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열왕기상 8:26-28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의 종인 제 아버지 다윗 임금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오늘 주님의 종이 주님 앞에서 부르짖으며 그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아멘
사도행전 1:7-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멘
누가복음서 24:49-53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아멘.
설교문
오늘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구름타고 승천하시는 날입니다. 이 승천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면 몇 군데 없습니다. 그래서 구름타고 말고는 정확하게 어떻게 승천하셨는지 잘 모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대부분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다스리시고 바꿔 주시는 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무슨 내용으로 선포하셨는지에 대한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처럼 구름타고 올라가셨다는 기록은 아주 조그만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니 한 가지 신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확인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었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가 없습니다. 아마 유대교 계승형태로 남아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말할 때 가장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마치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도는 것과 같이 부활을 중심으로 부활의 둘레를 모든 세계 역사가 도는 현상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활을 중심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죽으려고 달리신 게 아니라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희망이 있지 않나요?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부활하신 분이 병을 고쳤습니다. 부활하신 분이 성탄 때 태어나셨습니다. 이런 방향이 하나입니다. 또 하나의 방향은 거꾸로 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처럼 구름을 타고 본래 계셨던 하늘나라를 향해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좌로 우로 방향이 합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양이 오늘 기록에 보면 “구름타고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2천 년 전에 성경을 기록하신 분이 로켓 발사를 보셨더라면 주님은 로켓을 타고 올라가셨다고 기록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이 두 공간을 이어주고 맺어주는 상징이 무엇이었을까요? 구름타고 갔다는 말은 구름타고 둥실둥실 떠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이미지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김포공항에 가끔 갔는데 그때마다 가슴에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환송장에 올라가서 환송 할 때 떠나는 비행기를 향해서 손을 흔듭니다. 그러면 비행기가 이륙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때 제 생각에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것이 비행기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에 맞던 맞지 않던 저에게는 하나의 이미지이며, 메타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땅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본래 오셨던 그리고 계셨던 하나님의 우편을 향해서 구름타고 올라가십니다. 하늘은 열려있고, 땅은 하늘을 향해서 갑니다. 하늘과 땅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 따로 땅 따로가 아닙니다. 하늘이 없는 땅 상상이 되십니까? 혹시 땅이 없는 하늘 얼마나 단조로울까요? 두 가지가 불가능합니다. 땅에 하늘이 오고, 하늘에는 땅이 합쳐지고, 두 영역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승천이야기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구름’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연결됐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분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옛날에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에 이스라엘 땅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이 존중하는 조상의 대명사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장자권을 두고 다퉜다가가 장자권을 빼앗은 다음 도망을 쳐야 합니다. 도망치는 과정 중에 베델이라는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잠을 자는데 갑자기 꿈에 하나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야곱에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 너희 아버지 이삭, 너 야곱, 대대로 이어오는데 조상부터 나머지 자손에 이르기까지 나 하나님이 축복을 풍성하게 주마. 자손도, 땅도 번창 하게 주마하고 약속하십니다.”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네가 가는 곳마다 나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으마.” 그래서 나온 말이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그래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된 하나님이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데 땅에 있는 야곱하고 어떻게 연결 하셨냐면, 꿈에 사다리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하늘과 베델이라는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을 해놓으셨는데 약속을 전달하러 천사들이 내려옵니다. 야곱은 기도로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천사가 간구를 가지고 사다리를 통해 올라갑니다. 무슨 하늘과 땅에 사다리가 있었겠습니까? 야곱에게 보인 환상, 이미지, 야곱에게 보여졌던 하늘과 땅이 만나는 메타퍼가 사다리입니다. 저는 이 사다리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늘과 땅은 기적처럼 하늘이 땅에 임해서 땅이 되고 땅이 갑자기 올라가서 하늘이 되고 그런 기적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올라 갈 때 구름으로, 여기 야곱에게는 사다리를 통하여, 오르내립니다. 형식만 다를 뿐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축복을 주실 때 하늘에서 낙뢰가 치듯이 아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하늘이 직접 기적처럼 땅에 오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진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매일 매일처럼 역사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이 역사에 임재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다리 이야기가 왜 나오냐면 하나님도 전지전능하시지만 인간의 역사 하루하루를, 한 건 한 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단계마다 내려오셔서 역사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말로 일확천금은 없습니다.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서 하나씩 짐을 받아주면서 대신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슬픔이 있지만 하나하나 극복해 가면서 기쁨과 희망을 얻을 때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단계별로 받으십시다.
