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12장 3~8절
설교문
한 소년이 산에서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알을 암탉 둥지에 넣었습니다. 암탉은 독수리 알을 품어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발톱과 강력한 날개를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들쥐 떼가 닭장을 습격했습니다. 닭들은 몸집이 큰 독수리가 들쥐들을 쫓아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몸을 벌벌 떨며 도망만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독수리는 닭들로부터 모이만 축내는 겁쟁이라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한 마리 독수리가 멋지게 날고 있었는데, 겁쟁이 독수리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아, 정말 멋진 새로구나. 나도 저런 당당한 독수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후 그 독수리 새끼는 자신의 모습과 하늘을 훨훨 나는 독수리의 모습이 닮은 것을 발견하고 놀랬습니다.
“아, 나는 왜 병아리와 다를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병아리가 아니라 독수리였구나.” 독수리 새끼는 자신이 비로소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닭장을 벗어나 푸른 창공으로 자기의 두 날개를 세게 저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본 독수리처럼 자신도 창공을 향하여 훨훨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우리들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옛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는 삶은 성경에 따르면 ‘옛사람’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의 우리들을 성경에서는 ‘새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우리는 이제 옛사람처럼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니 그 신분에 맞게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자화상이 달라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달라졌음을 알고 그에 따라 살고자 하면 우리의 삶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가끔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 오로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낮은 자리에 있더라도 우리의 신분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뿌듯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궁궐에서 사는 왕자나 공주와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러 가지 실패와 좌절에 빠지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무서운 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빚에 쪼들려 앞이 캄캄함을 경험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현실 생활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중에서도 주의 몸 된 교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땅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몇몇 교회가 복음에서 일탈하여 교회를 백안시 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교회가 타락할 때마다 개혁자들을 보내 교회를 새롭게 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웠습니다.
그러한 개혁자들로 인해 한국교회도 새로워 질 것이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교회가 많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지난 번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제14차 연례수련회에서 만난 여러 목사님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의 일탈 현상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를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란 인간의 사고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를 아는 것’ 정도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자신의 분수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갓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사장의 지위와 생활을 부러워해서 낙심하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신입사원은 신입사원으로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을 하여 그 회사의 인사고과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진급해야 할 것입니다. 또 진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직급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자기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성도들보다 집사가 높고, 집사보다 안수집사가 높고, 안수집사보다 장로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든 그의 기능에 따라서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장로는 겸손하게 장로의 직분에 맞게 교회를 섬겨나가야 되고, 집사는 집사대로 교회를 섬겨 나가야 합니다. 만일 교회의 직분을 높고 낮은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사탄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계급화된 교회는 낮은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 사술을 써야 되기 때문에 강도의 굴혈이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진실로 중요합니다. 성도는 성도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고, 집사는 집사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집사가 장로처럼 장로의 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장로라고 해서 교회에서 그 무슨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닙니다. 교인은 각자 가진 달란트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물론 목사도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목사 또한 설교와 심방 등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모두 다 자신의 분수대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은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분량’이란 믿음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맞게 그 분량만큼 그 특성대로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성도들에게 각양각색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타인이 가진 은사를 시기한다든지 무시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어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을 다 불러 결산하게 되었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은 장사를 잘 해서 갑절로 남겨서 가져 왔으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면서 책망을 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마음이 참 상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어찌하여 나를 무시하고 이렇게 제일 적은 돈을 맡겼을까”라고 불만을 품고,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장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종을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넘어지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 또는 자신의 지위를 최고로 여기고 타인을 멸시함으로써 분란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오로지 인간을 사랑하여 하늘의 권세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흉악한 죄인이 받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참혹하게 죽으실 정도로 인간은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마저 이렇게 죄악된 인간을 사랑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어찌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몸에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의 지체는 각각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몸을 유익하게 합니다. 즉, 눈은 보는 기능으로 몸이 나아갈 바를 알리고, 입은 먹어서 몸의 건강을 유지하고 말하여 서로 간에 소통하게 합니다. 또 발은 걸어서 몸을 이동시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실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 지체들로 구성된 유기체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유기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독특한 은사를 부여 받고 몸 된 교회에 이바지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각자에게 부여된 천부적인 재능, 즉 달란트입니다. 이 은사를 신약에서는 ‘카리스마’라고 하는데,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평생 설교를 하는데도 그의 설교는 청중을 감동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설교의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은 강단에 올라가면 청중을 손아귀에 넣고 감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목사는 설교의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를 쓰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를 쓰기가 어려운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영감이 넘치는 시를 쓰곤 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카리스마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가르치는 은사, 돕는 은사, 일하는 은사, 남을 배려하는 은사 등 각양각색의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은사는 꼭 사용해야 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한 달란트를 받고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종처럼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사용해서 주님의 일을 할 때 교회는 든든히 서 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분야에서 충성되게 섬겨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렇게 헌금 많이 못하는 것을 괴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기도로, 전도로, 가르치는 것으로, 카페 봉사하는 것으로, 방송실 봉사로, 주차봉사로 교회를 섬기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주 안에서 날마다 아름답게 서 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온 성도가 지체가 되어 머리되신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은사대로 교회를 섬겨 하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