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신명기 7:1-8,11-12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2:1-5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마태복음 28장의 설교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분부의 말씀 이며,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봉독통해서 들으셨지요? 그 부분을 풀어보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십니다. “나는 떠나고 없을 것인데, 내가 몇 가지 부탁을 하겠다.” 첫째 부탁,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교회와 우리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선교하고 전도하라는 분부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삼으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믿는 사람을 다 불러 모아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세례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고난도 함께 받고, 부활도 함께하고...함께 하시는 주님과 약속하는 예식이 세례식입니다. 세례를 베풀라. 그러나 세례만 가지고는 구원 받지 못하니까, 세례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 하고, 외워서 연구하노록 교육해야 한다.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알아야 예수 믿지요. 많이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알기만 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제 사는 동안에 배워서 아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지켜야 합니다.
제자 삼는 선교와 세례 베푸는 세례식과 모든 것을 가르쳐서 알게 하는 공부와 실천케 하라는 삶의 지혜, 윤리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탁입니다. 그리하면 구원 받는 답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위에 한 가지 전제를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축복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전제는 이렇게 말하는 나는 하늘과 땅을 함께 매는 주인이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매는 주인으로서 말하는데, “땅에 있는 동안 하늘 말씀을 빌어서 제자로 삼고, 하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하늘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배우고, 하늘의 뜻을 땅에서 지켜라. 하늘과 땅은 합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요즘에 비가 오지 않아서 우리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더위로 인해 엉겅퀴 넝쿨이 많이 죽었는데, 아마 어제 비가 와서 많이 살아났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땅과 흙은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흙이 분리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육지는 바다와 함께 있어야 한다. 바다가 없는 육지, 육지가 없는 바다는 상상할 수 없다고요. 좀 넓혀 말해보죠. 이 땅은 하늘과 같이 있고, 하늘은 땅과 같이 있습니다. 둘이 분리되면 하늘도 외롭고, 땅도 무의미합니다. 우리 다 알지요? 사람은 어떻습니까? 제가 육체만 있고, 혼이 없으면 여러분은 저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육체만 있고 영혼이 없다면 저는 그저 동물일겁니다. 반대로 영혼만 있고 육체가 없으면 귀신으로 살던가, 떠돌아다닐 것입니다.
사람은, 세계는, 역사는, 삶은, 이 모든 것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립되는 두 개가 화합하고, 두 개가 항상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함께 있다. 둘은 분리 되는 게 아니라 합쳐야 한다. 나는 둘을 합하러 온 사람이다. 하늘과 땅은 합해져야 한다.” 우리는 합함이 없을 때의 상태를 `비극’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살인 사건이 많은지 아십니까? 살인자의 몸속에 있는 육과 혼이, 선과 악이 분리되어서 그렇습니다. 분리되면 사건을 저지릅니다. 둘이 조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한 몸, 한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하늘 따로 땅 따로 있게되고, 그런 분리상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은 하늘 아버지와 땅의 사람이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하늘 그자체로 기쁘고, 그 말은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땅은 땅 그 자체로 복 받고, 곧 우리는 ‘은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광과 은혜는 하늘 이야기와 땅 이야기를 표현하는 삶의 현실의 다른 언어입니다. 위를 보면 ‘영광’이고, 아래를 보면 ‘은총’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살아갑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하늘과 땅을 메는 권세를 가지고 있고, 이 권세로 명하노니 “세례를 베풀라. 모든 사람을 선교하고 전도해라. 내 말을 가르쳐서 알게 하고, 일상 속에서 지키게 하라. 그러면 하늘과 땅이 만나게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가르친다고 해서 하늘과 땅이 합쳐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특출나다고 하더라도 두 개를 합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합해지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동고동락·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십니다. 함께 계십니다. 함께 일하십니다. 그 말을 오늘 히브리어로 임마누엘(Immanuel) 이라고 말합니다. 많이 들어 보신 단어죠? 임마누엘. 그래서 오늘 말씀이 “나는 세상 끝날 까지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사는 동안,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이 땅과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민’이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늘 신명기 7장의 말씀을 보면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 하나님은 너희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선택 했는데,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은 너희 백성이 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수가 적어서도 아니고, 특별히 잘나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고 그냥 내가 너희 조상 때부터 한 ‘약속’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를 택했다. 나 하나님은 너희 조상과 한 약속을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 어디서나 임마누엘 하기로 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 너희들이 조상과 한 약속을 지키기 못해도, 파기해도 나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겠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희백성을 내가 지켜주마"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하고 항상 어디서나 함께 계십니다. 이 말을 ‘임마누엘’ 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임마누엘이라는 이 히브리어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함께’라는 말을 ‘임마’라고 합니다. ‘누’는 ‘우리와’이고, ‘엘’은 하나님이 말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거꾸로 되어 있지요. 여러분이 이렇게 고백하시면 됩니다. ‘임마’ 항상 같이 입니다. ‘누’ 우리와, `엘’ 하나님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데 가운데 ‘누’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임마누’. 저는 우리와 같이 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싶지지 않습니다. 아마 남들의 하나님인 모양이지요. 내 하나님, 우리 하나님 그 하나님이 확실히 내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면, 저는 그 하나님께 예배 하고 감사드립니다. 나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저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하늘이 없는 땅이라면 저는 그 땅 없이도 저 혼자의 땅에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땅에 있는 하늘이고 하늘에 있는 땅이지, 그외의 다른 땅이나 하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밟는 땅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받은 한 몸 가지고 충분합니다. 다른 몸의 땅이나 하늘 까지 제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와 우리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영·혼·정신, 이것이 하늘이라면 저와 우리한테 그런 하늘과 땅이 필요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남의 나라 말이라서 혹시 감이 오지 않으시면 제가 한국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어느 시 한편을 읽었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시입니다. 