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12장 9~13절)
설교문
어떤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악지대를 지나가는 중이었습니다. 마부는 오랫동안 그 주인을 위하여 봉사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런 산악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이 많은 마부였습니다. 마부는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를 몰며 깊은 산악지대를 지나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두 필도 같이 뛰었습니다.
마부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저 멀리에서 짐승들 여러 마리가 마차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마부는 그 짐승들이 가끔 출현하는 이리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부는 급한 마음에 채찍으로 말을 세차게 때리면서 동네가 멀지않으니 더욱 빨리 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리떼는 어찌나 빠른지 곧 잡히게 될 것 같았습니다. 또 그 이리떼는 그냥 몇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나 되었습니다. 만일 이리에게 잡히면 사람과 말이 동시에 희생될 것 같았습니다. 그 마부는 생각다 못해 말 네 필 가운데 두 필을 말고삐를 찢어서 채찍으로 때려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리떼가 그 두필을 쫒아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그 마부는 두 필의 말로만 마차를 몰면서 “이제는 생명을 구했구나” 생각하며 더욱 말을 빨리 몰아 동네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리떼들이 그 두 필의 말을 다 해치워버리고 더욱 힘을 얻어 더 빨리 마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부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말을 몰고 빨리 동네로 들어가셔야 되겠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부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마차를 보내고 이리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천신만고 끝에 동네에 들어가서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인근의 군부대에서 많은 군인들이 총을 들고 그 마부를 구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 불행하게도 마부는 총탄이 다 떨어져서 이미 이리떼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그 마부는 그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마부를 위하여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영원히 그 마부의 충성을 기렸다고 합니다. 마부가 자기 주인과 주인의 가축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은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희생입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은 이것보다 더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부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지만 그리스도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신 것은 고통을 초월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멍에가 씌워진 소나 말은 결코 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멍에가 편하고 당신의 짐이 가볍다고 하셨습니다(마11:30). 어떻게 십자가가 편하고 가벼울 수 있을까요?
‘엘 그레코’라는 스페인 화가가 그린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절망과 고통이 아닌 희망과 광휘가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항상 고통스럽고 힘든 것으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그 그림은 사랑으로 안고 가는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과 시련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온갖 수고와 희생을 사랑으로 기꺼이 지고 가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주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 “주님, 제 손이 필요하십니까?”를 보면 그 방법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손이 필요하십니까?
오늘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하여
제 손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주님, 제 발이 필요하십니까?
오늘 기쁨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가기 위하여
제 발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주님, 제 목소리가 필요하십니까?
오늘 사랑이신 당신 말씀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말하기 위하여
제 목소리를 당신께 바치나이다.
주님, 제 마음이 필요하십니까?
오늘 모든 이를 예외 없이 사랑하기 위하여
제 마음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우리의 손을 사회적인 약자를 돕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발을 슬픔에 빠져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기 위해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온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또 찬송가 323장을 보면 더욱 비장한 목소리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먼저,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며,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 같은 거리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며, 존귀와 영광은 오로지 주님께 돌리고 멸시 천대는 우리가 지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모범을 보인 이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신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0절). '사랑‘은 헬라어의 ’아가페‘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요일4:10).
실로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만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즉, ‘외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행위가 바로 외식하는 행위입니다. 즉, 입술로는 사랑한다 말하고 실지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행위가 바로 외식적인 행위입니다. 형식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바로 외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식적으로만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실질적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색’내서 사람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아가페의 사랑에는 존경의 마음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들의 관심을 존중해주며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감사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를 믿고 이해하고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라’는 말씀은 값비싼 귀중품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고귀한 보석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이러한 형제자매에의 존경을 서로 먼저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후에 타인을 존경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타인을 존경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타인을 존경할 때 교회에는 불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SBS 메인 뉴스에서 교회가 분쟁으로 인해 갈라지는 모습을 보도했는데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부끄러워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분쟁하는 것은 서로를 존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났기에, 우리가 잘 났기에 우리가 먼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아가페의 사랑으로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11절). 본문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를 섬기되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성령으로 열렬히 타오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씀하는 열심은 인간적인 노력의 열심이 아니라 성령충만하여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열심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 내기 위한 열심은 교회의 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성령충만한 열심은 교회를 더욱 화목하게 합니다. 이런 성령충만한 열심 속에 일치와 화합이 있습니다.
넷째, 아가페의 사랑을 본 받아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12절). 이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기에 의인은 필연적으로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실망과 좌절하게 되어 그만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과 좌절하지 말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땅 위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찌 땅의 것 때문에 실망했다고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 바다까지 왔을 때 애굽군이 그들을 다시 노예로 잡아가려고 쫒아 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죽일 듯이 대들었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는 이집트 군인들이고, 옆에는 백성들이 죽일 듯이 덤벼 들었기에 모세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일어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4)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있고 난 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때나 기도해야 하지만 환란 중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아가페의 사랑으로 손님 대접을 잘해야 합니다(13절). 바울 당시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각종 핍박과 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위기를 당하지 않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전도자들은 순회 전도를 이어 갔습니다. 만일 이런 때 그 전도자들을 돕지 않으면 주의 교회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전도자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중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정도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이런 성도들 때문에 교회가 굳건히 섰고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 성도들도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생활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써 달라며 애써서 모든 물질을 헌금으로 가져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눈물겨운 헌신 때문에 주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존경해야 하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하며, 환난 중에도 기도에 힘써야 하며, 손님 대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사랑의 권면에 충실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