여러분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개신교 최대의 신학자 이름을 많이 들어 보셨죠? 이분은 신학을 하면서 음악가 중에 모짜르트(Mozart)를 좋아했습니다. 이분이 모짜르트 음악에 관한 해설서를 썼습니다. 큰 해설서는 아니고 작은 해설서입니다. 그곳에 보면 그가 모차르트 음악에서 배운 신학이 나옵니다. 물론 모자르트는 천주교 신자이며, 학자도 아닌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면서 바르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모짜르트처럼 성경말씀을 잘 해석한 사람이 없답니다.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면 슬픈 감성의 음악이 흐르는데 그 다음 슬픔이 흐르고 나면 기쁨을 말하는 곡이 흘러나오는데 슬픔을 한 순간에 몰아내고 기쁨이 온 것 아닙니다. 슬픔 자체를 조금씩 조금씩 슬픔보다 기쁨이 훨씬 큰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슬픔을 압도하는 형식이랍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모짜르트 음악을 좋아합니다. 마치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한데 죄악을 갑자기 하나님이 오셔서 없애시는게 아니라 죄악보다 더 큰 은혜로 죄악을 압도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밝은 빛을 주셨는데 그 빛은 어둠을 한 순간에 쫓아내지 않고 빛이 비친 만큼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크면 어둠이 작아지고, 어둠이 크면 빛이 작아지고 이렇게 빛이 비추어서 어둠이 작아지게 하는 방식으로 모짜르트는 음악을 구성했답니다. 너무 인간적인, 너무 아름다운 자연스러운 과정이 그한테 마음이 들었는데 그게 바로 신학을 해석하는 방법이랍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음악을 잘 모르고, 신학에 있어서도 초보 생입니다. “아하~ 성경말씀에 나타난 사다리 이야기하고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가!”고 감탄했습니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납니다. 밝은 곳에서 터널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어둠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둠이 조금 있으면 빛이 많을 거고, 빛이 많으면 어둠이 줄어듭니다. 이게 바로 터널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에 기쁨과 슬픔이 있는데 슬픔이 바로 기쁨으로 대치되지 않습니다. 슬픈 마음을 기쁨으로 대치하려고 하면, 기쁨을 생각하면, 슬픔보다 기쁨이 커서 더욱 당당해서 때로는 기쁨이 슬픔을 휘어 감고 머물 수도 있고, 빛이 비춰지면 비춘 만큼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다리 타고 한 단계 한 단계 내려오는 방식으로 우리 인생은 기쁨을 하루하루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다리식 단계가 없으면 아마 우리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하루의 혁명을 바라며, 모든 것이 기적처럼 뒤바꿔지는 허상으로 이 세상을 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에 “그런 허상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순간순간의 모든 과정속에 역사하십니다. 허상을 갖고, 신앙이라고 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역사참여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성전이라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오늘 열왕기상 이야기는 다윗 임금이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을 솔로몬 왕이 마지막 완성해 놓고 봉헌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아까 장로님께서 단하에서 제단을 향하여 기도하셨던 모습하고 똑같이 연상하면 됩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와서 손을 모두어 하나님께 봉헌사를 하는 구절입니다. 열왕기상 8장 전체를 읽어보면 나옵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인 한 부분만 빼면 이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성전을 주님께 바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이곳이 아니고, 하늘인줄 압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주님은 이곳을 내려다보시고,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신 줄 믿습니다. 제가 백성들을 위해서 마음과 뜻을 다해 기도를 드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들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저한테 말씀하실 때 이 성전을 통해서 말씀하옵소서. 혹시 당신을 모르는 이방사람들이 와서 축복을 달라고 기도를 하거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성전에 오셔서 축복 베풀어 주옵소서.”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오늘 이 땅에 있는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새겨 놓으시지 않습니까. 그 이름 때문이라도 이름 값 좀 해 주십시오". 많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조금씩조금씩 축복해 주옵소서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약속한 게 있지요. 내가 승천하고 나면 나대신 성령을 보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여러분은 새롭게 시작하십쇼. 그 전까지 성전에 머물면서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올라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공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우리 경동교회라는 성전이 있지요.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의미 없는 공간이 됩니다. 성전인 공간에 오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간 이야기 나왔으니까 제가 읽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해비타트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거 아시죠? 어려운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운동입니다.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가 있습니다. 