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 들리면서 피었나니.
이 말은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교보생명 빌딩에 붙어 있는 광고선전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은 얼핏 보기에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밤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한 서정주의 시를 응용한 언어같이 보입니다. 어쨌든 이런 시구가 말하는 바는, “흔들림”이라는 인생고(人生苦)의 파도는 피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므로 그것을 두려워하여 회피하면서는 인생을 살아 갈 수 없다는 교훈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모호한 어투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은 매우 강력하고도 확실한 메시지로 우리에게 대답하고 있고 또 우리를 가르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는 흔히들 “변화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어느 시대거나 간에 “시간”이라는 시간은 다 “변화”를 겪으며 지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제3천년기라는 new millennium 시대에 있어서는 그 변화의 강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높고 또 더 빠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변화의 속도가 후진국보다는 더 빨라서 선진국의 많은 젊은 이들이 이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 어느 때보다 이 시대의 젊은 이들이 이전 시대의 젊은 이들 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변화”(變化)라는 것은 반드시 “흔들림”을 거쳐 간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뇌는 변화하기 위한 이러한 “흔들림”의 파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심화(深化)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1)첫째로는 왜 우리 인생과정에는 이토록 헤쳐 나가기가 어려운 “파도”라는 것이, 즉 “흔들림”이라는 것이 있는가?하는 문제요, (2)둘째로는 이러한 “흔들림”이 불가불 있어야 한다면, 이러한 “흔들림”이 우리 가운데 있는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3) 셋째로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즉 이 허무하고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저토록 높고 거센 파도를 과연 어떻게 이겨내어 넘어 갈 수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 물음 중 첫 번 째 물음에 대해서는 교보생명 빌딩에 붙은 광고문이나 서정주 시인의 시 중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언급 한 바가 없었습니다. 둘 째 번 물음에 대해서도 그들 모두가, 비록 많은 사색을 하였다고는 하더라도, 이 흔들림의 그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또 그 어떤 시사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더욱이, 세 번 째 물음에 대해서도 그토록 수많은 인생경험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렴풋하게나마 이야기 하였을 뿐, 확실한 언어로는 결코 말하지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역시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또한 신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목사요 성서학을 가르치는 사람인 저로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성서의 입장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의 문제, 즉 이 세상은 왜 흔들리는가? 이 세상을 이토록 강하게 흔들어제치는 주체는 누구냐? 라고 하는 문제는 분명 종교영역에서만 그 대답이 가능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종교영역에 속한다 해서 그 무슨 이원론적 사고를 끌어들여서 이 세상의 “흔들림”을 그 무슨 "악마의 장난"이라고 본다거나 또는 그것을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로 쉽게 설명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그것은 이미 우리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논의되고 결론내려진 것이며 제가 지나간 여러 설교를 통하여 수차례 강조한 것이므로 이 운명과 자유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렇게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련하고 유한한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려는 저 저토록 높은 인생고의 파고(波高)는, 중동의 많은 신화들이 말한 것처럼, 그 무슨 신들의 전쟁이 낳은 우연한 한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이 점은 바벨론 포로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엘리트 신앙인들에 의하여 깨닫게 되었던 진리, 즉 역사의 주인은 오직 한 분 뿐이시라는 것, 예컨대, 선민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과 페르샤 그리고 희랍 로마에 의하여 찢기고 할켜서 거의 멸절되다 시피하다 못하여 그 남아 있는 소수의 남은 자들 조차도 전 세계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소위 “디아스포라”의 유랑민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앗수르의 신에게 패배하여 생긴 것이거나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배하여 생긴 것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신이신 야훼 하나님 자신께서 그가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징치하시려고 앗수르, 바벨론, 그리고 페르샤 제국들을 역사의 지평 위로 불러내어 이스라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그 진리,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한 진리에 대한 놀라운 각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부버라는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는 바벨론 제국 말기에 활동을 하였던 한 익명의 예언자 제2이사야를 가리겨 “구약성서가 낳은 최대의 신학자”라고까지 높이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러한 "흔들림"에 관한 경건한 신앙인들의 탄식 소리는, 즉 바벨론 포로기 말 이전(以前)의 경건한 신앙인들의 탄식 소리는 성서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의 글에서나, 시편의 탄식시들의 글에서나, 심지어는 포로기 이후의 저항문학을 주도한 지혜자들의 글들에서도, 즉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흔들림”에 관한 항변의 탄식 소리들을 쉽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예언서들로부터도 이런 논조를 읽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흥 바벨론 제국의 등장 시기에 활동하였었던 하박국이라는 예언자의 글에서는 그 논조가 매우 뚜렷하고 확연하게 이러한 논조가 들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야훼여, 주께서는 옛날부터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 주님이시 여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보시고는 결코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시고는 결코 그냥 계시지는 못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하여(why? המל=라마) 주님께서는 패역자들을 보고만 계시는 것입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저토록 마구 삼키는데도 어찌하여!? 주님은 참아 보시며 조용히만 계시는 것입니까?”(합1:13)
