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성령이 보증하는 평화의 복음

2012년 5월 27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스가랴서 4:6-9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아름답다, 아름답다!’하고 외칠 것이다.”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멘.

고린도전서 2:12-15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것을 가지고 신령한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며, 그는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4:23-27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아멘.
 
설교문  
  
오늘은 성령이 오신 날입니다. 우리들은 특별 예배를 드립니다. 성령은 오늘만 오시는 게 아니고 늘 오십니다. 그러나 오늘 오시는 날은 아주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구약시대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때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모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신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참 기묘하셔서 두 번째 하나님은 짧게 살다 가셨습니다. 우리는 33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구약시대 역사와 비교하면 짧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이 올라가시면서 아주 오랫동안 우리에게 오실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입니다. 그 분 이름이 성령하나님 이십니다. 그 분은 본래부터 아버지 하나님, 예수 하나님과 같이 계셨지만 홀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중요한 대목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본성으로는 한 분이신데, 인격으로는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성자 예수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우리는 이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왜 이 날을 성령 강림절이라고 우리들이 축제의 예배를 드립니까? 특별히 우리한테 주시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이 베풀어 주신 것도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속성도 사랑이시고, 세상을 다르시는 방식도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나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와서 실천한 것뿐이다 라고. 십자가도 사랑이고, 부활도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온갖 죄로 물든 사람의 죄도 씻어주고, 악도 몰아내고,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을 구원해 줍니다. 부활의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은 약한 게 아니고, 사랑은 작은 게 아니고, 사랑은 힘없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깁니다. 여러분, 사랑은 이기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사랑입니다. 악한 자를 몰아내고 선을 이기게 하는 것이 부활이 보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렇한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루어지는 집 그리고 세워지는 집이 있는데, 그 집을 ‘평화의 집’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간다. 나는 가서 우리 하나님아버지 우편에 앉아 있어야겠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여러분한테 선포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나 대신 하나님의 분신인 그 분의 영을 보낼 것인데, 그 분은 오셔서 내가 십자가에서 부활해서 입증해 보인 이기는 사랑, 구원하는 사랑, 살리는 사랑, 세우는 사랑을 전파할 것이다. 전파되는 곳마다 너희는 사랑을 머금고 평화를 이루면서 살 것이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 폭력이 없는 것,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유가 들풀처럼 피어나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어디에 이루어 져야 합니까? 3·8선에 이루어 져야 하고, 아프카니스탄에 이루어 져야 하고, 중동에 이루어 져야 합니다. 온 세상 곳곳에, 전쟁과 갈등과 폭력이 있는 곳에 평화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성령은 그런 평화를 보증해 주십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평화 한 가지를 꼭 지키라고 합니다. 세상과 온 땅이 평화롭다고 하는데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불안과 좌절과 절망에 살고 있다면, 곧 평화가 없다면, 세상의 객관적 평화하고, 우리의 실존적 평화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평화가 없다면 어떻게 평화를 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이 만든 집이라는데 집은 전 세계에 있고, 우리들에게 없다면, 이런 평화가 여러분에게는 좋으십니까? 그렇게 구원 받으면 행복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 안에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끼면,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 우주가, 이 자연이 평화롭고, 좋을까요? 그런 평화의 세상을 즐기는 분은 혹시 입으로는 평화로울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괴로워하면서 평화 이야기를 하실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내가 주는 평화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 입니까? “세상의 평화도 받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도 받아라”, 그런 말씀이지요.

오늘 구약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가서 70년 살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올수 있도록 귀환 명령을 내린 사람은 페르샤의 고레스왕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솔로몬이 건축했던 성전이 다 무너졌는데, 다시 건축해라”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없으면 길을 잃은 백성과 같습니다. 심장을 잃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새로 건축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그 당시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 또 주변 국가에 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 개축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도탄에 빠집니다. 이때 성령이 오셔서 슬룹바벨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물량적으로 성전을 짓기가 어려운 것을 잘 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 하고 이로 인해 집 하나 건축이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집짓기 어렵죠?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성전은 시멘트로, 나무로, 사람들의 의견으로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으로 짓는 것이다. 기다려봐라. 하나님의 영이 오면 성전이 건축된다.”고 오늘 스가랴서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성전 짓는 영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 가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영이시기도 하다. 단, 영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 안 보이시죠? 저도 못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누구나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성령의 은사가 여러 가지이며, 은사를 받는 모습 또한 다양한 것 같습니다. 우리 예배도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만 해도 경동교회와 다른 교회의 예배가 다릅니다. 우리 경동교회는 조금 조용합니다. 다른 교회는 조금 시끄럽습니다. 서양예배를 봐도 우리처럼 조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저는 성령은 한 영이신데, 받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이 있다고 봅니다.

