의 모습, 이 모습이 우리 모습일 수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절)라고 말했습니다. 즉, 세상의 피조물도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란 자연만물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연만물을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탄식하고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만드실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만물은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과 함께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창3:17-19). 그래서 만물은 허무한데 굴복하였고(20절), 썩어짐에 종노릇(21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물에게는 평화가 없고 무서운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이 모든 자연만물을 보면 거기에서 탄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핫이슈 가운데 하나는 제주 서귀포의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단의 이정훈 목사와 가톨릭 신부 한 분이 구속, 기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제주도를 전쟁을 수행하는 해군기지로 만들지 말고 세계인이 방문해서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물론 해군기지를 추진하는 정부도 이해할만 합니다. 언제나 남침 가능성이 있는 북한과 서해를 위협하는 중국 그리고 제국주의적인 욕망을 꺾지 않고 있는 일본을 목전에 둔 우리로서는 서해와 남해를 지킬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북한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평화를 추구해서 이 땅을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는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개발을 하더라도 환경 파괴가 최소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계를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땅의 피조물을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들이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임하였고, 또 지금(now) 임하고 있으나, 최종적인 그 나라는 아직(yet)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이제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주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며 이 피조세계를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 믿는 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의 못 박히심과 그 혹독한 고난을 다 참고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 고난을 다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물질에 매어 그 나라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발걸음을 중단하고 보이지 않는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이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겨놓고 전쟁하는 것이니 우리 성도들은 이미 이긴 이 승리의 전쟁에 두려움 없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잠깐입니다. 이 고난이 지나면 곧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오늘의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