이러한 논조는 시편 탄원시들에서는 더욱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탄식시인은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2
받을 때에 숨어 계시기만 하시는 것입니까? 악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핍박 합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은 자기가 쳐 놓은 올가미에 자기가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해주십시오! 악한 자는 자기 욕망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 시합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말하기를, ‘심판자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모두 이러합니다. 그런데도, 악인 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악인 은 오히려 의인들을 보고 코웃움만 칩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망하 는가 두고 보아라! 나에게는 불행이란 없다!!’라고 큰소리칩니다”(시 10:1-6)
이러한 탄식의 항변은 구약 종교 매우 후대에 가서는 지혜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허무주의”라는 매우 색다른 역설적 화법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 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 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그 자리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고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 모 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 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그러니,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전도1:1-7,8)
이러한 성서문학의 허무주의는, 얼핏보면, 그 무슨 “변화없는 세계”에 대한 무료함에서 온 반응으로 비쳐지지만 오히려 이것과는 정반대로 그것은 인생의 무상함과 현실세계의 불합리성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흔들림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역(逆)으로 표현한 것이 구약 지혜문학, 특히 전도서 기자의 주요 중심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 물음은 종교적이 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이 어찌도 이렇게 무상하냐는 것이며 또 왜 이렇게도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제 질서의 원칙을 상실한채 이렇게도 흔들리기만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오늘 읽은 우리 성서본문의 대답은 너무나도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명료한 단순성을 띄고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구약 본문인 시편 102편 25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옛날 야훼 우리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고, 그리고 신약 본문인 히브리서 12: 26b에서는 이렇게 좀 더 구체적이고도 선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두 성서본문의 공통된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땅에 기초를 놓고 하늘을 손수 지으실 때 이미 이 세계를 본질상 흔들리도록, 즉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도록 그렇게 설계하셨다”라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이 표현은 매우 평범한 일반적 진리를 또 한번 더 강조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쉽 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평법하게 보이는 진리를 깨닫는데에도 구약종교가 소요한 시간은 적어도 500여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할 정도로 장구한 세월이 필요하였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이후에 광야유랑을 거친 후 가나안 땅에 정착을 시도한 때는 청동기 시대 말과 철기시대 초 사이 쯤인 기원전 1100년 쯤으 3
로 보이는데, 이 진리를 명백한 언어로 선포한 예언자 제2이사야가 무릎을 치면서 “아, 이제야 깨달았다”라고 선포한 때는 기원 전 500년대 후반, 그러니까 페르샤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Cyrus) 왕이 기원전 539년에 그토록 강대하였던 저 신흥 바벨론 제국을 꺾고 바벨론에 무혈입성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많은 생각있는 사람들이 신비에 가득찬 눈으로 지켜 보고 있었던 바로 그 때!!가 확실하므로, 적어도 구약성서의 종교가 이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무려 반(半)천년의 시간은 충분히 소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0년 세월을 훌쩍 넘긴 후, 그것도 신흥 바벨론 제국의 호된 억압을 70년 간이나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익명의 한 예언자가 무릎을 크게 치면서 “아하, 이것이 진리로구나!”라고 하면서 외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페르샤 왕] 고레스야, [나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너보다 먼저 [바벨론 땅으로] 앞서 달려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러뜨리겠다.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모두 꺼내어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야 너는 내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감히 [이방인인] 너를 지명하여 불러내는 그 역설(逆說)의 의미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전적으로!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너는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이토록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야훼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이방인이어서] 비록 나를 알지는 못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너에게 오히려 네게 필요한 능력을 부어 주겠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나 야훼가 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 구세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진실로 주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군요. 그러므로, 두 신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치욕을 덮어 쓰고 뒤로 물러갈 것입니다(사 45: 2-7, 15-16)”.
