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잃은 양 찾으신다

2012년 6월 17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에스겔 18:21-24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과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은 모든 죄악을, 내가 다시는 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킨 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범하고, 악인이 저지르는 모든 역겨운 일을 똑같이 하면, 그가 살 수가 있겠느냐? 그가 지킨 모든 의는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과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아멘.

디모데전서 1:12-16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5:1-7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 잃은 양을 찾으면, 너무 좋아서 어깨에 양을 메고 우리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베푼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목축업이 성행하던 시절, 목자는 우리안에 있는 양을 보호해 주고, 양들은 우리안에 있어야 안전을 보장 받습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생존도 보장 받습니다. 우리 안에 물이 있고, 먹을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벗어나면 불안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혹시 야수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있다는 말은 행복이요, 평화요, 안전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구원의 둘레를 벗어 난 것과 같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서 다시 우리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아흔아홉마리 양이 우리안에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잃은 한 마리양이 귀합니다. 그래서 한 마리 양을 데리고 우리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은 목자의 기본임무입니다. 사회생활에서 기본적인 윤리, 도덕으로 말하면 아흔아홉 마리 보다 한 마리가 양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높은 차원의 도덕에 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의 강요를 받는다면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 중에 한 마리를 택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우리안에 잇는 아흔아홉 마리 중에서 한 마리 양을 택한 게 아닙니다. 우리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마리가 더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99 대 1의 비율이지만, 그 한마리의 무게와 가치가 다른 99마리 보다 더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에 한 마리 잃은 양이 합해져서 백이 되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구원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말씀에 있으니 하나님은 그런 신인가 보다 하고 흔히들 생각하시지요.

이천년 후 오늘날 벌어진 일을 말씀드림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빈부격차가 늘어나 양극화가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문제의 중심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고 나섰습니다. 월스트리트뿐만 아니라 부의 상징인 뉴욕도, 시카고도, LA도, 아니 서울까지도 점령해서, 하나 밖에 아닌 극도의 부가 아흔아홉의 사람들을 엄청난 빈곤에 짖눌려 살도록 하며, 그들을 못 살게 한답니다. 우리안에 있는 한 마리 부는 회개하고, 아흔아홉가 평화롭게 살게 하라고 합니다. 이천년 전에는 아흔아홉 마리가 평화를 누리고 한 마리가 불안 속에, 불행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거꾸로 한 마리는 우리안에 있고, 아흔아홉 마리는 우리 밖에서 떨고 서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세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런 비극 속에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한테는 경제적인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답은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시거나 에베소서를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비교하면 몸은 그리스도요, 몸은 하나인데, 몸속에 붙어 있는 지체는 여럿입니다. 인구만큼 여럿이고, 사회 구성체만큼 여럿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성체가 여럿이지만 이 여럿은 차이가 있고, 종류가 다릅니다. 종류가 다르고, 크기도 다릅니다. 양도 다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지체마다 고유한 자기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크기로 판단하지 마시고, 구성체마다 갖고 있는 특별한 사명이 무엇이고, 가치가 무엇이고, 윤리가 무엇이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평가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지체가 각자 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지체가 자기의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 평화로운 몸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우리안에서 경험되는 실제사건입니다. 오늘 사건은 허파의 크기가 크다고 작은 콩팥이 할 일까지 허파가 해버리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콩팥은 콩팥대로 정정 당당한 기회를 부여받고고, 허파는 자기의 본래 기능을 성심것 행사하면 됩니다. 콩팥의 능력까지 점하지 말고 자기 몫 만을 성실히 해야 축복받습니다. 오늘 말로 말하면 ‘공정한 경쟁’입니다.