다른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2008년 4월 EBS방송에서 2회로 나눠 다큐멘터리 <동과서>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과 차이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제가 직접 방송은 보지 못하고 책을 통해 봤습니다. 이 방송에서 한 장면이 나옵니다. 원숭이, 펜더, 그리고 바나나를 나뒀습니다. 서양 사람에게 세 가지가 있으니 조합을 해보라고 했더니 그들의 조합은 원숭이와 펜더를 한 짝으로 조합합니다. 그 이유는 둘 다 똑같은 성향을 가진 동물이니까요. 바로 속성과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조합을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원숭이와 바나나를 하나로 조합합니다. 그 이유는 원숭이도 동물이니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인가요? 하나는 같은 ‘성향’이 중요하고, 또 다른 한쪽은 ‘관계’가 중요합니다. 혹시 양식당에 가셔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똑같이 스테이크를 먹는데, 서양 사람들은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마음대로, 먹고 싶은 대로 스테이크에 양념을 바르고, 썰어 먹습니다. 한국은 불고기, 갈비를 주문하면 어떻게 나옵니까? 부엌에서 칼로 다 요리해서 한 입에 먹기 좋게 나옵니다. 우리는 포크와 나이프가 없는 대신에 젓가락이 있습니다. 젓가락을 이용해 부억에서 요리해 가져운 대로 딱 집어서 한 입에 먹습니다. 소위 ‘젓가락 문화’의 특징입니다. 고기 덩어리가 성령의 은사라면 서양 사람들은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썰어 먹을 것이고, 우리는 부엌에서 다 요리해서 나온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것입니다. 어떤 은사가 좋으십니까? 성령을 어떻게 먹으면 좋습니까?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이 사람하고 살면서 사랑하고 싶을 때, 제가 사랑이라 이름 하는 고기 덩어리를 상대방에게 줍니다. 저를 사랑하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알아서 저의 사랑고백을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잘 썰어서 맛있게 먹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이는 저보고 사랑을 하나하나 다 요리해 가져다 주기를 요구합니다. 돈도 벌어 달라. 사랑도 해 달라. 업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이건 여러분 판단에 맡깁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똑같이 부어 주는데 각 지역의 문화와 지역적 특징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양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양태가 다르지만 똑같은 핵심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주시는 똑같은 "사랑" 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롭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속을 보면, 평화 속의 핵심에는 사랑이 흐르고, 사랑이 움직여야 된다고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에마우스(Emmaus) 운동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타인’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다양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샤르트르(Jean-Paul Sartre)는 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타인이 없었으면 좋겠다고요. 타인이 지옥이니,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이며, 지옥에서 살기 힘들다는 거죠. 여러분에게 타인이 누구이십니까? 그 타인은 지옥 같습니까? 혹시 가정에서 지옥하고 사시나요? 타인이 지옥 같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 오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옥한테 사랑 베풀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증오, 무관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은 “아니다!”입니다. 피에를 신부가 에마우스 운동을 하면서 한 말입니다. 샤르트르의 말을 바꾸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은 타인이 지옥이 아니고, 타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타인 없이 사는 내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옥을 벗어나려면 나는 타인을 찾아야 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 타인은 생각이 다른 사람 일 수도 있고, 국적이 다를 수도 있고, 아주 저를 미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천국은 무엇입니까? 내가 함께 살고 싶은 타인, 그 사람이 천국이고,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타인입니까? 내가 "나"인 것은 "당신" 앞에서 나입니다. 당신이 없이는 내가 나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싫거나, 좋거나 간에 당신이 타인이든, 내 분신이든,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아까 동서양의 형태가 다름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제가 동양식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저는 관계를 맺고 사는데 하나님은 나와 타인의 관계입니다. 어떤 타인이냐면 절대적 타인이십니다. 당신이 내 지옥이 아니라 당신이 내 천국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예배당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셨으니 타인이신 하나님을 지옥이라 여기시는 분 들은 안계시죠?

