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누가복음 16:19-31

설교문

    오늘 설교의 중심주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관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가르칠려는 중심적 교훈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서 많은 성서 해석가들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대답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즐겁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었던 “부자”와 그리고 이 부자의 집 밥상에서 떨어진 찌꺼기로 겨우 연명해서 살던 “거지”가 다 함께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었는데, 그러나, 그들이 죽어서는 그 처지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처했었던 그 형편과는 전혀 판이하게 달라져서 “부자”는 오히려 죽음의 세계의 불꽃 속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반면에 “거지”는 오히려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상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안을 받게 되었다는 그런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죽음 이후의 저 세계에 나타난 뒤바껴진 운명 앞에서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부자는, 상류층의 지식인 답게, 섬광처럼 번쩍이는 예지를 가지고, 천상의 아브라함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매우 인간적인 요청을 드려 봅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저 나사로를 제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저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어, 즉 저      승을 다녀 온 자의 생생한 저승 소식을 들려 주는 그런 쎈세이셔날한 방법을       통하여 아직도 지상에 남아 있는 저 나의 유가족들 만이라도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하여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얼마나 다행      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것은 저의 최후의 소원입니다.
실로, 이 부자의 호소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또 감히 신학적인 지성마져 섬광처럼 번떡이게 하는 호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이 소청에 대해서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자여,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       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은 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는 남다른 쎈스를 가진 상류층 지성인이므로 아브라함의 이 말에 대하여 당장 반론을 펴고 재청원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 만으로는 안됩니다.  요즈음 세상에 모세의 가르침과       예언자들의 가르침 정도로 회개하고 인간변화를 일으킬 지성인이 도데체 어디       있습니까?   훈계니 설교니 하는 그런 것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       들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일 따위는 정말 하기 싫       어합니다.  그것이 인간 실존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상류층의 지성인       사회일수록 더 더욱 그러해서, 모세의 말과 예언자들의 경고 따위로서 인간변       화를 시도하려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세상을 모르는 매우 나이브한 발상       입니다.   제발, 다시 말씀 드리오니 이 말씀을 들어 주소서.  세상에 남아 있       는 저들은 정말 너무 완고해서, 모세의 말과 예언자들의 경고 따위로서는 끄       떡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사람”       이 즉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는 그런 엄청난 충격적 사건을 통해서라야만 비       로소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반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 부자는 놀라웁게도 기독교 신앙 최대의 쟁점인 “부활신앙”을 걸고 아브라함과 시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이라면, 능히, 부자들 사회의 의식구조를 변화시키는 일 쯤은 이룩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이라면, 능히 고질적인 지식인 사회의 “이기주의”라는 의식 구조 쯤이야 자신있게 변화 시킬 수 있으리라는 이 부자의 신념이야 말로  바로 우리네의 기독교적 신앙이 갖고 있는 세계 선교의 가장 자신있는 대안(代案)이기도 한 것이 아닙니까?  죽은 자의 부활사건, 그것은 기독교적 복음의 최후 보루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는 여기서 바로 이 복음주의 최대의 무기인 부활논리를 끌여 들여서 아브라함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본문의 결론부에서 아브라함은 매우 단호한 어조로서 저 부자의 항변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맙니다:
     부자여,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만일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       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다고 해도 저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는 부활신앙의 충격보다도 오히려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 즉 성서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그 일이 우리를 보다 더 확실하게 구원의 길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진실로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부활 사건의 비젼 보다도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것이 인간변화와 인간구원에 보다 더 근원적이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실로,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의 본문을 통하여 오히려 현세와 내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의 가치의 뒤바뀜의 의미만을 읽어낼려고 할른지도 모릅니다.  즉 현세에서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산 자들은 내세에서는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을 살게 되고 또 현세에서 천대받고 가난한 고통의 삶을 산 자들은 내세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위안을 받는 평화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칠려는 것이 우리 본문이 가르칠려는 교훈의 중심이라고 주장할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본문의 핵심 2
