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50:15-21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다.“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아멘.
로마서 12:16-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하였습니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아멘.
누가복음서 6:39-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역사적으로 62년 전 6·25가 발생했던 그 날은 주일날 이었습니다. 주일 날 새벽 남침 소식을 듣고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예배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엄청난 갈등과 회오리 속에서 주일을 맞았을 겁니다. 교회만이 아니었겠죠. 이제 세월이 흘러 6·25 전쟁 62주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길일지 질문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저도 이 문제를 가지고 늘 씨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시나 하고 묵상해 봤습니다. 오늘 구약에 있는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먼저 떠오른 말씀입니다.
역사를 돌아보고 사건을 기록하거나 해석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뿐 아니라 개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뒤 돌아다보면서 반성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며 뭔가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미래를 향해 살아가기 때문에 앞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62년 전부터 어제까지 과거 역사를 뒤돌아보며 6·25를 생각하는 방식이 있고,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의 미래를 내다보며 6·25를 생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돌아보며, 내다보며, 이 두 가지 방법은 양자택일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쌍방향의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최근에 <플래시 포워드(flash forward)>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가 재미있어 틈만 나면 봅니다.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두가지의 회상방식입니다. 하나는 사건이 전개 되다가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 과거의 장면이 현재의 장면과 하나가 됩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것을 현재로 끌어 담기입니다. 플래시(등불)을 들고 밤에 숲속을 거닐 때 앞길을 비추며 가는 방식이 있고, 그 동안 걸어온 산길이 어땠는지, 맹수는 오지 않는지 확인하면서 뒤로 비추며 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돌아보며, 내다보며, 즉 플래시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볼 때 플래시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플래시 백(flash back)’이라고 말하며, ‘돌아보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앞에 있는 미래를 그리는 것을 ‘플래시 포워드(flash forward)’이라고 말하며, ‘내다보며’라고 합니다. 이 TV 시리즈 제목은 플래시포워드입니다. 항상 주인공이 위기에 닥치면 위기를 벗어나 앞으로 있을 미래를 살짝 보여 줌으로 주인공들이 힘을 얻고 새로운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돌아보며, 내다 보며"를 중심으로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 한 번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형제들이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의 모함에 희생되어 이집트로 가는 장사꾼들에게 팔려 갑니다. 형제들은 계략을 꾸밉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아버지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지나가는 숫양을 잡아 죽인 후 피를 내서 요셉의 옷에 피를 묻힙니다. 이 옷을 아버지께 전달합니다. “아버지, 우리 동생이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침통에 빠졌습니다. 시간이 지나 요셉이 팔려간 후 이제 거대 강국 이집트의 총리로 등극하는 이야기입니다. 왕이 꿈을 꿉니다. 살찐 수소 일곱 마리와 말라빠진 수소 일곱이 나일강가를 거닐고 있는데, 말라빠진 수소 일곱 마리가 살찐 수소 잡아먹었습니다. 조금 있다 나일강변의 물을 받아 농사짓는 곳에서 아주 통통하게 자란 이삭 일곱 송이와 말라 삐틀어진 이삭 일곱 송이가 나타났는데, 말라 삐틀어진 이삭 일곱 송이가 아주 통통한 이삭 일곱 송이를 다 삼켜 버리는 꿈을 꿉니다.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합니다. 7년 풍년에, 7년 흉년이 옵니다라는 뜻이라고. 흉년은 풍년을 삼키고, 잡아먹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악이 선을 잡아먹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7년 동안 풍요로울 때 곡식을 모으고, 그 다음에 올 7년의 흉년을 대비하는 정책을 폅니다.