한번 같이 고백해 봅시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나는 행복하고, 아름답고, 사랑이 있고, 그래서 당신과 내가 만든 것을 ‘평화’라고 이름하겠습니다라고. 이 평화 속에는 진실 된 사랑이 전류처럼 흐릅니다. 사랑을 고백 할 때,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둘 사이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평화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평안’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세계 평화, 사람사이의 평안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 말씀이 “세상은 평화와 평안을 같이 못 주는데, 나는 두 개를 같이 주마”고 하십니다. 다만 방식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다르다고 할 때, 세상의 평화는 이렇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제국의 식민치하에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어떻게 식민지에서 독립하나? 로마 황제를 섬기라고 하는데 하나님만 설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도대체 먹을 것을 주면서 자유도 뺏고, 신앙도 뺏는데 살길이 막막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제국 하에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들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 못 받고 살아야 했거든요. 로마의 황제에게 사랑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억지의 평화 말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평화를 주십니다. 그 평화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상당 기간 동안 해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한 번 찾아보십시다.

로마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핍박의 대상입니다. 황제도 섬기지 않았죠. 데모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때 로마제국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천덕꾸러기이며, 힘없이 밟히는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한테 로마제국은 완전히 적이고, 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제국을 사랑할 수 없죠? 여러분 일제 강점기 일본 식민제국을 사랑 할 수 있었습니까? 못합니다. 그들은 원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해라. 그러면 복 받는다"며, 뚱딴지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세상은 원수를 미워하지만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해라. 사랑에는 제한이 없다”구요. 그런데 313년에 핍박받고, 밟힘을 받았던 기독교 신앙이 황제로 부터 공인받고 얼마가 지난 후에는 로마제국의 심장인 국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현실입니다. 예수로 부터 시작하여 300년이 지난 다음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든 역설적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기독교가 너무 편해져 중세에는 타락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국교화가 잘못됐습니다.”하는 평가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역사에 있어서 어느 하나의 역사가 항상 올바른 역사로 남은 경우는 물론 세상에 없습니다. 잘됐다가도 타락하여 망하기도 합니다. 또 망했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합니다. 갱신의 역사를 계속합니다. 로마가 밟아 죽이려던 증오의 종교가 로마의 심장부를 뚫고 들어가서 로마의 국교를 형성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탱크도, 핵폭탄도, 총도 없었습니다. 로마가 국교를 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주 약함’ 입니다. 인간적으로 아주 보기 힘들고 취약한 모습, 사랑이라 이름 하는 그것 밖에 없는 미약한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이 말하는 사랑은 때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로마의 심장부를 뚫고 들어갑니다. 로마를 혁명합니다. 온통 권력과 부와 모든 사회 구조를 몽땅 뒤바꿔 버립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은 그리고 그독교의 사랑은 혁명을 이루었다. 다 뒤바꿨다. 로마를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렇게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가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습니다. 어쨌거나 그건 추후에 달리 다루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력가지고 평화를 이룬 경우 보셨습니까? 평화는 사랑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은 약하게 보이지만 엄청나게 강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너무 강해서 로마제국을 사랑의 힙으로 변화시킵니다. 원수를 왜 사랑하느냐 하면, 제가 원수를 만들면 저는 제가 만든 원수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만들려면 만들어 보세요. 원수를 미워하는 만큼 미워하는 원수가 여러분을 지배합니다. 자나 깨나 원수 생각일 것입니다. 원수로부터 해방 받으려면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세요. 원수임을 거부하세요. 스스로 해방받기 위해서입니다. 원수로 둘러 쌓여 있는 인간을 찾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대화하십시오. 이기십시오. 원수는 큰 죄를 짓습니다. 원수가 우리 가정에도 있을 수 있고, 각자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자산일 수 있습니다. 원수를 만드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원수에 압제 당하지는 마십시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비굴한 겨ㅁ양의 사랑을 실천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고, 해방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긴 것을 증명하십시오. 그리고 진실로 평화를 누리십시오. 진실로 승리하고 싶으시면, 평화를 누리고 싶으시면 원수를 거부하십시오.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십시오.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서 사랑으로 꿰뚫으십시오. 그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연약하게 보이는 사랑은 종국에는 승리를 만듭니다. 평화를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진실 된 성령의 역사를 오늘부터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꼭 이기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승리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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