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사무엘 상 17: 47-50; 마태 26: 50-54

설교문

    오늘 우리 시대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종교적 신앙을 빙자한 “테러리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온 세계가 이 문제를 치유할 아무런 대안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아랍권의 테러리스트들이 자주 인용하는 종교적 용어인 “지하드”(jihad) 논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기독교 문화권이나 기독교 신학이 별 뚜렷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특히 이번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정규 신학대학원을 나온 전도사 김선일씨 살해사건에 대한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자기변호의 논리는 “기독교는 이교이고 이러한 이교를 신앙하는 기독교도는 무신론자이며 이러한 무신론자의 선교활동은 마땅히 살인으로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 살인은 유일신 알라를 위한 것이므로 정당하다”라는 논리입니다. 물론 일간신문에 기사화된 이 기사문 자체가 매우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중동의 유일신 이론을 여과없이 전하고 있어서 다소 논리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고는 보지만, 그 신문 기사문(중앙일보, 2004. 7. 16)이 말하려는 의도와 그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사문에 대한 시비는 여기서 각설하고 현재 이 시점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여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성격의 “지하드” 논리는, 실상은, “알라 신”의 뜻과도 위배되는 반(反) 코란(Coran= Koran)적인 성격의 잘못된 “힘의 논리”에 근거한 사상이라고 보야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또한 나타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란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라는 위협에 못지 않게 기독교 문화권도 또한 “바이블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라는 위협을 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팍스 로마나” 논리나 “팍스 아메리카나” 논리의 배후에도 이러한 패권주의적(覇權主義的)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논리의 배후에는, 분명, 자기네의 “경전”(經典)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를 잘못인줄도 모르고 그것을 극대화한 종교적 모순이 작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알라 신은, 코란경을 통해서 보면, 결단코 전쟁의 신이거나 테러의 신은 아닙니다. 오히려, 알라신은, 코란 경(經)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자비의 신이요 긍휼의 신이며 평화의 신입니다. 이 경우는 만군의 야훼 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그럼에도, 무슬림의 테러리스트들은 알라 신을 전쟁과 복수의 신으로 전락시키는 신성모독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뒤질새라 우리 기독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드라큐라와 같은 악귀를 내쫓는 십자가 부적(符籍)처럼 생각하고 이 십자가를 방패삼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잘못을 자행하는 그 배후에는 아마도 구약의 하나님 야훼를 전쟁의 신 또는 복수의 신으로 잘못 이해하는 구약성서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가 다분히 작용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은 지중해 연안을 장악한 서구 철기문화의 전위병인 불레셋의 장군, 일명, “골리앗”이라는 절대 무적의 장수를 “다윗”이라는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 목동이 무릿매 돌 하나로, 세칭, 물맷돌 하나로 물리쳐 격파하였다는 줄거리의 한 토막 전쟁설화입니다. 비록 성서 해석가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견해는 아니지만, 그러나, 대체적인 합일을 이룬 견해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서, 소위 말하는, 거룩한 전쟁[聖戰; Holy War] 설화에 속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인 새번역 성서의 본문은 번역자가 자기 주장에 따른 의역을 너무 많이 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가 매우 잘못되게 해석될 소지가 있어 보여서, 제가 원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그 본문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 본                                 2
문은 다윗이 불레셋의 골리앗 장군과 그의 불레셋 병사들, 그리고 이를 지켜 보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와 백성들 앞에서 다윗이 행한 일을 묘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보라, 야훼의 구원하심은 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창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모인 이 모든 회중이 알기를 원하노라.  전쟁은 야훼에게 속한 것이므로 그 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라고 다윗이 외치자, 불레셋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다윗에게로 달려 나왔다.  이 때, 다윗이 그 불레셋 장수의 정면을 향하여 빨리 달려 나가면서 손을 주머니에 넣어 물매 돌을 하나 꺼내어 그것을 물매로 던져 불레셋 장수의 이마를 치니 그 물맷돌이 그 장수의 이마에 박히자 그 장수가 곧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물맷돌로 불레셋 장수를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그러나,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삼상 17: 47-50). 이것이 이 장면에 대한 묘사의 전 모습입니다.
