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광야에서만 먹은 양식(출 16: 31-36; 요한 6: 48-5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최근 연일 보도되고 있는 뉴스의 초점은 북한 룡천역 참사 사건과 이들 이재민들을 도우려는 세계 각국의 성금답지에 대한 보도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해방 이래 60여년의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북한 동포들이 과연 무엇을 먹고 지금까지 살아 남았는가 하는 의구심과 아울러 심각한 자괴감마져 느끼게 됩니다.  아마도, 광야 40년을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기적과도 같은 그런 기적의 연속을 그들도 또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져 듭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적을 가리켜 우리는 “만나의 기적”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죽음의 땅 광야에서 만나만을 먹고 살았던 민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나는 단순한 양식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땅에서 그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한 이스라엘 생존의 산실역할을 한 “말씀”이라는 “이념”이었습니다. 이 이념을 먹고 산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만나의 신학적 의미를 한번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만[나]”(ןמ)에 관한 이야기는 성서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해석되고 교훈되어 왔었던 이야기로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구약 본문 출애굽기 16장은, “만나”라는 말의 유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즉 어떤 예상하지 못한 기적의 경험과 또는 전혀 예상 못한 은총의 임재 앞에서 놀라움과 감격에 사로잡힌 나머지 부르짖었던 말, “아, 이게 무얼까?” “아, 이게 도대체 무얼까?” "What is it?" 히브리말로 “만후?” 또는 “마후?”라고 외쳤던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매우 특별한 종교적 의미 또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저 비옥한 땅인 나일 강 유역의 애굽 땅에 살고 있었을 때에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 때에건 간에, 그 어디에서도 결코 본 바도 없었고 먹어 본 바도 없었던 것, 단지 불모의 광야에서만 먹었었던 것, “전혀 먹거리 같지도 않은 먹거리”가 바로 이 “만나”였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애굽이나 가나안 복지와 같이 그런 화려한 물질문화(物質文化)의 혜택을 입고 있는 그런 그 세계에서는 결코 본 바도 없고 또 결코 먹어 본 바도 없었던 그 음식, 오직 단지, 이 척박한 땅 죽음의 불모지인 “광야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그 기적의 음식이 바로 이 “만나”였었다는 것이 그들 선민(選民) 이스라엘인들의 한결같은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만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인들과 같은 그런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떠돌이 유랑민이라면, 결코 살아 남기가 어려운, 그런 그 절대 죽음의 땅인 사막을 그들이 헤매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죽음의 땅에서부터 살려 내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직접 내려 주시어서 그들을 먹여 살리셨던 바로 그 “기적의 음식”, 그 “은총의 양식”이 바로 이 “만나”였다고 그들은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오히려 이것이었습니다. 즉 저 광야는 문화나 교육을 전수시킬만한 문화시설이나 교육시설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척박한 땅인 사막이었는데, 빵이나 교육과 문화시설이 전혀 없는 곳이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생의 참 뜻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 참 인간다운 삶의 길인지를 가르치고 교육하시면서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영의 양식인 “율법”을 돌판에 새겨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율법”과 “만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영과 육을 위한 양대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척박한 사지(死地)의 땅에서 “만나”에만 의존하여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이 사실은, 또다른 의미에서는, 그들은 “말씀”이라는 이 이념적이고도 영적인 양식에 의지하여서만!! 살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만나”                                 2
가 “말씀”이고 “말씀”이 또한 “만나”였던 것입니다. 그 둘은 둘이 아니라 실상은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막을 유랑하는 동안은 “만나”를 “율법”과 나란히!! 법궤 안에 안치하였고 그 법궤를 둘러 맨 사제들이 항상 광야행진의 맨 선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만나와 율법이 든 그 법궤가 항상 고난의 광야 길의 길잡이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만나”와 “말씀”은 다름 아닌 그들의 생명을 죽음의 땅 사막에서 지켜 주신 수호신이요 신의 은혜며 신의 사랑 그 자체 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실제적으로는 단순히 땅에서 우연히 기적적으로 발견한 “땅의 양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에서 이슬이나 서리처럼 이른 아침 짧은 시간에 잠시 내려 주신 “하늘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한 곳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16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나”의 의미가 그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복 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試驗)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 주신 시험의 재료>라고 설명되기도 하였다는 점은 더욱 주목할만한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신명기 8장은 이 “만나”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던 것이며 이 “만나”를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하나님의 말씀”(!!)>과 엄격히 일치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그 이유!를 성서는 "만나"란 전적으로 사람의 손으로 경작해서 얻은 양식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세속 문화에 의하여 오염되거나 속화(俗化)되지 “않은” 광야에서만, 즉 물질문화의 때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사막의 그 “광야”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은총의 양식, 즉 “하나님이 친히 내려 주신 하늘의 양식, 하늘나라의 양식”, 하나님의 양식일 뿐, 결코 사람이 손으로 농토를 경작하여 얻은 “땅의 양식”은 아니!라는 데서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 주신 하나님의 양식인 그 이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만나”를 그들은 “사람이 ‘생산해 낸’ 물질적 양식                                 3
