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서문학이 은유나 상징 또는 신화적 언어로 묘사한 고대의 한 이야기, 즉 고대의 가나안 땅에서 회자되든 매우 고풍이 깃든 민담자료로부터 매우 복음적인 가르침을 하나 찾아내어 보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의 주제와 그 주제를 유발시키는 언어는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미 우리들 사이에서 매우 익숙하게 알려진 내용이긴 합니다만, 그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그것은 이러합니다. 이삭이 낳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은 그 인격에 있어서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형은 매우 인간적이고 또 형제 간에 아웅다웅하는 그런 조잡하고 스케일이 작은 스타일이 전혀 아닌, 즉 매우 대담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반하여, 동생은 매우 비인간적이어서 자기 이익을 위하여서는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허수아비쯤으로 생각하는, 그리하여 부모 자식 사이의 윤리라는 것 조차도 자기 이익을 위하여서는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일종의 패륜아 스타일이었습니다.
형은 “에서”라고 하였고 동생은 “야곱”이라 하였습니다. “에서”라는 말은 “털이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후일 그가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므로 그 “에돔”이라는 말에는 “붉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에서”는 “털이 많고 피부가 붉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업은 “사냥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인 “야곱”의 그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그의 간교하고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는 사냥꾼 체질의 형과는 아주 다르게 주로 천막 안에 기거하며 어머니의 집안 일을 도우며 양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가 사랑하는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빌어 주시려고 하는 것을 간파한 “야곱”과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연로하시고 그 시력이 극도로 쇄퇴해 있다는 그 약점을 기회로 삼아, 야곱을 몸에 털이 많은 사람으로 위장하여 아버지의 바로 턱 밑의 면전에서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형이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로채 버린 그런 그 엄청난 반도덕적 행위 때문에 문제가 발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생 야곱은 형을 피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먼 밧단 아람 지역의 외삼촌 댁으로 피신하였다가 20여년간의 머슴살이를 끝낸 후에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은 야곱의 이 귀향길의 마지막 단계로 볼 수 있는 가나안 입구인 얍복 나루터에서 이외의 강한 공격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공격자의 일격을 받고는 엉덩이 뼈를 다치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갑자기 절룸발이가 되는 불행 스러운 일을 당하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발꿈치를 붙잡은 자”라는 매우 치욕적인 오명(汚名)을 떨어 버리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낸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는 영광을 얻었다는 그런 드릴 넘치는 야곱의 생의 일대기를 연출해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본문 이야기를 통하여 제기되는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은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가?”라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간교하기 짝이 없는 불륜아일 뿐만 아니라 구약의 법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모트 유마트”라는 최고의 형벌인 “반드시 죽여라”라는 단언적 절대명령에 따라 사형의 형벌을 받아야 할 패륜아였는데 반(反)하여 “에서”는 노를 오래 품지 않는, 이른 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울 정도로 인간미가 있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보다 “야곱”이 우리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고 선민의 조상이 될 자격이 있다는 논리는, 어쨌든, 해석학적 도구를 통하여 성서적 해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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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성서적 해명이 바르게 수반되지 않으면, 이 이야기가 주는 오해 때문에 우리 성서종교의 신앙이 엄청나게 외곡될 수 있다는 점은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그렇게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선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선택하셨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부터 예정해 두셨기 때문에 “야곱”은 그가 어떤 반윤리적 삶을 살아도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하거나, 또는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 엉덩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하나님을 놓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린 그의 그 완벽에 가까운 신앙적 끈기와 신앙적 노력 때문에, 즉 그의 열정과 그의 초인적 지구력 때문에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라고 하는 따위의 논리는 교리나 어떤 철학적 원리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잘못된 확신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과도 정반대됩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 선민의 조상이 되는 축복의 계승자가 된 것은 “야곱”이 창세전부터 예정되었기 때문도 아니요 야곱의 신앙적 노력 덕분도 아니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 25장 23절에 의하면,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이 정해 져 있었던 것처럼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은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오히려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에서의 후손인 에돔 민족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이의 운명을 미리 예고해 주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본문은 잘 못 해석될 소지가 매우 컸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서해석은 신앙양심과 학문적 양심이 합동하여 진지하게 진행되어야 할뿐 아니라 소명감을 가지고 해석되지 않으면 성도들을 잘 못 인도하게 되고 결국은 맹 3
