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돌아가라(창세기 16:7-11, 누가복음 15:20-24)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2000년대에 들어 서면서 세계의 이목을 가장 집중 시켰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뉴욕에 있는 세계 무역센타에 대한 이슬람 계열의 비행기 자살테러 공격과,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세계 초 강대국인 미국 내에서 급격하게 조성된 새로운 양상의 “전쟁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문제가 우리 한국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화급을 다투는 문제로 다가 오고 있고 그리고 미국의 강력한 전쟁전략의 대상이 이라크 못지 않게 북한으로 전이(轉移)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의 전쟁 문제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대한 국가적 현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급기야는 2002-5년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우리 사회에 심심치 않게 종말론적인 공포를 조성하며 회자(膾炙)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 역사가 “전쟁”으로 인하여 그 운명이 마감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특히, 한국인들 중에서 6. 25 동란을 경험한 세대에게 있어서는, 전쟁이란 우리로부터 모든 인간적인 희망을 모두 빼앗아 갔던 악마(惡魔)였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우리 안에 수립하는 일이란, 비록 우리들 인간들의 공통된 희망이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면 누구나 평화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평화를 실현해 보자 라고 하면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은 평화 파괴적인 행동을 더 쉽게 하는 것을 우리는 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고는 하면서도 정작 그 인간 본성은 매우 평화 파괴적이다는 그런 말입니다. 예컨대, 평화를 만들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냥 놔두고 보지 못하여, 깐디나 링컨이나 마르틴 루터 킹과 같은 사람은 기를 쓰고 라도 암살해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평화수립”에 대한 아무런 대안(代案)도 없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 지식인들이 생각해 낸 최선의 평화수립의 대안은 기껏해야 “힘의 평형 논리”(balance of power)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일 형태로 보복하는 복수법, 소위 렉스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고 이름하는 동태(同態) 복수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평화유지의 길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평화협의 기구인 UN 마져도 “힘의 평형 논리” 이상의 평화수립 대안은 내어 놓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스운 것은,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는 이 동일형태로 갚아 주는 동태 복수법(同態 復讐法)이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상 아주 고대에 속한 매우 원시적인 사회질서 유지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법이 아직도 21세기의 세계 최고의 평화 기구들이 제시한 유일한 평화(平和) 대안(代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이 점입니다. 참으로 넌센스(nonsense)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歷史)는 아이러니킬하게도 이 대안(代案) 만을 가지고서는! 결단코! 인간사회에 평화를 진정으로 정착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경험해 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구는 전쟁 소문과 전쟁의 위협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전쟁”이라는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개인끼리도 싸우고, 국가끼리도 싸우고 종교끼리도 싸우며 이념끼리도 싸웁니다. 온통 세계는 싸움판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끼리도 싸울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의 같은 교인들끼리도 싸웁니다. 그 어느 것도 약육강식의 목숨을 건 싸움 짓거리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수립의 문제에 대하여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일까                                 2
요?     
    실로, 성서의 대답은 천지창조 때부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분명한 “오직 한가지의 대답 만”을 되풀이 하여 외쳐 왔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즉 그것은, <함께 사는 것>, <더불어 사는 것>,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하는 그런 원시적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며 더불어 함께 공생/공영/상생하며 사는 것>, 그것 만이! 인류평화의 유일한 해결책이요 대안이다!”라는 것이 성서의 유일한 대답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즉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직후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 하니 내가 그를 도와 더불어 살아갈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태초의 창조 때부터, 즉 인류역사   시작 때부터, 본질상, 더불어 살아야 할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만 잘 산다고 잘 살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 오히려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잘 살기가 더! 어려워지고, 급기야는 분열과 분쟁과 싸움으로 스스로 자기를 파멸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 그것을 성서는 인류 역사 처음부터 줄곧 인간을 향하여 말하여 왔던 것입니다.