제가 보기엔 아흔아홉의 빈곤이 하나의 부 때문에 고생을 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하나가 가지고 있는 부를 빼앗아 억지로 나눠 줄 수는 없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각자의 축복을 공명정대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조건을 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이 크다고 다 먹지 말고, 작은 것도 자기 기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양극화로 인해서 우리가 엄청난 빈부의 갈등과 모순 속에 사는데, 각자 자기 것을 찾도록 공명정대한 조건과 기회를 정정당당하게 보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본문 말씁에는 우리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는 그런 곳에서 살아갑니다. 단 길 잃은 한 마리는 우리안에 있지 않는 것 때문에 모든 안전이나, 평화나, 행복이나, 기쁨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양을 찾아다가 우리안에 넣음으로써 공명정대하게 어울려 살게하여라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 잃은 한 마리를 중시하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도덕이 우리 땅에서 잘 지켜 질 수 있습니까? 정말 가능합니까? 어렵겠지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참 좋은 말씀이나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이 세상에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제주도 가실 때나 외국 나가실 때 비행기 타시죠? 장거리 여행을 갈 때는 거으 전부 비행기를 탑니다. 예를 들어서 400명이 비행기를 탔다고 합시다. 비행기 타는 순간 그 모든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사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종·문화·역사 다 초월해서 생과 사를 같이 해야 하는 공동 운명체가 됩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은 어떤 차별도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길을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 위급 환자가 생겼다고 합시다. 비행기 안에서는 치료 할 수 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때 비행기 규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400명이 탄 비행기이지만 한 사람의 치료를 위해서, 한 사람을 죽게 할 수 없어서, 비행기는 먼저 출발지로 회향해야 합니다. 비행기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인간이 정한 하나의 윤리적 규정입니다. 실질적 강제 규정이지요. 땅에서 움직이고 발 딛고 살 때는 이럴 경우가수 없는데, 땅에서 한 발짝 하늘로 떴더니 그 뜬 곳에서는 성경 말씀과 똑같이 한 사람의 환자를 위해서 수백 명의 승객은 어떤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비행기 회사도 손해를 감수하고 회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규정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비행기 하나 만큼이라도 인간이 만든 하늘나라 비슷한 윤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있구나, 그게 가능하구나하고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무엇이냐고요? 그건 비행기 공동체 같은 것입니다. 실족한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도록 놔두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수적으로 많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죽게 놔두는 아흔아홉 마리 만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 닮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아흔아홉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살아갈 뿐입니다. 비행기는 땅에 걸어 다니는 비행기가 아니고, 타이어가 있지만 공중을 날아 답니다. 땅에 발 딛지 않고 한 발짝만 하늘을 향하면 아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공동체가 가능합니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 삽니다. 구분 없이 똑같이 세상에 발 딛고 삽니다. 누가 훌륭한가 하면 세상에서, 속세에서 똑같이 사는 것이 중요 한 게 아닙니다. 누가 선진이냐하면 많이 벌었다고 선진이 아닙니다. 누가 훌륭한가 하면 많이 배웠다고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살아가지만, 똑같은 속세의 윤리보다 한 걸음 더 높은 차원의 윤리를 지향하는 것이 선진이요 훌륭함 입니다. 이것은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발짝정도 세상을 초월했더니 그곳에서 전혀 다른 하늘나라 윤리가 가능해 집니다. 작지만 훌륭한 경험입니다. 세상에서("in" the world) 우리 모두는 살아갑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같이 어울려 살면서도 세속적 가치와 조금 다른,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조금 뛰어 넘을 수("beyond" the world)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착하다고, 윤리적이고, 선진이라고 이름 합니다. 사실 비행기는 땅을 떠난 하늘을 떠다니는 게 아닙니다. 하늘도 땅과 함께 같은 우주 공간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이 서로 떨어진 우주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서로 함께사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60억 인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 공간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업고 와서 하나가 모자라는 이 공간을 완벽한 공간으로 채워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의가 있습니까? 우리의 비행기가 그렇게 합니다. 하늘나라는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집니다. 이런 공간을 오늘 우리 사회에 마련해 주겠답니다. 내가 그렇게 하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이상한 하늘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속의 이야기라 믿습니다.