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25장 23절에 나타난 소위 “복중신탁”(腹中神託: pre-natal oracle)이라고 부르는 것은 후대 사건을 미래적 예언으로 예언화하는 것, 좀 더 학술적인 말로 한다면, 후대 사건을 예변법적으로(proleptic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에서의 후손인 에돔 민족과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후대 사건을 아주 초기로 거슬러 올려 놓고서 미래에 대한 예언의 형식으로 출생설화를 만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 즉 리브가의 복중 아이에 대한 이 신탁은 결단코 예정론적 해석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 무슨 장로교의 예정론 교리로 풀려고 하는 것은,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미로(迷路)요 죄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된 것은 야곱의 끈질긴, 마치 하나님과의 씨름에서도 이긴 것처럼, 그렇게 야곱의 끈질긴 노력과 애씀,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그 끈기와 지구력이 그로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선조가 되게 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이 견해는 인간의 자력구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의의 여지 없이 폐기하여야 할 이론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행한 하나님과의 씨름은 구약의 일관된 전통족 신앙과는 많은 모순을 일으키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을 보고서는 어느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없다”(출 33:20)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씨름하는 이야기도 구약에서는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자료는 분명 성서 밖에서 온 신화적 자료를 응용 개작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신앙 전통 중 가장 강력한 신앙전통은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분이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살 수 없다”는 것(출 33: 20,23)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의 4
제 2계명은 매우 긴 언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강력히 경계하였던 것이며 특히 신명기는 “삼가 조심하라”라는 수사어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강력한 권고를 재삼 재사 강조하고 있고 또 구약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형상으로 가시화한 것을 정당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의 말일까요? 또 이러한 증언이 우리가 제기한 문제,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대답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구약 본문에 나타난 바,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을 이겨냈다”라는 증언은 그 이야기의 성격과 그 고대성을 철저하게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는 분명히 구약 본래의 이야기이거나 또는 야훼 신앙으로 뭉쳐진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 기원을 둔 이야기는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전제하지 않으면 문제를 풀어낼 수 없는 성격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즉 이 이야기는 고대 가나안 땅에 있었던 매우 원시적인 그리고 애 니미즘적 성격의 “강의 신”(river-ghost) 또는 “강의 정령(精靈”: river-numen or river-spirit) 에 관한 아주 고대의 가나안 토속 민간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통속 민담”이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여야 해석의 실마리가 풀려 나간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사적으로 보아, 야곱이 여기 가나안 문턱에서 가나안의 토속적인 원시신앙, 즉 산에는 산의 신이 있고 강에는 강의 신이 있으며 나무나 풀에도 나무나 풀의 정령이 있고 땅에는 그 영토를 수호하는 지신(地神)이 있다고 믿는 소위 애니미즘(animism)적 토속 민간신앙의 공격을 받고 밤새도록 얍복강 강의 정령(river-numen)을 믿는 종교의 도전에 맞서 힙겹게 싸웠다는 말이 됩니다. 이 상황은 야곱 이야기의 맨 마지막인 창세기 35장 서두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야곱이 그의 가나안에로의 여정의 종착점인 세겜에서 그의 전 여정을 다 끝내고 그의 가속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이방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모두 거두어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밑에 모두 묻은 다음, 5
벧엘로 올라가서 그 때부터 가나안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과도 매우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야곱이 강의 신과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한 이야기, 특히, 그 강의 신이 ‘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달라’라고 한 이야기”등의 배경은 세계 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정령 또는 귀신에 대한 민간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최고의 신(하늘의 지배자)인 Jupiter신도 Plautus의 Amphitryon 에게 말하기를, “왜 너는 나를 붙드느냐?