이집트에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주변국가에도 똑같이 흉년이 들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가나안이라 이름 하는 곳에서 살던 이스라엘 온 민족이 먹기 위해, 마시기 위해 이집트로 이주해 옵니다. 요즘말로 경제적인 민족 대이동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먹고, 벌기 위해 우리나라에 밀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의 열한 아들과 거느린 가족들도 이집트로 몰려옵니다. 이때 야곱은 이미 죽었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이 자기가 팔린 것 때문에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열한 형제들이 요셉에게 간청을 하는 장면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보복할까 두려워 보복하지 말라고 했다고 아버지의 유언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형님들이 저를 팔았지만 하나님이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서 저를 총리가 되게 하셨고, 형님들과 우리 민족을 받아 드려서 먹고 살게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형님들은 저한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운명을 바꾸어서 오늘과 같은 축복을 주게 하셨습니다. 내가 왜 보복하겠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는 오늘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고 동시에 선으로 악을 눌러 이기라는 오늘의 로마서 본문 말씀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오늘 구약 본문의 요셉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창세기> 마지막 50장에 나오고, 그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의 모범인 <출애굽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시작 부분을 한 번 읽어 보시면 이렇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이집트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요즘에 와서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적다고 난리인데, 당시 이집트 땅에 온 이방민족인 가나안 족속의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는지 바로 왕이 걱정이 났습니다. “우리 이집트인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가 많아지는구다. 또 힘도 세고, 일도 잘하고, 경제권도 가지고 있다니 큰일 났구나. 그러니 아들 낳거든 전부 죽이고 딸만 기르라고 산파에게 명령하라" 합니다. 그런데 산파들의 고백이 출애굽기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를 낳을 때가 되어 도와주러 가면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 도움을 받아야 아기를 겨우 출산하는데, 히브리 여자들은 우리가 가기 전에 아기를 이미 낳아버립니다. 그만큼 강하고 건강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라고. 중요한 것은 요셉이야기의 핵심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운명을 완전히 바꾸셔서 선의 극치를 이루셔서 모든 백성을 구원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있읍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악순환"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서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는 "선순환"이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입니다. 이런 역사가 있어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강단에서 선포하고 감동을 받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어느 한 이스라엘 이방민이 이집트에서 선순환의 역사를 실천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담긴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최근의 세계의 위기상황 아시죠? 유럽에 경제위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TV나 신문을 읽을 때마다 경제 강국인 독일에서 한 낯선 남자가 인터뷰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베트남 보트피플 난민 2세인 한 사람이 경제 강국 독일의 경제장관인 필립 뢰스러입니다. 저는 그가 유럽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가는 역할을 하는 장면을 봅니다. “아, 이게 21세기 요셉 같은 상황이구나!” 콧대 높은 프랑스의 새 정부에 우리나라 입양인 출신인 플뢰르 펠르랭 여사가 중소기업·혁신·디지털담당 경제장관이 되었습니다. 혈육의 고국인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21세기의 요셉입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도 외국인 노동자를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들이 고생을 많이 합니다. 겨우 이제 탈북자 대표 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다문화 가정 출신 한 사람이 국회의원 뱃지 단 것을 우리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에나 이주민, 난민, 탈국가자,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그러너 모두 하나님이 도우시고 뜻이 있으면 그 나라에 가서 총리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 요셉의 이야기가 기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그런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흔한 우리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악을 선으로 둔갑시켜 역사의 괘적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땅에 전쟁의 비극만이 있으란 법이 없습니다. 전쟁을 이기는 평화의 힘이, 평화의 미래가 펼쳐 질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역사에서 배우세요.
그런가하면 요셉과 정반대로 악을 악으로 갚다가 악순환의 고리에서 망하고, 죽고,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있었던 유럽의 이야기를 잠깐 드리겠습니다. 세계 제 1차 대전은, 여기서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결국에는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한쪽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가 다른 한쪽이 되어 싸우다가 결국 독일 쪽의 동맹국이 졌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은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의무로 엄청난 피해를 받습니다. 그 외의 다른 이야기는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승전국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독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1320억 마르크였다고 합니다. 지금 돈이 아니고 당신의 화폐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전쟁 비를 충당했습니다. 패전국 독일에게 배상금을 물려 미국에 진 빚을 갚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도 돈이 없으니까 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전비를 갚으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양쪽에 돈을 빌려주고 이득을 보는 상황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929년에 미국도 경제공항이 나서 전 세계가 어려워지자 유럽은 더욱 난리에 빠졌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8 독일에서 빵을 1kg 사는데 이 빵이 당시 화폐로 0.53 마르크 엿습니다 그후 전하고 4년이 지난 1923년에는 빵 가격이 3990억 마르크가 되었습니다. 그냥 3천배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1마르크를 따지면 거의 8천억마르크가 되는데요, 곧 8천억 배로 증가했습니다. 경제하시는 분들 이런 것을 인플레이션이라고 그러나요? 8천 억 배...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1달러가 1마르크라고 치고 4년이 지난 1923년애는 환율도 올라 1 달라가 1조 마르크가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당시 독일 사람들은 허덕임에 지쳐 있었고, 한 매체의 기사 제목을 보면 "독일의 상류층·중산층·하류층 모두가 다 무너졌다. 우리에게 삶은 없다. 다 뺏겼다. 보복하자". 당시 이런 상황에서 유태인이 제일보기 싫었다고 합니다. 유태인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식민지화되고 망한 이후 한 번도 나라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약 2500년 동안 나라가 없었습니다. 유태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채업입니다. 여러분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샤일로크라는 사람 아시죠? 유태인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사채업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고리대금으로 돈을 벌고 허세부리며 살았습니다. 그 외에 유태민족에 대한 반발도 있었습니다만 다른 건 빼고 "이 사람들은 벌레다. 먼저 죽여야 한다"며 난리를 칩니다. 유태인 이야기는 그냥 사상적 갈등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빵 한 끼가 수천억 마르크에 달하니까 못살겠는데, 유태인들은 부자로 살아간다는 분노와 보복심리에서 나왔습니다. 독일 교회가 남긴 기록에 보면 “그때 독일은 다 미쳤었다. 누군가를 보면 죽여야 하고 보복해야 하고 모든 것에 반대해야 하고... 이탈리아에만 파쇼가 생긴 게 아니다. 독일에도 나치와 같은 극단적이 파쇼가 생겼다”고 되어 잇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겨요? 악은 더 큰 악으로 보복해야 한다", 이것이 나치의 주장입니다. 결과는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킵니다. 몇 명 죽었나요?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죽었고, 악의 악순환 사슬에서 독일도 망하고 유태인도 망하고 모두가 망했습니다. 오늘 제가 몇 가지 예만 들었습니다. 독일이 출판한 책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하면 악을 더 큰 악으로 갚다가 다 망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살아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많이 읽어 봅니다. 이젠 회개하고 전혀 다른 나라가 되긴 됐습니다.