우리 사회에 실제로 그런 상황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잃은 양이 누구입니까? 잃은 양을 제가 오늘은 두부류의 사람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우리가 잘 돌봐주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다문화 가정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집 우리를 떠났습니다. ‘탈’베트남, ‘탈’파키스탄,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왔습니다. 베트남이고 파키스탄이 않좋아서 빠져나왔을 수 있지만, 아마 이 사람들은 더 크게 보면 한국이 더 좋아서, 보다 큰 축복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나라를 ‘탈’하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우리를 만들어 주어서 함께 살자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열지 못합니다. 일단 이 땅에 왔으면 문 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교회에 이들을 무료로 의료치료해주는 <선한이웃클리닉>을 만들었고 매둘째주일 마다 이들에게 의술을 베플고 있습니다. 또 하나 부류가 있습니다. 탈북 동포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탈’했습니다. 탈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왔습니다. 받아줘야 합니까? 받아 주지 말아야 합니까? 이들의 문제를 놓고 지금 정치권에서 이념적 논쟁으로 번지는 것은 참 바보스러운 짓입니다. 제가 우리 동포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북쪽에서 탈북한 우리 동포들은 인간으로서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는 북의 체제에 저항할 권리입니다. 탈북은 탈북 나름대로 "저항권"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또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한이 있습니다. 탈북은 자신들의 북한사회에서의 "자유권" 행사라고 믿습니다. 모든 국민은 그 나라의 주인입니다. 탈북은 "주권행사"의 발로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마 탈북 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탈’하는 것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쪽을 택했습니다. 탈북 하여 ‘입’남했습니다. 남쪽에 와보니 문이 너무 좁습니다.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비행기 공동체라도 떠준다고 하면 하나님이 회향시켜서 문 열어 주시겠지만. 우리 남한의 지금 문이 너무 좁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00년 종살이 할 때 하나님하고 약속을 합니다. ‘탈’이집트 시켜 줄 테니 이제는 하나님만 믿고 살 결심을 하겠느냐고. 이스라엘이 그렇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탈’애급 했습니다. 이 말을 성경에 보면 "출애급"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이라는 번역이 아주 잘못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것만이 아닙니다.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입’가나안 했습니다. 이 약속을 받고 출애굽 했지만 그냥 출애굽 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집트를 떠나 ‘출’해서,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된 땅으로 ‘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출하고 입하는 것을 합해서 라틴어로 엑소도스(Exodus)라 합니다. "출애굽기"의를 원문으로 "엑소도스"라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라고 번역하면 안 되죠. "출애굽"하고 "입가나안" 까지 합해야죠. 그런데 이 이름이 너무 길어 그렇게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자동차 타고 고속도로 한 번 가보시죠? 어디든지 출구가 있습니다. 외국 나가면 라틴말 원형인 엑시투스(Exitus)가 변형되어 영어로는 "Exit"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느 동네를 갈 것인지는 여러분 자유입니다. 고속도로는 빠져나가는 길만 표시합니다. 이 말이 "출구"라는 말입니다. 그냥 벗어나는 것은 ‘엑시투스’하면 되고 `탈`하면 됩니다. 다시 들어가는 것 까지 합해서 말하려면 ‘엑소도스’ 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나라를 떠난 잃은 양들아 탈했다고 사는 게 아니다. 탈해서 다시 입해야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가난과 질병과 아픔으로부터 `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탈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고난에서도 `탈` 하라고 합니다. 죽음에서도 `탈`하라고 합니다. 죽음에서 탈하면 갈 때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죽음에서 `탈`하면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으로 `입`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의 핵심입니다. 고난을 벗어나라. 벗어나 희망 속으로 들어가라. 출하고 입해라. 그로 그렇습니다. 사실은 다문화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들의 땅을 떠나서 우리들의 땅으로 찾아온 사람들, 이 사람들한테는 한국이 "코리안 드림"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꿈을 심어 줘야 하고, 탈북한 사람들은 `탈북`만한게 아니라 `입남`하고 싶어 하기에 이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탈북자로 부르지 말고 ‘새터민’이라고 불러주길 원합니다. 옳은 말 같습니다. 