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날이 밝기 전에 이 성을 떠나기를 원한다”라고 한 말이나 우리가 다 잘 아는 햄릿(Hamlet)에서도 햄릿에게 나타난 귀신이 “닭이 울자 사라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제가 좀 딱딱한 신학적인 술어로 표현해서 우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설명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즉 저는 야곱의 이 사건이란 야곱이 가나안을 이스라엘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을 성서기자는 신화적으로 또는 세계 성서학자들이 잘 쓰는 용어로 말하면 신화시적으로 표현한 것 뿐이며 그리고 이러한 표현을 설명의 주요 도구로 사용여 이른 바 가나안 땅에 널리 잘 알려진 얍복강 강의 귀신에 관한 민간 설화를 이스라엘적 신학으로 재해석(再解釋)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야곱은 가나안 문턱에 들어서면서 가나안 토속 민간신앙을 대표하는 얍복강의 강의 신 또는 강의 정령의 공격을 받고 밤새도록 싸워서 이긴 다음에야 즉 가나안 토속신앙을 극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수립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문맥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제기한 중요한 종교적 물음인 “왜 에서가 아니고 왜 하필 야곱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 보고자 하는 바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야곱이 축복을 계승 받은 것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기 때문도 아니고 얍복강의 강의 정령과의 투쟁에서 정말 문자 그대로 이겼기 때 6
문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성서의 일관된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볼 수 없는 분, 포착(捕捉)하기 어려운 분(elusive presense)”이시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아 남을 자가 없다(출 33:20)라고까지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왜 자꾸 나더려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가 다름 아닌 아버지를 본자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신계시 만을 고집하셨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 안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얍복강의 정령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곱이 이 정령과의 씨름에서 정말 이겼느냐 이겼다면 어떻게 이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얍복강의 강의 신(river demon)과의 씨름에 관한 기록을 자세히 보면 문자 그대로는 야곱이 이겼다기 보다는 야곱이 대 참패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엉더이뼈, 히브리 말로 야렉크(ךרי)라고 하는 것은 남자의 급소인 성기(性器)가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고 전통적으로는 허리 또는 환도뼈라고 번역되어 온 말인데, 이 엉덩이뼈가 부셔져서 갑자기 야곱은 절룸발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문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얍복강 사건을 신학화한 작업의 그 시작은 바로 이 점, 즉 야곱이 가나안의 정령과의 죽음을 건 씨름에서 일격을 맞고 깨어지고 부셔져서 패배하였다는 그 점을 출발점(terminus a quo)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가능성을 연 그 시작점, terminus a quo가 악한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에서부터 였다는 신약성서의 주장과도 정확한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여기서 그의 치욕적 오명인 “발꿈치를 붙잡았다”라는 이름을 씻고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 이유는 즉 ”하나님을 이겨낸 사람“이라는 정말 감당키 어려운 전대미문의 큰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되었던 그 이유는 바로 7
이 절묘한 신학화 작업을 통하여 비로소 밝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씨름한 정체불명의 “잇쉬”라는 정령 또는 잡신과는 전혀 다른 “엘”이라는 셈족 종교의 최고의 신이며 이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와 나중에는 일치되었든 그 하나님으로서 얍복강의 강-신령(江-神靈)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얍복강 씨름 이야기에 나오는 그 정령이, 성서 기록자에 의하여 갑자기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옮겨 가 버렸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여기서부터 성서기자가 이 고대 민담을 이스라엘적 신앙으로 신학화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야곱”은 여기 가나안 문턱, 이른 바, 야곱이 저 먼 밧단 아람 땅에서 데려 온 모든 가속들을 모두 다 강을 건너 보내 놓고 자기만 홀로 남아서 가나안의 얍복 강에 얽혀 있는 애니미즘적이고도 원시적인 정령 종교와 결사 투쟁을 하였으며 그래서 동이 틀 때에는 떠나가야하는 그 귀신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다가 엉덩이뼈에 일격을 맞고 그 허리뼈가 위골 파손되어 절룸발이가 되는 패배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쓰고 있고 또 이 고대의 민담을 이스라엘적 신학으로 신학화하는 우리 본문의 저자가 돌연 여기서 일필휘지 주제를 급전환시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여기에 등장시켜서 그 하나님의 입으로 야곱이 그의 여정 끝에 행한 이 행위에 대한 매우 놀라운 한 구언사적 판단을 내리시게 한 것입니다. 그 문학적 정교성은 너무도 놀라워서 현대 성서학자들의 능력으로서는, 아니, 쉐이스피아가 오더라도,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문학적-신학적 논리구성력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성서기자가 제시한 신학은 이것이었습니다. (1)하나님과의 투쟁에서 대 참패를 당하여 엉덩이뼈가 깨어지고 남자의 생산능력의 자리인 허리가 파손되는 그런 “신 앞에서의 깨어짐!”, 신 앞에서의 철저한 항복과 무너짐과 부셔짐, 신의 공격을 받고 깨어지고 치명적 부상을 당해버린 그 상한 심령!, 이 자기 깨어짐의 자리 8
가 다름 아닌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그 자리라는 것, 그것이 첫 번째이고 (2)그 둘째는 이렇게 신 앞에서 깨어지고 항복하는 그것을, 매우 역설적이게도 성서의 신이신 그 하나님은 그것이, 말하자면, 야곱이 그의 엉덩이 뼈를 다칠 정도로까지 신 앞에서 굴복하고 깨어지는 바로 그것이 곧 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하나님 자신이 판단해 주셨다는 것,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대답은, 비록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결단코 애매모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종교적 체험의 그 최고의 정상(summit)이라는 것이 우리의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이라고 하겠습니다. 신과 씨름을 하다가 그 앞에서 꼬부라져서 허리가 깨어지고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그 야곱, 그 참패자의 팔을 힘차게 위로 치켜 들면서 “승자(勝者)는 저 신이 아니라 야곱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라고 하신 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니고 야훼 하나님이시었던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으며 죽으셨던 예수, 그리고는 우리 말 사도신경과는 다르게 라틴어 사도신경이 더 심도있게 말하였듯이 아예 지옥으로까지 떨어지셨던 그 예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셔서 그 패배자 예수의 손을 치켜드시면서 예수 부활!