김영랑 시인은 시인 중에서도 언어표현을 잘하는 시인이라고 합니다. 이 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라는 시입니다. 많이 들어 본 시겠죠? 저도 학교 다닐 때 배웠습니다. 제가 처음하고 마지막 부분만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중략)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억이 새로우신가요? 옛글로 되어 있습니다. 모란 잎이 떨어지면 모란이 서글퍼 합니다. 모란이 한 번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 모란이 필 때 까지는 일 년이 지나야 합니다. 시인도 슬프고, 모란도 슬픕니다. 그 표현이 시에서는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합니다. `하냥`이 무슨 뜻입니까? 두 가지가 해석이 있더군요. 한글 사전들을 보니 어느 두 사전은 하냥의 뜻을 김영랑의 바로 이 시구를 인용하여 ‘항상’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항상, 줄 곳, 한결같이" 등입니다. 또 다른 두개의 한글 사전은 하냥이 항상 이라는 뜻이 아니고 남도(호남과 충청도)에서 쓰는 사투리로서 `함께’라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문가가가 아닙니다만 `하냥`이라는 뜻은 항상도 되고, 함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김영랑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나는 양쪽 다를 의미했다.”고 했을 것 같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 어디서나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말을 ‘임마누엘’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임마’라는 말이 항상, 또는 함께 그랬지요. 이 말 대신에 우리말로 ‘하냥’입니다. ‘누’라고 하지 말고 우리, ‘엘’은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 "하냥 우리 하나님" 입니다. 이게 임마누엘이라는 뜻입니다. 멋있지요. 앞으로 그렇게 말합시다. “하냥 우리 하나님.”
사람은 살아가면서 주님 말씀대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배우고 지켜 갑니다. 예를 들면 성경 말씀에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본래 살해당하고 싶지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이웃을 그냥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요. 네가 널 사랑하듯이 이웃도 사랑하라구 그랬죠. 사랑을 받고 싶으면 사랑해라. 네가 성폭행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남도 성폭행하지 말라. 그 말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담긴 속뜻입니다. 남을 죽이고 싶지 않은 만큼 내가 죽임 당하는 것도 보호받아야 한다. 죽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남도 죽이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윤리적 명령은 하나님 명령만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아는 윤리적 명령입니다. 철학자가 말했고,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그대로 지금도 항상 공통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임페라티브(imperative, 명령)라고도 말합니다. 사람은 명령으로 살아갑니다. 임페라티브는 개인 명령 이고, 또한 집단 명령 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살인하지 않는 사람은 복받는다가 아니라 ‘살인은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인늬 생각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입니다. 그래서 살인자는 물론이고 살의(殺意)를 품은자도 하나님께는 죄인입니다. 살의,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살의까지 버리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고, 윤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인하는 객관적 행실과 살인하려는 주관적 마음과 의지까지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화평이 오느니라. 평화가 오느니라고 하십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윤리적 명령으로 사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또 하나있습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않고, 살의만 없으면 이 땅이 저절로 행복해 집니까? 내가 살인자가 아니고 살의도 없는데, 당연히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누군가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하라/하지 말라" 고 명령하시고 나서, 명령의 처음과 마지막, 명령 전체 속에 뭐가 있느냐하면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사람을 만드시고, 축복을 주셨다.”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명령 때문에 오는 반대급부가 아닙니다. 살인안하면 받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살인 하든, 안하든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복 받으라는 축복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결과물도 아닙니다. 전제 물도 아닙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축복은 "복이 있나니"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이 말을 우리는 인디카티브(indicative, 본래의 것)라 합니다. 인간인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은 살인하지 말라. 마음까지도 살의를 품지 말라. 그러면 복 받느니라, 그런게 아닙니다. 복은 본래부터 있었는데 진짜 살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 했으니 깨닫게 된 은총입니다. 좋은 일 하면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복 받는 게 신앙입니다. 이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실제로 복은 내가 원해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빌어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일 했으니 주십시오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복은 축복이 아니라 기복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기복은 없습니다. 복은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건에 따라서 주고 말고가 아닙니다. 제발 기복 신앙 갖지 마십시오.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축복을 만들어 주셨고, 축복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하십시오. 그러면 축복이 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가운데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윤리적 명령에 하나님 자신의 힘있는 은총을 부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늘 베드로 전서 2장의 말씀처럼 어린아이가 "순수하게 어머님의 젖을 먹고 자라서 엄청난 인간이 되듯이" 사랑하는 여러분 순진하게 어머니 젖처럼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먹고" 이 땅에 있는 여러분의 가정, 역사, 문화 무엇이 되든지 그 속에 아름다운 집을 지을 때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먹고, 성령의 은사를 먹고 마셔서 훌륭한 살아있는 주춧돌"이 되십시오. 인간의 조건으로 신을 만들거나 가져오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면 하나님은 본래부터 그렇게 축복을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욕심으로 유혹하지 마십시오. 축복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비는 기도로 족합니다.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다 알고 계십니다. 본래 있습니다. 내 조건에 하나님 맞추지 마시고, 하나님 조건에, 은총에 우리를 맞추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이렇게 귀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함께 결심하면 됩니다. “하냥 우리 하나님”이 본래부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본래 축복의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제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윤리적 명령, 도덕적 명령을 스스로 알아서 지킵시다. 어려우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다. 복달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출세의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달라고, 하늘의 뜻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는 것은 하늘과 땅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축복 아름답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속된 축복 간구하지 마십시오. 신령한 축복,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받아서 살아가야 할 은총이고 도리입니다. 오늘 베풀어지는 성만찬 속에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은총의 선물 풍성히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