    이 본문의 상황은 어느 모로 보든지, 실전(實戰)의 상황은 아닙니다.  우선, “온회중”이라는 말의 히브리 말 “הזה  להקה(학카할 핫쩨)”라는 말은 분명히 예배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지 전쟁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서술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쟁의 진행은 급속도의 매우 빠른 탬포로 진행되어 승패가 순식간에 결정나고 철기 무기를 사용하고 있든 무적의 불레셋 장수 골리앗(삼상 17:23)이 청덩기 시대에도 들지 못한 미개발국의 한 소년 목동이 던진 물맷돌 하나에 맞아 이토록  맥없이 무너져 패배를 당하고 그 용맹스러운 불레셋의 군대들이 졸지에 모두 몰살을 당하였다고 하는 이 문학적 과장법은 분명코 이 본문의 상황이 실전의 상황이 아니고 옛 사건을 먼 후대의 예배의전에 맞도록 문학화한 예배적 상황임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예배 드라마(cultic drama)의 상황이라고 부릅니다만, 이 전쟁보도의 마지막 장면은, 기이하게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물맷돌로 장수를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그러나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3
(삼상 17:50)라고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의 모든 상황은 이 보도가 실전(實戰)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이 보도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 온 전쟁에 관한 옛 전승을 예배의전을 통하여 신앙고백적으로 재(再)설명하고 재(再)해석하여 설교의 형태로 재연한, 또는 re-telling한 신학적, 교훈적 진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약 본문은 먼 후일 이스라엘의 과거구원사를 예배의전을 통하여 신학적으로 해석한 글임이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의미는 전적으로 거기 모인 예배회중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려고 하느냐 하는 것을 바르게 밝혀낼 때에만 비로소 그 의미가 밝혀지는 그런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본문의 성서기록자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진술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① 구원은 칼이나 창과 같은 무력으로, 즉 힘의 논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그 둘째는② 전쟁은 하나님의 고유한 하나님의 비지네스(Business)이므로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테면, 전쟁은 하나님의 고유의 일이므로, 즉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신의 고유의 영역이므로 인명살상을 주요 업무로 하는 전쟁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신의 고유한 비지네스(business)이므로 인간이 거기에 손을 대서 전쟁을 알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그 셋째로는③ 이 보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일반적으로 예배의 결론은 “송영”인데, 이 전쟁보도의 송영은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격파하여 쳐 죽인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דוד־דיב   ןיא  ברח)라는 것을 온 회중에게 알리고 화답을 받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칼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이 본문이 갖고 있는 예배적 선포의 “결론”이었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 모든 성서보도의 목적은 인간들 사이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God's business)이므로 하나님에게로 돌리므로서 인간역사로부터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요구하는 신의 요구를 온 회                                 4
중에게, 즉 온 성도들에게 선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룩한 이스라엘의 구원에는 칼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칼로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에 의해서 망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원전 1000년경,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기문화의 선각자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중해를 건너 와서 가나안 서해안에 자리를 잡고는, 즉 가드, 가자, 아스글론 등지를 거점으로하여 팔레스틴 전토를 장악하여 지배할 때, 다윗이 고도의 전락전술에 의하여 이 절대무적의 서구 거인들의 위협을 꺾고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가나안 땅에 건설하는데 성공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린 소년 다윗이, 즉 투구와 갑옷이 너무 크서 그것을 입고서는 걸음조차 한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나이 어린 소년 목동인 다윗이(삼상 17:39) 투구도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무기라고는 양몰이할 때 사용한 물매와 물맷돌 하나 만을 가지고 저 거대한 서양 거인들, 즉 놋투구를 머리에 쓰고 온 몸은 5000세겔의 무게가 나가는 놋으로 된 비늘 갑옷으로 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600세겔의 무게가 나가는 그런 무기를 들고 앞에는 방패를 든 병사들을 앞세우고 돌진해 오는 그 군대를 한 순간에 격퇴하여 장수의 목을 잘랐다는 것은 어떠한 고고학적 자료나 그 어떠한 역사사료 속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비(非) 역사적 자료로서 어디까지나 후대의 예배 의전에서 회중들을 향하여 이 전쟁은 <신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힘의 논리로서 전쟁의 승리와 구원을 쟁취하려는 것은 신의 비지네스를 침범하는 신성모독적 행위라는 것>을 교훈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고대 예배의 설교자료라는 것 즉 문학적 과장법을 극대화하여 옛 사건을 재(再) 진술(re-telling)한 설교문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성전(聖戰), 즉 거룩한 전쟁은 전                                 5
쟁을 하나님의 고유한 비지네스로 돌려서 인간으로 하여금 전쟁에 손을 대지 말게 하려는 것, 즉 전쟁을 터부(taboo)시(視)하려는 평화논리에 기초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구약성서가 갖고 있는 신의 전쟁설화들 대부분은 세밀한 주석적 분석을 통하여 검토해 보면, 그 모든 자료들은 모두 후대의 신학화에서 온 산물(産物)이고 그 신학화의 자료가 말하려는 교훈은 전적으로 전쟁을 하나님께로  돌리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전쟁에서부터 손을 떼게 하려는 반전이념(反戰理念)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다른 예를 든다면, 홍해 사건과 여리고 점령에 관한 성서의 보도를 들 수가 있습니다.  홍해 사건을 보면, 그 상황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까지 당도하였으나 뒤따라 온 애굽의 정예군들이 질풍처럼 그들 행열의 후미로 들이닥치고 있었습니다. 사면초가가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을 때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단지 이것 뿐이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 말씀이 선포된 후, 이스라엘이 이 곳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리고 여기서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가 한 일도 단지 지팡이 잡은 손을 바다 위로 내미는 동작을 두 번 시행하여 흐르는 바닷물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여 물벽을 쌓게 하는 일과 다시 손을 바다 위로 내밀므로 바닷물을 원상회복시켜 바닷물이 애굽군대를 덮치게 한 일, 그 기적적 행위 밖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이 사건의 기록의 중심점은 단지 이스라엘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즉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야훼께서 너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하나님 만을 절대 신뢰하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을지니라”라는 예배의전적인 말씀 뿐이었습니다.
