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래간 만입니다. 우리가 낙산이 아닌 서대문의 선교교육원에서 "낙산교회" 또는 "낙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정말 순수한 신앙공동체의 정신으로 출발을 한지 만 20여년 만에, 그리고 제가 학교 행정일 관계로 낙산교회를 떠난지는 만 15년 만에 여러 존경하는 교우님들,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여러 교우님들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되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담한 예배장소를 직접 우리 손으로 일구어서 처음으로 이 곳에 들어 와 예배를 드리게 되니 그 감회 또한 크고 새롭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최정희 권사님 영결예배관계로나 또 하영호 목사님을 낙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소개하는 일 등등의 관계로 여러분을 뵙는 일들이 있어서 15년을 전혀 무소식으로 깜깜하게 지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낙산교회는 하목사님께서 잘 이끌어 가고 계시므로 저는 수유리 신학교 재건하는 일에만 흠뻑 빠져 있어서 가까이 있으면서도 여러분과는 참으로 오랜 동안 소원하게 지내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비록 15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말씀”을 통한 교제는 그 때와 지금을, 시공을 초월하여,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으로 믿어져 감히 제가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오늘은 “창립 20주년을 맞는 날”이고 동시에 “부활 주일”이며 그리고, 다소 어수선한 상태이지만, 직접 우리 손으로 지은 “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런 매우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득 이와 관련한 주님의 말씀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즉 성전에 대한 열심히 지나칠 정도로 강한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에 의하면,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라,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라,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라” 라고 <삼창>(三唱)을 외치면서 저들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종교에 대한 열심을 열렬히 입으로 부르짖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성전을 모독하고 있었으며 급기야는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린 그런 유대교의 자기모순과 그리고 성전종교의 그런 그 자기붕괴의 조짐을 직시한 예수님은 담대히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테면 헐어라 내가 사흘 안으로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외쳤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하였든 것입니다. 첫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자신들은 성전에 대한 열심히 대단할 뿐 만 아니라 성전종교를 우상화하다 시피 해 온 그들 자신들인 2
데 감히 이러한 그들이 그 성전을 헐고 있다고 말하니 이해가 안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성전을 짓기 위하여 그들은 46년 동안이나 긴 세월을 보냈는데 예수께서는 그 성전을 단 사흘 안으로 짓겠다 하셨으니 또한 역시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종교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던 그들 유대인들이 스스로 이 “성전을 헐고 있다”라고 한 예수님의 이 말은 무슨 뜻의 말이었으며 또 그들 유대인들이 46년 간이나 걸려서 지었다는 이 성전을 그들이 헐면 예수님은 그 성전을 사흘 안으로 다시 짓겠다고 한 말씀은 또한 무슨 뜻의 말이었겠습니까?
세계교회협의회가 제1차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던 것은 1941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생명 살상의 광난끼를 가진 세계 제2차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제1차 대회의 모임은 순연되었고 1948년에야 비로소 암스텔담에서 열리게 되었었습니다.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전 세계 147개 교회 대표들은 총회 개막에 앞서 개막예배 보다는 오히려 엄숙한 장례의식을 먼저 거행하게 되었는데, 총회에 참석한 세계 교회 지도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나와 거기 놓여있는 관 속의 시신을 들여다 보면서 조의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와 묵념하는 침울한 자세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 관 속에는 시신 대신 거울이 놓여 있었고 어떤 다른 3
사람의 시신을 통하여, 이를테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주도한 그 어떤 독재자의 흉물스러운 시신을 통하여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과는 전혀 달리 그 거울을 통하여 오히려 각각 자신의 얼굴 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관 속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시신을 보리라 기대하였던 그들이 모두 그 관속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자화상 만을 들여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종교에 광적이다 시피 몰두하였던 유대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들이 돌로 치면서 정죄하고 비난하며 그 몸을 찢어 십자가에 매어 달아 죽였던 그 예수의 시신을 통하여 오히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성전 종교 이념이 외곡되고 파괴되어 무너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여 무너뜨리고 헐었던 성전된 예수의 몸은 오히려, 그들이 그토록 육중한 돌로 그 무덤 어구를 막아 봉인까지 해 두었지만, 그 몸을 일으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부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중동의 종교분쟁과 이념분쟁, 아랍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충돌과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 사이의 사생결단하는 충돌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한국의 정치현실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성전붕괴라는, 이른 바, 마호멧 종교와 기독교 교회의 붕괴와 같은 자기붕괴를 통한 국제사회의 총체적 위기와 같은 것을 목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National Geographic 4
