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전도서 3:16-19,
마태복음 16:24-25; 요한복음 12:24-25
설교문
전도서를 기록한 구약성서 기록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하는 매우 파격적인 신앙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인생의 수고가 그 어느 것 하나 헛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 모든 만물이 다 피곤을 느끼며 세상 살 맛을 잃고 있는 것은 사람이 인간의 언어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구나. 눈은 보아도 만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충분함이 없도다 ... 아,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은 새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랴”(전 1:2,3,8)라고 전도서 기록자는 인간의 허무성에 관해서 진솔하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에서도 전도자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을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으니, 부득불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하실 수 밖에 없도다. .... 인생이나 짐승이 모두들 똑같이 허무하게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도다. 이 일에 있어서는 모두가 일반이니 다 동일한 호흡을 갖고 있어, 짐승이 죽는 것 같이 사람도 또한 그렇게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더 나은 것이 없구나. 왜냐하면,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서 기록자의 이러한 현실판단은 분명 옳았던 것 같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실제로, 본래부터!, 허무하게 만들어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흙으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허무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영원불멸한 존재로 지으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긴 하지만, 그 1
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신으로부터 특별히 물려 받은 그 어떤 신적(神的)인 본질 같은 것을 부여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은 결코 神(신)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아니라 단지 神(신)이 창조하신 신의 피조물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부터 유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기뻐하고 슬퍼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웃고 울고, 건강하고 병들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피조물, 자연의 한 일부로서 자연의 리듬에 따라 生成(생성)消滅(소멸)하게 되어 있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존재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고 죽으면 또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겨울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시간”이라는 굴레 안에 얽매여 사는 존재입니다. 시간을 초월하거나 시간을 이겨낼 壯士(장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인간은 허무하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허무하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正常(정상)”이라 하겠습니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그러므로 하여,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다 각기 주어진 “한 평생”[一生]을 사는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물론, 희랍 철학은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다”라고 주장하였고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이 희랍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서는 결코 인간을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래부터! 허무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가르쳐 왔으며 그러므로 그 허무하고 유한한 인간의 “부활” 즉 몸이 다시 사는 것!에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강력히 증언하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신조 맨 끝부분에서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해 온 바로 그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성서적 신앙이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성서적 이해”를 정직하게 받아 들이고 솔직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그 무엇보다 먼저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성서는 결 2
코 인간을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 때부터 결단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타락하기 이전에도! 인간은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래부터 본질적으로 영생하는 불멸의 존재로 창조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잘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우리 기독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게 받아 들이는 그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때 부여받은 “한 평생”[一平生]을 사는 유한하고 평범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바, 하나님의 창조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본질은 처음부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허무”의 본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멸을 주장하는 이단종교의 헛된 교리나 희랍 철학의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관념적인 영혼불멸에 관한 가르침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신앙에 기초한 우리 기독인들은 모름직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이 지닌 유한성과 허무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러한 진솔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허무를 이겨내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성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지하게 살펴 보아야 하리라 봅니다.
전도서 기록자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라는 사실을 솔직하고도 거짓없이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허무”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허무” 앞에는 특별한 壯士(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무 앞에는 특별한 영웅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병들고 누구나 피곤해 지고 누구나 늙고 누구나 그 일생을 다하면 죽고 3
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모두 다 궁극적으로 는 다 바람을 잡는 것 같은 허무한 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수고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매우 보람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본래 “허무”이기 때문에 그것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그 보람되고 뜻깊은 그 수고 조차도 또한 자주 휴식 없는 밤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전 2:23).
