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남교회] 거룩한 산 제물

2012년 7월 22일 주일예배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로마서 12장 1~2절

설교문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을 이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 워싱턴의 군대는 포지 계곡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병참 보급도 다 끊어졌을 뿐 아니라 추위 또한 혹독해서 싸움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 정부에서 연락관이 왔습니다.

연락관은 워싱턴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장군은 참 훌륭합니다. 위대합니다. 애국자입니다. 아니 이 나라의 은인입니다.”그 연락관의 칭찬이 끝나자 워싱턴은 “그런 말을 한다고 기뻐할 것 같소? 도대체 당신은 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소?”라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모든 좋은 말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경배와 찬양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마음을 가지기가 일쑤입니다.

우리는 힘차게 찬송가 323장을 부르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323장 2절)

분명 우리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말의 성찬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하는 우리에게 “도대체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절)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몸’으로 즉 ‘생활’로 구체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이란 예수 믿기 이전의 죄악된 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깨끗하게 된 몸, 거듭난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거듭난 몸으로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산 제물’은 구약 시대의 ‘죽은’ 제물과는 구별 됩니다. 죄로 죽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듭난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산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술로서 신앙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를 알고, 그 뜻을 쫒아 살아가는 ‘적극적인’ 삶의 차원을 포함합니다(약2:17). 이사야 벌린이라는 철학자는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자유‘(negative freedom)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자유’(positive freedom)'입니다.

소극적인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서 자신이 주관적으로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고, 적극적인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로서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능동적인 자유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또 독재 정권 치하의 국민은 그 독재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러한 구속과 독재로부터의 자유 같은 자유가 소극적인 자유입니다.

운동 선수는 자신의 의지를 다져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려고 합니다. 물리학자는 연구에 전념하여 세계적인 학문 성과를 내 노벨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온전한 자아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유가 바로 적극적인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을 잘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소극적인 자유는 자신의 자아 내부에서 떠오르는 욕망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키지만, 적극적인 자유는 그러한 욕망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장기를 고찰하면 자유의 개념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아기가 제일 처음 태어날 때 '자유'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소극적인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는 남 따위는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이 이루고 싶은 욕망에만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아기는 스스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고, 그래야만 스스로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는 끊임없이 소극적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격이 유약한 아기는 곧 포기하고 부모님 말씀을 따르지만, 고집센 아기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려 자기 목적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이런 이기적인 소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점이 옵니다. 왜냐하면, 소극적인 자유를 추구하였을 때 좋아지는 경우가 있지만, 반대로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고 싶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싶어 술을 마시다 보면 결국 자신의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개인적 행동에 의해 타인에게 피해를 가하는 경우 또한 발생합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쯤은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관계에 의해서 확립되기 때문에 타인의 피해를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때가 오게 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좀 더 적절하게 관리하길 원하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좀 더 적절히 통제하길 원하게 되는 때가 도래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가 보통 ‘철이 들었다’고 불리는 때입니다. 이때 만약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자유자재로 통제하여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맞추어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때만이 자아가 실현되고, 우리는 적극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극적인 신앙은 소극적인 자유만을 추구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습니다. 무턱대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뜻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배고프니 하나님을 통해 내가 배불러야 되며, 내가 목마르니 하나님을 통해 내가 물을 마시기만 하면 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산 제물’은 이런 소극적인 신앙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적극적인 자유,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줄 아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소극적인 신앙을 적극적인 신앙으로 승화시켰기에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원이 있었으니, 바로 아들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 주셨으니,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자신의 소극적인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만을 채우는 소극적인 신앙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적극적인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에 대한 아무런 조금의 저항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릴 채비를 하고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번제단을 쌓고 이삭을 제물로 올리고 칼을 들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실체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 즉 그의 자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하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실체이며 또 당신이 앞으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조차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모두 헛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삭도 잃고 또 나머지 약속, 즉 자신을 통하여 자신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 준다는 약속도 또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도 모두 이룰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부당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므로 이삭을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칼을 거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려고 전혀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든 그 때가 바로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철이 든 때’입니다. 또 이삭이라는 자신의 소극적인 신앙에만 매여 있는 자신을 철저히 거부한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는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철이 든 것입니다. 소극적인 신앙에서 적극적인 신앙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사신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신앙의 ‘철’이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를 못 박고 하나님이 사시도록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신앙에서 돌이켜 적극적인 신앙으로 자신을 무장한 신앙의 철이 든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그럼 산 제물이 되어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절). ‘이 세대’란 하나님 없는 인간 본위의 악한 품성과 타락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이런 타락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유혹합니다. 덫을 놓습니다. 아니, 오히려 신앙인들이 그런 유혹과 덫에 빠져 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취해 그만 천국을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세상의 죄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절). 우리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심령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그런 변화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닮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2절). 신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따라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아시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하는 소극적인 신앙을 가질 때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만을 생각하여 나를 죽이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극적인 신앙의 삶을 떠나 적극적인 신앙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신앙의 철이 든 것입니다. 아직도 나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어린 신앙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신앙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참 신앙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이 참 신앙에 기초하여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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