이라는 잡지의 2001년 12월 호의 표지는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 하나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3대 종교가 모두 공동으로 ‘신앙의 조상’이라고 추앙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제하의 그림인데,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치켜 든 그 칼잡은 손을 하나님의 사자가 황급하게 제지함으로 그 칼이 아브라함의 손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는 표지해설을 통하여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 이 3대 종교가 모두 다 한결같이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추앙하는 그 “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오직 하나란 결단코 그 무슨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따위의 종교행위, 즉 사람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그런 반 윤리적 종교행위는 결사코 아니!라는 것,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른 바, 민족과 신분과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생명에의 사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직 한가지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람교도들과 기독교교도들 사이에 일고 있는 종교분쟁과 문명충돌은 차치하고라도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한 우리 한국 기독교의 교회들이 또한 지금 총체적 위기에 삐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 5
라고 할 때, 수백 수천 억대 경제부패의 장본인들인 정치인들의 부도덕성을 포함하여, 살인 강도 강간 유괴 등등으로 얼룩진 모든 광기어린 사회적 질병의 도미노 현상에 대한 책임의 최소한 25%는 우리 기독교에게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으며 성전된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남이 아닌 우리가 지금! 여지 없이 공략하여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썩어지고 있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재건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급한 상황 속에서 우리 낙산교회가 때맞추어 새 성전을 짓고 또 정확히 성년된 나이인 창립 20주년의 성년기에 들어 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 20세의 나이는 모세가 에집트 궁전에서 궁전 밖의 고통받고 있는 자기 동족, 히브리 민중의 세계 속으로 뛰쳐 나왔었던 그 때의 그 연륜과 정확히 일치하는 나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낙산공동체의 출발은 여러 교회들의 일반적 생성과 같은 동일 패턴의 출현이어서는 안된다고 하겠습니다. 모세 출현과 같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같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삼일 만의 부활>을 우리 안에 재현(再現)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재현(再現)의 대업(大業)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6
우리 모두가 돌아가는 그 길 만이라고 하겠습니다. 잡것을 섞지 말고 20년 전 우리의 그 순수한 출발정신을 회복하는 그 길, 진정한 의미의 낙산 공동체의 부활, 출발 때의 그 모습의 재현을 도모하는 그 길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한 20여년 동안, 서대문 선교 교육원의 울타리 안에서 소위 말하는, 일종의, “광야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즉 전통적 교회의 낡은 교조주의를 호되게 비판하고 거기서부터 엑소더스한 것을 출발이념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변형된 형태의 신(新)교조주의적 독선이 여전히 둥지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즉 우리 자신이 깨어지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신이 우리 자신의 과거가 아닌, 그 어떤 다른 교조주의자들의 흉물스러운 시신일 것이라고만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우리는 여전히 그 과거의 우리로만 여기 있어 왔을 뿐입니다. 즉 우리는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새로워져야 할 과제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과거와 함께 감히 다 헐어 버리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켜야 할 시점에 서게된 것입니다. 그 유일한 모델은 논의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일 뿐입니다.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리는 그런 속량적 부활, 그런 부활을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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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관 속에 넣고 못질하는 일, 그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우리를 일으키는 일, 그렇게 하여 이 새 성전과 함께 그와 같이 또한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는 일 그것 만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필요할 뿐입니다.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킬 "우리", 그 "우리"는 배타적 교조주의의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타인(他人) 사랑을 표방하는 예수 공동체의 새 전통으로 근본적인 전이(轉移)를 단행한 바로 그 “우리”입니다. 헐어야 할 그 “우리”, 아직 못박아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 그 “우리”를 이제 이 새 성전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함과 함께 근본적으로 청산(淸算)하고, 비록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새롭게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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