사람이면 누구나 먹고 마시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을 바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시간이 흐르면 그 모두도 또한 다 바람을 잡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전 2:24-26)입니다. 많은 재능을 가지고서 사회적 공헌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많은 덕을 베풀기도 하였다 할찌라도 엄밀히 살피면 그 일도 또한 이웃으로부터 많은 질투와 시기를 받는 갈등을 초래하게 되어 있고 이 일도 또한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전 4:4)입니다. 재물을 많이 쌓는 일은 많은 사람의 희망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오히려 잠을 달게 잘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되므로 이것도 또한 엄밀하게 따지면, 허무하고 바람을 잡는 일(전 5:10-12)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는 왕의 자리에 오른다고 할찌라도 왕좌도 대통령의 대권 권좌도 물러나 뒤를 돌아보면 그 모두도 다 헛되고 허망한 일일 뿐이라는 것(전 4:15-16)입니다. 심지어는 만수무강의 장수 축복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결말은 결국 고통과 죽음 뿐이니 차라리 낙태된 자가 더 행운이라고 할만큼 만수무강의 복도 결국은 지내 놓고 보면 그것도 또한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일 뿐이라는 것(전 6:3-6)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지혜자들은 앞을 다투어 말하기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전 6:8)이며 따라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오히려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났다(전 4
7:2)고도 말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멸망하는 의인도 있고 자기의 악행 때문에 장수의 복을 누리는 악인도 있는 기상천외이 일도 발생한다는 것(전 7:15)입니다. 모든 것은 유한하고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으니 허무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90수도 살고 100수도 살아 만인이 입이 마르도록 그 장수를 축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종래는 끝을 맞이하게 되어 있고 그 끝이 이르면 100수를 살아도 사람은 슬픔과 허무를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인간의 본질은 본래부터 허무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가련하고 불쌍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기자가, 특히 전도서를 쓴 이 성서기자가 이토록 절실하고도 진솔하게 인간만사가 모두 다 허무하고 아예 인간의 본질이 본래부터 전적으로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갈파하였을 때, 그렇다면, 우리 허무한 인간들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불교는 모든 삼라만상엔 영원히 순환하는 業報(업보)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욕망을 제어하고 업보의 순환에 자신을 맡겨서 解脫(해탈)의 涅槃(열반) 世界(세계)로 들어 갈 것을 권유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경전은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즉 허무한 인간들이 어떻게 그 허무를 극복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직 다음과 같은 말씀 만으로 대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모든 허무한 인간은, 비록 그들이 허무함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허무하게 하신 그 분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라고 대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허무가, 실로,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미! 허무하게 창조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이토록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허무하게 만드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씀함으로 5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허무를 창조하신 분, 그 분 앞에 겸손히 그리고 솔직하게 직면해 서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허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피할래야 도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허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중심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즉 우리가 반드시 선택하여야 하는 그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중심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대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1) 구얄성서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전도서의 마지막 장인 12장 1-2절은 우리의 물음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前(전)에, 나에겐 아무 낙도 없구나 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 때가 가깝기 前(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前(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前(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허무를 창조하신 그 분 만이 허무를 극복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허무가 우리를 삼키기 前(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종, 結者解之(결자해지)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에게, 죽음의 문제는 죽음을 창조하신 분에게 맡겨서 문제를 풀어라는 것입니다. 福(복)의 문제는 복을 창조하신 분에게, 禍(화)의 문제는 화를 창조하신 분에게 맡겨서 문제를 풀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의 문제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에게 맡겨서 그 문제를 풀어라는 것입니다. 貧富(빈부) 문제의 해결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분에게 맡겨서 풀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는, 실로, 이 땅을 창조하신 그 분께 맡겨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피조물이 아 6
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우리 인간은 무궁하지 않기 때문에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허무를 창조하신 그 분에게만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기록자는 허무에 직면하기 전에 허무를 창조하신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이러한 성서논리가 의미하는 바는 과연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신약성서는 마태복음 16:24-25에서 그리고 요한복음 12: 24-25에서 이 물음에 대하여 각각 이렇게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 16: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 어져 죽지 아니 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 으리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 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한 12:24-25)
그렇습니다. 이 신약의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는 구약의 문맥에서 볼 때 더욱 분명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그 자기를 자기 희생의 십자가에 매어 달 때 오히려! 자기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창조하신 분에게 자기 생명을 내어 맡겨 버릴 때 비로소! 자기 생명을 영원히 도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영원히 사는 길, 영원히 열매를 맺는 길은 오직 그 한 알의 밀알이 자기를 땅에 던져 그 땅에 자기를 묻는 길, 자기를 땅에 맡기는 길, 즉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를 내어 맡기는 길, 그런 후 새 창조 즉 부활을 기원하는 일, 그 7
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그 만들어 진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미래는 전적으로 인간을 이 땅에 있게 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허무 한 것이지만 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그 분 만은 그 허무를 제거해 주실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헛되지만! 그러나 헛되지 않은 오직 하나는!! 단지 허무를 창조하신 그 분, 창조주 하나님 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진리에 자기를 복종시켜서 비로소 허무를 극복하는 길을 모범적으로 제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석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것이 바로 신약의 히브리서라고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9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잠시동안 스스로 낮아지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시게 되신 저 예수를 바라 보라! 이를 행하심은 우리 인간들에게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알려 주시려 하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1-3도 또한 우리에게 위와 동일한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자. 그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서는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이토록 참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구약 성서 본문이 증언하려는 바의 결론은 <모든 것은 헛되지만, 그러나,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허무하게 하신 그 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그 일이다!>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8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자기를 복종시키고 일치시켜서 자기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허무를 극복하려면 우리를 허무하게 하신 그 분에게 우리 자신의 허무를 내어 맡겨서 그 허무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무한 본질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는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허무합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허무합니다. 허무하고 허무하며 허무하고 허무함으로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허무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허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무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가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헛되지만, 또 모든 것이 반드시 헛되어야 하지만, 우리를 허무하게 하신 그 분, 창조주 하나님 만은 허무의 존폐를 관장하시는 분이시므로 그 분 만은 결코 허무하지 않으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고 하겠으며,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능히 그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무를 창조하신 분 만이 홀로 허무를 제거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창조하신 분 만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러므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허무를 겸손히 그리고 정직하게 받아 들이고 그 다음 그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그 허무를 극복해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허무하지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그 허무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헛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능히 그 모든 헛된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