이 예언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흔들림”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매우 확실한 언어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유일하신 신이신 야훼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고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신다>! 라는 선언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유일하신 이 세계의 주인이시며 창조자이신데, 즉 이 만유를 만드신 분이신데, 그 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감추시는 그 때에는 이 세상이 그 기초에서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가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도 또한 그 현현과 동반하여 이 세상이 또 다시 다른 모양으로 흔들리게 된다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이 흔들리는 그 진원지(震源地)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을 지으신 야훼 하나님 뿐이시다 라는 것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본문은 그것을 아주 확실한 언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그 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었습니다.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모든 피조물들을 더욱 세차게 뒤흔들어서 없애 버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히 12:26-27)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이 세상이 이토록 끊임없이 흔들리고 쉬지 않고 진동하는 그 이유를 우리는 알았고 또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즉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 4
들리면서 피었나니”라고 말하는 이 세상의 그 불가역적 진동성(震動性)의 진원지와 그 진동의 이유와 까닭을 이제야 우리는 명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해 오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깊은 뜻이 계셔서!!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친히 뒤흔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2)로 그분께서 그렇게 이 세상을 그토록 쉬임없이 흔들고 계시는 그 이유와 목적도 또한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두가지인데 그 하나는① 흔들리는 것들을 흔들어 없애 버리시는 것이고 그 둘째②는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흔들리는 것들”은 희랍어로 “살류오메나”(σαλευόμενα)이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메 살류오메나”(μή σαλευόμενα)인 데, 주목할만 하게도 이 “살류오메나”를 없앤다라고 할 때 희랍어 원문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언어를 하나 더 끌어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희랍어로 “메타데시스”(μετάθεσις)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removal”이라는 뜻도 있지만 “change”라는 뜻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변화”를 통하여 “흔들리는 것들”을 “흔들어 없앤다”는 것이 “흔들다”라는 말의 희랍어 원문이 갖고 있는 본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더 주목할 만한 부분은 “흔들리는 것들”을 없애는 목적을 설명하는 말인데, 그것을 원문은, “변화”(μετάθεσις)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한번 더 분명하고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하여”(έτι άπαξ δελόι; 에티 하팍스 델로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흔들리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또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 창조적 본질에 의하면, 본질상, 흔들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흔드시는 것은 “변화”를 통하여 흔들리는 것들을 흔들어 없애시어 우리의 본질을 “한 번 더 분명하게”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 흔드시는 첫번 째 목적이고 둘째는 그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살아 남아 있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흔들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흔들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라는 광고 문구가 우리의 실존적 현실을 제대로 잘 반영하는 말로서 우리 사이에서 널리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것은, 본질상 흔들리게 되어 있는 이 모든 피조물의 “흔들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흔들림”을 단순하게 그저 허무주의적 관점에서만 읽으면 우리의 세상은 것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통한 우리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바로 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하겠습니다. 흔들릴 것은 흔들어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도 이미 감각적으로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곪아 터진 병균을 그냥 끌어 안고만 있다면 그 종말은 매우 신속하게 우리에게 덮쳐 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흔들릴 것은 분명 흔들어 없애 버려야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또한 영원히 남아 있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또한 우리가 시급하게 정면대결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그런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시급하다”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쓰는 것은, 흔들리면서 변화해 가는 이 인간 실존의 “흔들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를 “흔들며” 지나가기 때문에, 즉 백발(白髮)은 비록 인생의 면류관(잠 16:31)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우리를 찾아 오고 또 너무나 빠른 속도로 우리를 변화의 파고(波高) 속으로 끌고 들어 가기 때문에 그렇습 5
니다.
제가 김정준(金正俊) 교수님 밑에서 구약을 공부할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그분에게 야단을 맞으며 연세대학교에서 석사논문을 쓰든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분이 가신지도 벌써 25여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젊은 애숭이였던 제가 벌써 교수직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다고 하니 그 누가 이 세월을 빛의 속도에 빗대어 “일촌광음”(一寸光 陰)이 “불가경”(不可輕)이라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꽃들도 흔들리면서 자라고 피어 나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네 인간들이 감히 무슨 재주로 흔들리지 않고 우리 인생의 꽃을 꽃피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늙을수록 곱고 아름다워지고 더 부드러워지며 더 너그럽고 더 관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분노를 하는 것은 기름 통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 드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우리는 “어떻게?”라는 문제 앞에 겸손한 자세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본문인 시편 102편 23-28은 다음과 같이 매우 차분한 언어로 담담하게 아마 andante 보다는 조금 빠르게 andantino의 노랫 가락에 맞추어 천천히 흐르는 시냇물의 물흐름처럼 다음과 같이 인생을 관조하고 있었습니다: “아득한 그 옛날 우리 주님 야훼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빚어 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지으시되 흔들리면서 사라져야 할 것들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야훼 우리 주님 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 모든 흔들리는 것들은 모두 마치 옷처럼 낡아지겠지만 우리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흔들리면서 지나가 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나, 야훼 우리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 주님 야훼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돌리며 그리고 우리가 감히 주님을 믿는 주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에 대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사의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주의 종들은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 시간이 지닌 파괴력을! 이 세월이 지닌 파괴력을! 능히 극복하며 평안히 살 것이며 우리의 자손들도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102:23-28). 이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 언어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긍지(矜持)가 이리도 위대한 줄은 정말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그 어떤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는 일없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이 대 명제에 대하여 결코 그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하여야 할 오직 한마디 말은 오늘 읽은 우리의 신약성서 본문의 그 결론부가 말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은 말의 응답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영존할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 래서, 경건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