    조금은 오래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40대 초반의 젊은 철도원이 역으로 달려 들어오는 새마을호 열차에 부딪혀 죽을 위기에 있는 어린 아이를 보고 신속한 속도로 달려들어 그 아이를 구해 내고 자신은 두 다리를 절단 당해야 하는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침마당 TV 프로그램에 나온 그 살신성인의 청년부부는 그 엄청난 비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족(義足)을 한 불편한 몸으로나마 여전히 그 얼굴에는 불평이나 좌절감 같은 것은 전혀 나타내는 바 없이 남은 생도 또한! 여전히 그                                 3
렇게 살겠다는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밝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이 젊은 청년의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입은 그 아이와 그 부모는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도록 떠들어데는 그런 와중 속에서도 해가 넘어 갈만큼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을 구해 준 그 은혜에 감사하다는 인사는 커녕 자신의 정체 조차도 밝히지도 않고 숨기고 있다는 매우 어두운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어서 우리 인간 사회의 갈등구조를 가슴 아프도록 진하게 느끼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중요한 문제는 <혼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은 악(惡)이고 자기의 손실을 감내하면서라도!!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을 추구하는 것은 선(善)이다>라는 이 만고불변의 성서적 진리를 우리가 과연 어떻게 시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도 또한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이 진리를 또 한번 더 확실한 언어로, 그리고 매우 드라마적인 언어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본 부인은 “사라”라고  이름하는 히브리 여인이었고 둘째 부인은 애굽에서 사라의 몸종으로 데려 왔다가 여주인 사라의 권유를 받아 아브라함의 첩이 된 “하갈”이라고 이름하는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이 하갈은 그의 여주인이 아기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씨받이”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의 여주인의 남편인 아브라함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줌으로서 끊어질 아브라함 가문의 대를 이어 주는 엄청난 일을 단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와 두 여인 사이의 갈등은 그러한 당시의 "가문의 대(代) 잇기 관습법"이라는 그런 수준 높은 사회관습법을 통하여서 조차도 전혀! 해결의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 두 여인, 사라와 하갈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고 마침내 정실부인인 사라는 첩 하갈을 내어 쫓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존관계”, 즉 더불어 함께 사는 공생/공영/상생의 질서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은 마침내 갈라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입니                                 4
다. 그러나, 이 갈라섬은 사라의 아들 “이삭”과 그리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적대관계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고 그리고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라짐은 또한 오늘 날의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후손인 이슬람 교도들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술”(수르) 지역의 어느 샘물 곁>  은, 지리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 가나안과 이방 나라 애굽 사이를 구분짓는 국경지역으로서 아랍인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역이요 오늘 날의 수많은 아랍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있는 멕  카(Mecca)라는 도시로 가는 길에 위치한 “술”이라 이름하는 지역이  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맥카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역이며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이슬람이 갈라지는 분기점(分岐點)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니러니칼하게도,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도망치는 길, 이젠, 한 발자국만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과는 영원히 결별하는, 그리고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의 이슬람 신도들이 영원히 이를 갈며 증오와 갈등의 원수관계로 헤어지게 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의 길, 바로 이 “술”(수르) 지역의 노상에, 놀랍게도, 전혀 예기치 못하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요 참으로 의외의 사건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랍인들의 국경지역인 “술” 지역까지, 그것도 “한 쫓겨난 이방여인”, 즉 애굽에서 데려 온 씨받이 여종인 하갈, 무시해 버려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저 낮고 천한 이방 여인의 뒤를 저토록 집요하게 뒤따라 오신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함일까요?  혹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방 신을 섬기는 저 이방여인 “하갈”이 복수의 칼을 품고 되돌아 와 선택받은 집안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 되시어서 저 이방 여인을 여기 멀고도 먼 아랍 국경지역까지 뒤따라 오신 것일까요?  성서의 이 보도                                 5
는 오늘의 우리에게 도데체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일까요?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   냐?”  이에 대한 아랍계의 이방여인 하갈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저는 제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나이다!”
    이 대화 속에는 일종 이스라엘인들과 이스마엘 후손인 아랍인  들이 심각한 인종충돌을 일으킬 것 같은 매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이러한 위기의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기자가 여기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었습니다: “하갈아, 너는 네 여주인 사라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 여주인의 수하에 복종하라!”  참으로, 의외의 기대 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자보다는 무조건 강자의 편을 들어 강자를 편애하였었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겠습니까? 7-9절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 말씀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편애하고 아랍계의 이방여인 “하갈”은 차별하여 억울하게 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 결론부에 나타나는 10-11절 말씀은 오히   려 그러한 의심을 일시에 불식(拂拭)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갈을 향하여 “하갈아,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케 하여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많게 하리라.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내가 네 고통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하갈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대단한 축복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서 해석가들은 여기서 감히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메시아 수태 예고를 받으며 받았던                                 6
“아베 마리아”의 평화 축복사와도 맞먹는 축복사를 아랍 계역의 하갈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라고 주석할 정도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여기서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는 인류를 향하여 주신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즉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더불어 함께 살려는 공존(共存), 공생(共生), 상생(相生)의 노력이 곧 인간평화(人間平和) 수립의 관건이다”라는 가장 확실한 “평화수립의 길”에 관한 구원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사는 것,” 비록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반목과 갈등을 최선을 다해 극복하고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로 가는 필수적인 관문”이라는 것이 성서의 근본 입장입니다.  “고난의 아골 골짜기는 구원에로 가는 희망의 문이다” 라고 외친 예언자 호세아 처럼(호 2:15), 이 “고통스럽고 힘든 공존 공생 상생의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길을 통하여서도 진정한 평화가 우리 안에 이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성서는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의 부활이 바로 이 진리를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오직 단지, 여기서 사라와 하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인간 갈등의 “벽”을 먼저 허물라고 요구하고 계실 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 하갈의 고통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으로서, 사라에게 내리신 축복을 하갈에게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라 만이 하나님의 딸이 아니라 하갈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삭 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못지 않게 “이스마엘”에게 주신 이름인 “이스마엘”이라는 이름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매우 축복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                                 7