이 신부가 시작한 집짓기 운동, 에마우스(Emmaus) 운동입니다. 이 신부님이 1912년 태어 나셔가지고 2007년에 돌아 가셨으니까요 94년 동안 집지기 운동을 했는데 현재는 44개국 350개에 에마우스 공동체가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쓴 책이 우리나라에 <단순한 기쁨>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한 구절만 소개합니다. 집짓기운동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부랑아와 전쟁고아들이 집이 없어 헤매고 있을 때 이 신부님은 집짓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집, 그런 집을 지어서 오늘까지 빈민 구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이 운동을 하면서 맞은 첫 번째 가족이야기를 책에 썼습니다. 어떤 여성이 아이들 3명을 데리고, 두 건장한 남자와 다 늙은 할아버지 한분과 함께 찾아와 자기에게 “집 좀 주세요” 라고 했답니다. 젊은 여성, 두 남자, 셋 어린이, 한 할아버지, 모두 여섯 명입니다. 너무 사정이 어려워 보여 여러 사람이 꽉차게 머물고 있던 집안에 남아있는 예배 보는 장소의 예수상과 십자가를 치우고 조금한 공간을 마련해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날 두 남자중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욕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겪은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살아가면서 집을 얻었다가 우리들이 누군지 알면 쫓아내고, 이렇게 쫓기고 쫒기고 하다 이곳까지 왔습니다. 제가 이 여자의 법적 남편입니다. 제가 전쟁에 참여해 독일군 포로로 살다가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포로로 있는 동안 소식이 끊기니까 제 아내는 제가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한 모양입니다. 저외의 사이에 한 아이가 있고, 새로 결혼한 남성과 사이에는 아이 둘이 있습니다. 제가 돌아와 보니 그렇게 네 식구가 있더군요. 그래서 돌아와 싸워서 격투를 벌릴까 생각하다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냥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쫓겨납니다. 그래서 합의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전쟁의 상혼이 없어 질 때 까지 저는 밤에 밤새도록 일해서 먹을 것을 벌고, 새 남편은 낮에 일해서 먹을 것을 벌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이요 상혼입니다. 아무도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가족이 자기 집 문 앞에다가 푯말을 하나 붙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집은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입니다 라고요. 삶의 기쁨이 이 집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남북의 이산가족이 많습니다. 가족은 다 찢겼습니다. 같이 만나도 분단의 비극때문에 서글픈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신부님 이야기는 하나님께 최종판단을 맡기고, 있을 곳을 줘야 한다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고백으로 에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이 가족의 이야기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해보라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죄악을 가지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죗값만 따진다면, 하나님이 우리한테 무엇때문에 집을 지어주십니까? 쫓아내지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집을 지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솔로몬이 말했던 성전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임재 하셔서 작은 교회가 되었든, 큰 교회가 되었든,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인간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님 이후로는 성전에서만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보고 하는 말입니다. “성전은 고착된 건물이 아니다. 성전은 움직여 살아간다. 살아 있는 인간은 다 성전이다"(고후 6:16). 인간이 성전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능력을 받는 곳이면, 성령이 사다리가 되어서 하늘과 땅을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곳이면, 하나님은 그 곳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만나서 위로를 줘야 되겠다. 사랑을 베풀어야 되겠다. 용서를 줘야 되겠다. 그리고 구원을 베풀어야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타고 올라가는 상징, 사다리로 올라가는 상징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금방 오셔서 하룻밤 사이에 우리를 구원하지 않지만, 우리의 고뇌와 아픔과 이런 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물 속에 오셔서 눈물을 한꺼번에 없애주지 않지만, 웃음을 더 크게 하셔서 눈물을 작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 오셔서 절망을 하룻밤 사이에 없애주지는 않지만, 희망을 크게 하셔서 절망을 작고 작게 해주십니다. 빛이 중요하지요. 하나님은 희망의 빛을 비추지만 이 빛 가지고 한꺼번에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작고 작게 해서 줄어들게 해서 빛의 크기를 크게 크게 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처럼 사는 거 아닌가요? 매일 매일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하루하루가, 한 달 한 달이, 고난과 역경 속에 있지만 줄어들고 작아지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이 희망이 사다리를 통해서 내려오고 계십니다. 이 희망, 좋지 않습니까? 매일 매일 주시는 희망의 빛이 반갑지 않습니까? 오늘도 한 단계 한 단계 그렇게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사다리 타고 오신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사다리 오르고 내리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사다리 주심을 감사하십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