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적 양식”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그들은 또한 “가나안”에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계시(啓示) 받았던 그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에서는 이 “만나”의 의미를 보다 더 심화(深化) 발전(發展)시켰는데, 신약에서는 “만나”를 가리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만나”이다!>라고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즉 신약본문인 요한복음 6장 49-50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만나”를 두고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바가 계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다들 죽었었으나,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 와 너희 가운데 거하고 있는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다름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먹어서 결코 죽지 않게 하는 [영생할 양식]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의 빛에서 볼 때, “만나”에 관한 성서의 증언들을 요약(要約)한다면, “광야의 만나”는, 첫째로는 (1)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물질문화의 유혹을 받지 않은! 순수한 것, 이른 바, 시내광야의 하나님의 산에서 직접 계시(啓示)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리고 둘째로는 (2) 이 “말씀”은 또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의 본 뜻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본문의 핵심적인 강조점과 그 주요 초점은 “만나”라는 이 하늘의 양식, 이 생명의 양식은 오직 “광야”에서만! 먹었었던 그 양식 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즉 권력 지상주의와 물질 지상주의를 추구하여 권력과 물질을 하나님으로 믿는, 그리하여 항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땅의 종교의 본산인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서는 결코 보지도 못했고 결코 먹지도 못했던 양식이 바로 “만나”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음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음식이 “만나”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판단한다면, “만                                 4
나”는 먹거리 같지도 않은 음식,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양식이었습니다. 다음 날이 안식일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하루 이상은 보관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쉽게 부패해 버리는 그런 하잘 것 없는 음식이 바로 “만나”라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광대무변한 사막, 독사와 전갈과 목마름과 배고픔만이 득실거리는 저 죽음의 땅인 사막 불모지의 “광야”에서 감히 그들의 그 가련한 생명을 40여년 동안이나!! 지켜 주었었던 그 생명력을 가진 양식은 결코 그 어떤 기름진 “인간의 음식”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지 하나님께서 따로 별도로!! 먹여 주신 “만나”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이르자 마자 그 “만나” 내리는 일은 곧! 중단(中斷)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난 날의 그 고달팠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자신들이 어떤 민족인지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단지 이렇게만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던 민족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언, 즉 “우리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았던  민족이다!”라는 이 선언 속에는 과연 어떤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만나”만을 먹고 산 민족이라는 이 이스라엘인들의 확신, 즉 메추라기 같은 “고기”!!는 잇몸에 끼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그들은 탐욕의 무덤속으로 사라져 멸망하고 말았다는 그런 그 확신 속에는 실로 다음 두가지의 민족적 자아인식이 깊고,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하나①는, “만나”라는 이 음식 같지도 않은 그런 하찮은 음식만을 먹고서도 죽음의 땅인 광야에서 40년이나 되는 그 오랜 유랑생활을 너끈히 이겨내었다는 이 사실은, <지상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신 7:7). 고난의 땅에서 기적                                 5
의 음식을 먹는 은총을 남달리 많이 받은 민족이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인 선민(選民)이다 라고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하나②는, “사람사는 땅”, 저 물질과 향락과 권력 만을 추구하는 땅에서는 다들 혀 끝의 즐거움만을 자극할 뿐 실제로는 몸에 오히려 독을 심어 주는 음식, 흔히  말하는 “정크 푸드”또는 “인스탄트 음식”과 같은 그런 물질문화와 향락문화의 독(毒)을 담은 음식들만을 먹고서는 결단코 건강하고 바르게  그리고 영원히! 살수는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손수 먹여 주셨던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주신 그 하늘의 양식인 “만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서야 비로소!! 건강하고 바르게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의도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광우병 소동이나 조류 독감의 소동을 가리켜 어떤 미래학자들은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오늘 세계 인류의 ‘인본주의적 이기주의’에 대한 신의 심판이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광야 40년”의 “만나” 경험은 그저 단순하고 평범한 인생경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영혼이! 결정적으로!! 구원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이른 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관하여 뼈저리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런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완전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그 절망적인 고통의 땅, 광야로부터 기적적으로 그들 이스라엘을 살려내시어 그들의 생명(生命)을 보존하게 해 주신 것은 <사람이 땅에서 거두어 들인 그 떡, 그 빵, 그 밥이 아니라! 실상은 오직 하늘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 그것 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저 고난의 광야에서 사는 동안 뼈저리게 뼈저리게 뼈저리게 체험하며 가르침을 받았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과거 20여년, 서대문 선교 교육원에서 집없이 살았던 그 20여년을 저는, 저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오직 “말씀”이라는 “만나”                                 6