엑시투스의 사람들이 아니고 엑소도스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세상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잃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하나님은 죄악을 지은 사람이 많지만 죄악 지은 사람들이 우리로 돌아와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하나님은 죄짓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죽이는 걸 원치 않으시고 이들이 살아 있는 것을 원하신다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여러분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왔노라고. 예수님이 오신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늘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육신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이 사람을 잃었을 때 찾으려고 헬리콥터를 동원에서 수색 작전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헬리콥터를 띄워서 이 땅의 죄인들을 찾으려고 하늘 위에서 헬리콥터 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땅에 내려오셔서 산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고, 물을 건너서 잃은 죄인들을 직접 찾아라, 가서 몸으로 찾아라, 그렇게 하십니다. 신중의 위에서 내려다 보며 찾아보는 신은 가끔씩 신화속에 있지만, 직접 땅에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서 산 넘고, 언덕을 넘어 잃은 자들을 찾는 신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신이 와서 오늘 우리들에게 잃은 양을 찾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과 어울려 살지만, 세상에서 한 발짝만 넘어서서 하늘의 진실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엑시투스만 하지 말고 엑소도스 하는 방식으로 살아보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제가 사실은 하나님을 멸시했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협박했던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계속해서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저를 살려 주신 줄 아십니까? 사도바울이 자랑하고 싶지 얺았기에 스스로 그런 말은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훌륭한 한 마리 잃은 양이 되찾아지지 않았더라면, 아니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신약성경에서 로마서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사도서신은 존재하지 않앗을 것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지요. 사도바울이 쓴 성경책, 바울서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하고 요한계시록 만 있었겠지요. 사도바울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문화와 복음이 이렇게 까지 전파되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 양을 살려준 하나님의 목적은 온 세상이 함께 거듭나라고 , 구원 받으라고 한 잃은 양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으십니다. 오늘도 찾아 주십니다. 찾아서 어께에 메고 오셔서 우리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모두가 똑같이 어울려 삽시다. 우리안에 삽시다. 그러나 동시에 아까 말씀대로 비행기 타는 심정으로 이 우리 세상에서 한 발짝만 세상을 넘어서서 살아 봅시다. 비록 따지고 계산하면서 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한 발짝만 넘어서려고 해봅시다. 이익을 추구하고, 힘을 구하며 살지만 조금만 더 숭고한 가치를 찾기 위해서 한 발짝만 넘어 봅시다. 그러면 그곳이 작지만 아름다운 세상이, 작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비행기 안에서만 찾지 않으시고 직접 산속을 헤메시고, 그곳에서 내려와 세상 동네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사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를 찾은 다음에는 어깨에 메고 오셔서 우리한테 새 생명을 주십니다. 부활의 능력도 주십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명상 할 때 늘 찬송가를 옆에 두고 명상을 합니다. 찬송가는 작사자와 작곡자가 크게 감동적인 은혜를 받아서 고백으로 쓰고, 또 고백으로 작곡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설교 마치면 297장 <양 아흔아흡 마리는> 찬송을 부를 것인데, 이 내용을 미리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3절은 잃은 양이 살기 힘든 다는 내용을 가사로 적었습니다. 4절은 목자 되신 예수께서 어떻게 찾으시는지 목자의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산길에 흘린 피 흔적 그 누가 흘렸나,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저 목사 흘렸네, 손발은 어찌 상했나, 가시에 찔리 셨도다, 가시이 찔리 셨도다"라고. 그 다음은 부활의 예수를 그리고 있는 5절입니다. "저 목자 기쁨 넘쳐서 큰소리 외치며, 내 잃은 양을 찾았다 기뻐하여라, 저 천사화답 하는 말, 그 양을 찾으셨도다, 그 양을 찾으셨도다" 라고. 부활의 역사는, 잃은 양을 찾는 역사는 천사도 움직이고 하늘도 끌어 내리고 땅도 올려서 함께 찬양하는 아름다운 축복의 역사요, 그곳이 부활의 동산입니다. 예배는, 선교는, 봉사는, 매일 매일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천사와 사람이 만나고, 상처 받은 손과 치유 받은 손이 만나는 것이고, 그런 삶을 우리가 함께 찾고 삽니다. 찾아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영광, 땅에 평화"를 노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잃은 양 을 찾는 우리의 노래요 행복한 기적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과 행복의 나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인간되어 오십니다. 그 분 맞으시면 잃은 양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