부분에서 아브라함 조차도, 저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보게, 그대는 살아 생전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여기 이 거지 나사로는        불행이라는 불행은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안을 받       고 있고 그대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여기서부터 일종, “부자에게는 없는 <가난한 자의 부활>”이라는 매우 특수한 종교이념을 발견해 내려고 할른지도 모릅니다.  분명, 이 지상은 실제로 지배계층의 부조리한 악행과 그리고 억압받는 피지배자의 억울한 고난의 삶이 불타협의 긴장관계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그런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사무쳐 있는 고통받는 자의 한이 죽음 후에나마 가슴 벅찬  환희로 운명전환 되기를 우리 모두가 또한 염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세주의적 희망과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이원론적 운명전환에 대한 신앙에 그 전 운명을 거는 신앙이 바로 성서적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의 정신세계를 전혀 외곡하고 있는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세계관은 결코 이원론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보는 세계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구원사(救援史)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성서의 사상세계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결코 이 세계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그 기본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현세와 내세의 삶의 가치의 뒤집힘과 그리고 인과론적인 보상사상을 가르치므로서 현재 여기서 고난받는 자는 내세에서는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는 그런 내세주의적 희망을 증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그런 것이 만일 아니라면, 우리의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복음의 진정한 핵심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우리 본문의 결론부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아브라함의 입을 통하여 증언했던 그 말씀, 즉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       지 않는다면! 죽은 자의 부활사건을 가지고 설득시킨다고 해도 복음은 진정으       로 받아 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만 일관되게 대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마지막 선언 속에는 다음 두 가지의 증언이 들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첫째는 (1) 인간변화, 회개, 구원 등등의 인간 구원의 사건이란 부활 사건과 같은 그런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도 결코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은 “지극히 어려운 사건”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둘째는(2) 인간구원의 성취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엄청난 가시적인 기적의 효과와 같은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고, 단지! 모세의 말과 예언자들의 말 3
을 듣고 실천하는 그 곳에서만, 즉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세의 말씀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인격적 변화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그 곳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를 통한 인간변화, 그것은 이루어지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조차도 그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루면서까지도 이루어내기 힘들어 하셨던 그런 어려운 사건이 바로 인간변화입니다.  성서는  회개하기가 쉽지 않는 이러한 인간현실을 “목이 곧다!” “음난하다!” “무지하다!” “어린 아이가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함께 가슴을 치며 울어 주지 않는 현실!” 등등의 말로 묘사하였습니다만, 실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인간 현실은 회개를 통한 인간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우리의 성서본문은 이것을 가리켜서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도 인간변화의 구원은 이루어 내기가 어렵다”라는 말로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선교는 이 사실을 솔직하고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 조차도 인간변화의 구원은 이루어 내기가 어렵다”는 이 선언!! 그리고 “인간변화의 구원은 오직 모세의 말과 예언자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그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 선언은, 결코 그 무슨, “그런 일이란 너무 어려워서 인간으로서는 그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제 그토록 어려운 <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따위의 노력> 같은 것은 아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입으로 시인하고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그런 속편한 교회교리를 받아 들이는 그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선결과제다”라는 식으로 말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실현이란 부활사건의 화려한 종교적 시위 따위로서는 결코 안되고, 단지, 오직 단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 일을 통하여서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실로, 다음 몇 가지의 허구적인 잘못된 생각을 내어 버리라는 것과 그리고 그런 잘못된 생각과는 대조되는 전혀 다른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구원의 길이 비로소 열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주장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버려야 할 잘못된 신념들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죽운 자의 부활과 같은 그런 그 어떤 놀라운 종교현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종교적 환상주의!/ 내세에 대한 분명한 가시적 보상이 있어야만 신앙을 가지겠다는 생각,/ 교회를 그 무슨 기업처럼 생각해서 이윤관계를 따져서 그 무슨 가시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치적인 그 어떤 이득이 있어야만 교회생활을 하겠다는 생각,  등등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모든 신념과 사고(思考)를 가리켜서 “종교폭력”이라는 좀 과격한 용어를 쓰4
서 표현하고 싶습니다만, 특히, 신앙을 그 무슨 기업체 운영하듯 생각하는 모든 종류의 사고(思考)와 신념은, 여기 불꽃 속에서 깊은 회한에 잠겨 있는 저 부자의 논리와 명백하게 직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은 간 곳 없고! 제도적 교회의 종교형식에만 집착하고 있는 이 본말전도의 부조리가 오늘의 현실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건의 내용은 없고 경건의 형식만 있는 교회,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에는 완전히 귀를막아 버리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서 증언하는 그런 신비한 종교현상으로 압도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신앙태도, 그리하여 마음 푹 놓고 천국의 유무도 내가 결정하고, 하나님의 실재 여부도 내가 결정짓는, 이른 바, 회개를 통한 인간변화의 필요성은 전혀 가지지 않는 유형의 신앙,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과감히 내어 버려야 할 잘못된 신앙유산이요 철저히 청산해야 할 반(反) 기독교적 신앙유산이라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강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곳에서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뿐이라고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 와 말을 하는 그런 깜짝 놀랄만한 종교       환상주의를 통하여 가는 길은 오히려 “노우”(No)!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들       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그 일을 통하여 가는 길은 “예스”(Yes)!