    여리고 성 점령에 관한 여호수아서 6장의 기록도 마찬가지의                                  6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저 거대한 여리고 성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사건은 전적으로 군대 행열을 앞세운 나팔수 제사장들과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행열이 그 성을 하루에 한 번씩 6일 간 돈 후 제7일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고 난 후, 일제히 나팔 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더니 그 견고한 성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자료와 함께 이 사건보도는 먼 훗날 예배의전에서 행한 예배극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도 문제의 초점은 전적으로 예배의전을 통하여 가나안주의의 우상 즉 바알주의의 우상을 철저히 도말하라는 야훼의 계율을 선포하는데 있었던 것임이 확실합니다.
    이러한 성서 해석학적 맥락에서 보면, 서기 2세기 경에 출현한 이단자 마르시온(Marcion)이 생각하였던것처럼 그렇게 구약의 하나님을 전쟁과 복수의 신으로 보려는 모든 노력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코란 경이나 이스라엘의 히브리 경전 즉 구약성서 그 어디서도 성전(聖戰) 즉 거룩한 전쟁에 관한 기록을 십자군 전쟁의 논리나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리즘적 논리를 정당화해 주고 있지는 않는다 하겠습니다. 단지 그것은 반(反) 경전적 신성모독이요 종교적 죄악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구약 경전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하기를, “전쟁은 나의 것이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이른 바, 생사여탈권을 쥔 나에게로 돌리고 너희 인생들은 전쟁을 그쳐라”라고 외치실 뿐입니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신약성서를 통하여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만 외치셨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경고하시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전쟁을 그칩시다.  싸움을 그칩시다.  그 어떠한 종교논리로든 간에 전쟁을 정당화하고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힘의 논리는 경전모독의 논리요 성서해석학을 파괴하는 경전파괴적 논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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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그칩시다.  싸움을 그칩시다.  칼을 거둡시다.  활과 창을 거둡시다.  이사야와 미가 예언자들이 절규하며 호소하였듯이, 칼을 쳐서는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는 낫을 만듭시다(사 2:4; 믹 4:3). 각 사람이 모두 자기가 경작한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가 가꾼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아서 아무런 외부 침입의 위협을 느끼지 아니하고 두려움없이 평화롭게 자기가 가꾼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며 사는 그런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갑시다.  싸움을 그칩시다. 미움과 반목을 거둡시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골리  앗 장수를 격파한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하드” 논리를 아전인수격으로 곡해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반드시 회개하고 그들의 경전에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전쟁” 논리를 기독교 포교의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 선교라는 미친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또한 어서 속히 회개하고 자신의 경전인 성서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도 읽지 않고 성서의 가르침을 현재화하는 케리그마의 선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단지 교회 마당만 밟으면서 제도적 교회의 사유화에만 혈안이 된 기독교 지도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감히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적의 장수 골리앗을 쳐 부순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라는 성서의 선포 앞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기독교교인이 됩시다. 반목, 질시, 증오, 싸움을 계속하면서도 자신을 기독교교인이라고 위선을 떨며 자신을 속이지는 맙시다.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라는 성서의 결론적 언어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입시다.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자처는 하면서도 왜들 그렇게 손쉽게 걸핏하면 손에 칼을 잡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힘의 논리가 판을 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칼을 사용하여서는 안됩니다.  이 명제 앞에서는 너․나 가릴 것 없이 복종하여야 합니다.  “칼을 가슴에 품는다”라는 표현                                 8
의 은유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칼을 가슴에 품고 살아서는” 그는 사이비 기독교인이지 참 기독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뿐 만은 아닙니다.  칼을 가슴에 품고 살아서는 가정도 안되고 교회도 안되며 사회도 안되고 국가도 안되며 세계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성서는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3편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눈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을 지켜 주시며,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사모하는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들의 목숨을 죽을 자리에서 건져내시고 굶주릴 때에 살려 주십니다.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오 우리의 방패이시니 우리는 야훼 하나님 만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오직 그의 거룩한 이름 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그분 때문에 기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나이다. 야훼,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시 33:16-22)
    이 시인의 신앙고백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 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이 야훼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신명기 기자가 분명한 언어로 말하였듯이, “우리로부터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주신 말씀 안에 계시므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신 4:7-8).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해 내시고 그의 신비하신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그 창조주 야훼 하나님 그분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인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 “말씀”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지 결단코 칼과 창과 활이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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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구원의 말씀을, 이 생명의 말씀을 외면하고 그 대신 자기 지식과 자기 힘에만 의존해서 교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랍 테러리스트들도 하루 빨리 그들의 경전에로 돌아가야 하지만, 오늘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교도들도 하루 속히 우리의 경전인 성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라고 성서는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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