에만 의지하여 살아왔던 광야 40년과 같은 세월이었다고 해석해 봅니다.  그 세월이, 진정, “만나”라는 하늘 양식 만을 먹고 살았던 광야 40년일 때에만, 비로소, 여기 이 동숭동 낙산교회가 하나님의 눈이 항상 이곳을 향해 주시겠다고 하신 그 신의 약속 위에 바로 서 있는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러한 성전(聖殿)의식이 우리의 가슴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저 문화의 유혹을 거부한 땅, 광야 한복판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 받았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빵”이 아니라!, “떡”이 아니라!, “밥”이 아니라!, 돌비에 새긴 그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의 힘”에만 의지하여 살았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즉 “만나”만을 먹고 살았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명기 8장 2-3절에서 그들은 이 확신을 아주 명쾌하게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40년 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그 의도를 명심하여라. 그것은 그 광야에서 이 만나를 너희에게 먹이심으로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하려 하심이었던 것이니라”라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만일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들도 또한 이러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양식”을 먹고 서대문의 선교교육원에서 20여년을 훈련 받아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불확정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더 신뢰하고 오직 그 말씀에 잇대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문자 그대로 “만나”라는 이 “말씀”의 양식을 먹으면서 형극의 광야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인들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 와 살면서부터는 이 “만나”라는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가슴 깊은 곳에 깊이 간직하고서, 그 말씀을 한시라도, 일분 일초라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인 “만나”를 “하나님의 법”과 함께 법궤 안에 싣고 그 만나와 법을 실은 “법궤”를 행열의 맨 앞에 앞세우고 40여년 동안의 광야길을 행군해 왔었던 것처럼,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와서 살 때에는, 그 만나 같은 말씀을 가슴 속에 깊이 묻어 두되, 이마에 써붙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늘 드나드는 집 문설주에 써붙이기까지 하면서 길이길이 말씀을 기억하고 영혼 깊은 곳에 굳게 굳게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말씀만이 생명이다는 이 이념 만이 성서종교가 우리에게 물려 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유산이요 진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감히 이 “만나”에 자신을 비유하여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라고까지 명명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도 이러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 삶의 삶을 사는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의 길! 밖에는 달리 다른 길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그것은, “사람사는 땅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 전(前)까지 광야에서만 먹었었던!! 그 ‘만나’라는 음식” 그 “말씀”이라는 하늘의 양식, 바로 그 말씀을 <먹고 사는 길 >밖에는, 그 말씀을 먹어 배에 채우고 창자에 채워 <말씀으로 사는 길> 밖에는  달리 아무런 길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나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호소문보다도 가장 긴박한 S.O.S.전문(電文)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결단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곳은 가나안의 경우와 같이 화려한 이방 문화종교의 옷을 입은 “바알주의”라는 간교하기 짝이 없는 가장 무서운 악마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기회만 있으면                                 8
우리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요 우리가 발붙여 살고 있는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또한 그런 사회입니다. 도처에 사기꾼과 도둑떼, 강도떼들이 득실거립니다. 한국의 어떤 대표적인 한 지식인은 강연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하던 말을 중단하고 돌연 여의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놈의 국회는 선량(選良)들이 모인 국회라기 보다는 형사처벌을 받을 사람들을 모아 놓은 하나의 범죄집단에 불과해!”라고 버럭 소리 지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국회의원이니 장관이니 대통령이니 하는 전 현직 정치인들이 모두가 우리들 일반 국민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해당하는 수십억 수백억 돈을 도둑질해 먹고 경제사범으로 체포되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 가는 죄수들이라고 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백  성으로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만 먹었었던 양식, 고난의 땅 광야에서만 먹었었던 그 고난의 양식, 저 만나”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그것 만을 먹으면서 사는 길, 그 길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의 룡천역 재해민들은, 분명, 참 정치 그리고 참 정부라는 것은 인민의 배를 굶겨 아사지경으로 몰아가면서도 지도층의 안위와 영달 만을 꾀하는 그런 것, 적어도, 그런 체제만은 결코 아니라는 진리를 전세계에 몸으로 알려 준 전령들이라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먹고 자란 저 룡천역 인근의 인민들은 분명 가까운 미래에 이 진리를 좀 더 큰 소리로 외치며 우리 앞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최대 비극의 때의 예언자 에스겔이 받은 그 “소명(召命)”이 또한 바로 이러한 우리의 실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먹어서 네 배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받아 먹었더니 그것이 달기가 꿀같더라”(겔 3:3)라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배에 넣고! 창자에 채워! 그 말씀을 먹고 사는 길, 그 길 밖에는! 달리 우리에게는 아무런 다른 길이 없다고 하겠습니다(끝).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