62년 전 우리는 전쟁을 맞았습니다. 한반도는 참 이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한은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와 비극의 와중에서 60년이 지났는데 이제 저희는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그런 민족이 됐습니다. 경제도 그렇고, 또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있습니다만 이만큼 설수 있는 건 정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남쪽은 너무나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에게 독재도 있었고, 유신도 있었고, 수많은 착취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정치적 독재와 억압 속에서 우리는 그냥 숨어 지낸 게 아니라 싸우고 극복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극악한 전쟁의 빈곤 속에서 털고 일어나서 오늘과 같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세계에서 내로라하게 살아갑니다. 교회도 어려웠지만 지금 이렇게 예배드립니다. 남쪽은 너무 변했습니다. 너무 많이 변하고 어느 하나를 오래 지속시키기 못하게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계의 유례없는 남한의 특징입니다,
북쪽도 특징이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는 21년, 20년하고 끝장났습니다. 자본주의를 넘어 서고자 했던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70년하고 붕괴되었습니다. 북한의 체제는 67년인데 아직도 종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북쪽도 세계 유례없는 변화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빠르게 변합니다. 둘이 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여쭈워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통일이 되어 이 세계에서 떳떳하게, 아름답게, 진지하게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을 생각하고 평화를 생각하면서 “플래시포워드” 하면서 그려갑니다, 그런가 하면 통일이 아직은 않돼도, 안한지만, 우리는 북과 상관없이 세계의 경쟁 속에서 남한의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 이 되면 더 좋고, 안되어도 가야 합니다, 우리한테 이중의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백성아 지금까지 살려 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라. 여기에 멈추지 말고 플래시백 하기보다 플래시 포워드해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북쪽 끌어안고 우리가 가야 할길 은 우리가 개척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장해 주마.”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속에 티만 보고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 속에 있는 들보가 훨씬 더 무겁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사랑하는 경동교회 여러분, 당신들 눈에 티가 아니라 들보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 기분 나쁘시지요. 저는 반갑게 받습니다. 그렇게 받고 싶습니다. 왜요? 들보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티만 있어 미래를 보지 못하는데, 티가 계속 쌓이면 들보가 되어서 미래를 더 못 보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과거로만 향하게 만드는 것이 들보입니다. 들보를 빼라는 말은 어려운 과거를 알겠다. 아픔도 안다. 다 극복하자. 그러나 중요한 목적은 과거에 머물지 말고, 고난 속에 머물지 말고, 밝아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눈을 떠야 한다, 그런 뜻입니다. 미래를 못 보게 하는 들보를 빼랍니다. 오늘 저희들한테 지금까지 살려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아 들보를 빼라. 미래를 봐라. 아무리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열려있다고. 어떻게 택하시렵니까? 우리 아름다운 미래, 힘들지만 쟁취할 수 있는 미래를 우리는 축복으로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해 주시겠다고 그럽니다, 정치도, 경제도 우리 모든 의식도, 신앙까지도. 우리 정말 미래를 택합시다.
요셉의 이야기에 보면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을 완전히 바꾸셔서 새로운 미래의 디딤돌로 삼아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형님들이 자기를 팔았으니까 인생의 걸림돌 이지요. 하나님은 이 걸림돌을 미래를 향한 자기민족의 디딤돌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 역사는 악을 악으로 갚는 악순환에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악을 이기되, 선으로 이기고, 강하고 힘 있는 선이 우리의 미래를 밝게 열어 줍니다. 아까 성가대가 <평화의 노래>를 찬양했습니다만, 한 가지 약속하고 고백합시다. "전쟁의 죽임보다 평화가 강합니다. 평화가 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평화가 훨씬 힘이 있고, 높고, 넓고 깊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입증해야 합니다, 평화가 이기는데, 힘 있는 평화가 이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선으로 반드시 이기십시오. 십자가의 고통과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이겼듯이 부활의 힘으로 이기십시오”라고 말씁하십니다. 여러분 이깁시다. 지고 살지 맙시다. 이깁시다. 평화가 강합니다. 힘 있는 평화로 죽이는 전쟁을, 폭력을 이깁시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요셉에게서 성취되었던 약속 이 수 천 년이 흐른 후에도 오늘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이기는 평화를 여러분이 축복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