녀이지만, 아랍 사람들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녀라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한 번 잠깐 언급하고 지나간 바가 있습니다만, 2001년 12월호의 National Geographic이라는 잡지의 표지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 하나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3대 종교가 공통으로 ‘신앙의 아버지’라고 공히 추앙하는 인물, 아브라함”이라는 제목 아래, 아브라함이 그의 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하여 치켜 든 그 칼을 하나님의 사자가 황급하게 제지함으로 그 칼이 아브라함의 손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는 표지해설을 통하여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즉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  교, 이 삼대종교가 모두 다 한 목소리로 다들 자기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추앙하는 그 “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 오직 하나란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그런 인신희생 종교의 종교적 열정이라기 보다는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즉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생각하며 더불어 함께 공생 공영 상생하며 사는 것,  그것 만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오직 한 가지!!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종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진리를 줄곧 외쳐 왔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종교는 분명 후대의 유대 종교와 같은 배타적 율법주의 종교와는 달랐습니다. “돌아가라!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며 함께 살아라!”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유일한 것이라고만! 성서는 가르쳐 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한 언어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이 모든 율법을 집대성한 하나님의 근본 뜻이라고 강력하게 역설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모든 종류의 인간 갈등과 인간 충돌 및 인간 반목은 모두 성서의 하나님의 이러한 근본 뜻을 역행하는 반(反) 신앙적 신성모독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힘의 논리”만을 믿고 사생결단 싸우기만 하는 오늘의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의                                 8
종족 갈등과 그리고 서구 기독교와 아랍계 이슬람교와의 종교 갈등, 이것은 분명 기독교의 가르침과도 모순되고 이슬람교의 가르침과도 모순되는, 이른 바, 야훼 하나님의 뜻과도 모순되고 이슬람의 알라 신의 뜻과도 모순되는, 그야말로, 무신론적이고도 반(反) 평화적인 악(惡)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수립이란, 그러므로, 영원한 “실패작”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오너라!!  그리고 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공존 공생 상생의 삶을 살아라!”라는 이 말씀 만이 진리요 이 말씀 만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실현과 구원에 관한 참 가르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야훼 하나님은 우리들 사이에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찾아 오실 뿐입니다.  38선 남북 분단지역에도 오시고 흑인과 백인 사이의 흑백 갈등지역에도 오시고 진보와 보수 사이의 이념적 갈등지역에도 오시고 사이 나쁜 고부 사이에도 오시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방색 갈등이 접경하는 지리산 능선 자락의 화계장터에도 오십니다. 교회 내의 여러 가지 갈등들 속에도 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같은 나의 자녀들아, 돌아오너라!  돌아와서 함께 더불어 살아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며 피차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라.  이것이 너희 하늘 아버지인 나, 하나님이 원하는 바다.”
   그렇습니다. 신구약 성서의 가르침의 진정한 핵심은 바로 이 “돌아가라!” 또는 “돌아오라!”라는 말씀 속에 완벽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돌아가라!” 또는 “돌아오라!”라는 말은 성서에서는 정확하게 “회개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은,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에 나오는 그 탕자가 결연히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듯이 그렇게!! <하나님에게로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 그것을 의미합니다.  과거를 철저히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돌아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의 논리”라는 매우 매우 전근대적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여전히 반목과 질시 속에 있어서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9
우리 낙산교회도 20여년 전에 바로 이러한 확신과 신념 때문에 기성교회의 구조를 비판하고 거기서부터 엑소더스하여 나와서 교회 교권주의를 극복한 교회의 참 본질과 참 기능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진정한 선교적 사명에 충실하는 신앙공동체가 되겠다고 하여 <평신도 중심 교회>라는 좀 유별난 개혁의 기치를 들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디까지나 만일 이라는 가정법 아래서 말합니다만, 만분의 일이라도 20여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우리 안에도 만일 만의 하나 이런 타파해야 할 교권주의적 반 복음주의의 기운이 물들게 되었다면, 우리야 말로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가능성을 놓고 볼 때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게로 또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도 또한 여기서 둘 째 아들 탕자(蕩子)의 돌아옴을 인하여 일어난 천국 잔치와 비교하여 돌아오지 않는 옹고집의 바리새적 교리주의를 그 무엇보다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로 돌아오는 자가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이다 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원리입니다. 지는 자가 이기는 자다 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챤 엘리티즘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고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종교적 기만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은총이라는 것도 있다는 왜곡(歪曲)된 Sola Gratia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정말로 거짓 가르침이요 거짓 종교의 사술(邪術)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하여 다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못난 자만 돌아 갈 것이 아니라 잘난 자도 돌아 가라는 것입니다. 잘난 자는 못난 자보다 더 열심히 돌아가야 합니다. 하갈만 돌아갈 것이 아니라 사라도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10
도 돌아가야 하지만 예수 믿는다는 사람도 회개하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회개하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회개 없이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돌아가라! 라는 이 요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성서가 쉬임없이 가르치고 외치는 구원에 관한 유일한 안내요 길잡이라고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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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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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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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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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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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