과 예수 승리!를 선포하셨던 분도 또한 역시 다름 아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저 야곱이, 비록 예수와 같이 그렇게 선한 자는 아닌, 오히려 정반대의 성품을 가진 간교하기 짝이 없는 전대미문의 불륜아, 패륜아, 남의 팔꿈치만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 impossible person!,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하나님게 굴복한 그의 그 손을 높이 치켜들어 주면서 그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시고 “인류 구원의 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선포하신 분은 다름 아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창조주 9
하나님 그 분이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신앙고백의 기초요 근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은 패자, 진정한 패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주장해 왔던 모든 자기 의(義), 자기 선(善), 자기 주장의 정당성, 그 모든 자기를 다 쏟아내어 붓고 자기를 완전히 깨어버린 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울며 은총을 간구한 야곱(호 12:4), 그가 최후의 승자요 그가 축복의 수혜자였습니다.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는 이제 분명하게 규명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길이 있다! 이것을 알리는 것은 언젠가 제가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그것은 일종의 천기누설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자는 살아 남을 수 없다(출 33:20)는 성서의 주장을 역설적으로 뒤집어 엎고 하나님과 싸워 이겨내는 길, 비록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그러나, 이 사망의 죄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있는 길,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강력히 지적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약성서의 탕자의 비유의 한 대목도 이 진리를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더욱 드라마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해 굶어 죽는구나. 이제라도!!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드리자.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품꾼으로나 삼아 주십시오>라고 하자 라고 결심하고는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를 벌써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서 신발을 벗은채로 달려나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17-20)
저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이 본문을 적어 놓고는 눈물이 10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 온 탕자를 껴안으시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통하여 저는 제가 죽음과 피나는 사투를 하면서 고통해 할 때 저를 위하여 며칠밤이고 밤을 새면서 눈물로 기도해 주셨던 제 어머님의 그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과 신약본문들이 제공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모두 동일하게 세상에서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패륜아 또는 방탕아들이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큰 위로를 받으며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들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또 큰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패배 즉 야곱의 자기 깨어짐은 오히려 하나님도 감당해 낼 만한 위대한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의 시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제물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깨어지고 짓밟힌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51편 17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에게 교훈과 위로를 함께 전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돌아 온 탕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주는 사람이 없어서 배를 주릴 수 밖에 없는 데까지 낮아져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는 그런 그 방탕한 아들에게도 그가 뉘우치고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를 용서하고 환영하며 큰 잔치를 열어 환영하였다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 즉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께로 항복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 이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무리 잘났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깰 수도 있다는 것, 아니,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깨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의(義)도 자기의 선(善)도 포기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왜 에서가 아니고 11
야곱이냐?라고 하는 수수께기같은 질문에 대한 성서의 답변은 그러므로 그 어떤 예정론의 틀 안에서 풀거나, 아니면, 무조건 하나님에게 매달려 축복해 달라고 떼를 쓰기만 하면 된다는 인간의 공적론을 내세우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 축복의 계승자가 되고 구원의 길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 새로운 자기로 거듭났다는 거기에!! 그 길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이라고 하겠습니다. 깨어진 심령, 상한 심령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요 이런 깨어진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 이것은 성서가 열어 보여 주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