     형식종교의 절묘하고도 고차원적인 제도적 종교를 통하여 가는 길은 “노           우”(No)!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와 인격변화를 일으키       는 그 일을 통하여 가는 길은 “예스”(Yes)!

이러한 두 길의 절대적 불타협의 차이, "예스“와 ”노우“의 차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은 바로 이 둘 사이에서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실현은 진리의 말씀이 거기에 있고 그 말씀을 통한 인격변화가 일어나는 곳!  말하자면, 화려하고도 가시적인 종교현상이 허구적인 약속을 하고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결단이 있는 곳, 거기에만 비로소 하늘나라의 실현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부활사건으로서도 불가능한 저 인간변화의 구원사건이 단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그 일로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의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 무슨 그렇게 어렵고도 심오한, 그리고 철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진리를 열심히 배워서 지식축적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은 물론 결코 아닙니  5
다.  그것은 오히려 매우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를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구원의 길은 그렇게 그 무슨 심심산천의 그 어떤 깊은 계곡에 감추어져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칸트나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그런 위대한 선각자들의 인생철학을 다 통달하여야만 발견되는 그런 길은 결코 아니라는 그런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길, 그 구원의 길, 그 인간변화의 길은 단지 모세와 예언자들이 들려 준 그 구원의 기본적이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그 길 이외에는 다른 아무 길도 아니라는 그런 말입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30:11-14도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       니다!  그것은 결코 하늘에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라  ... 오직  그 말씀은 네게 심히 가까워서        바로 네 입에 있으며 바로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능히 이를 실천할 수 있느       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는 길입니다.  언젠가 “코리아 헤랄드”(1998.1.13)의 “앤 랜더즈 칼럼” 란에는 <나는 그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꼭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내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내가 꼭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내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이다  “지혜”라는 것이 그 무슨 수준 높운 대학원 교육의 상아탑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유치원에 있는 “샌드 박스”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유치원에서 내가 배운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1. 모든 것을 혼자서만 가지려고 하지 말고 서로 나누어 가져라.  2. 모든 플레이는 공정하게 하여라.  3. 친구를 때리지 말아라.  4. 네가 주운 물건은 제 자리에 돌려 놓아라.  5. 네가 먹은 그릇은 네가 스스로 깨끗하게 씻으라.  6.  네것이 아닌 것은 가지려고 하지 말아라.  7.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으라.  8.  균형있는 생활을 하여라.  9.  밖에 나가면 교통신호를 잘 지키고 서로 손을 잡고 길을 건너며 서로 도와 주어라.  10.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러한 말을 쓴 그 독자는 그 글의 맨 끝에 다음과 같은 말로서 그의 편지를 끝 맺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진리입니다.  그대가 아무리 나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대가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웠다 하더라도, 바깥으로 나갈 때는, 아직도 여전히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 협동하며 사이 좋게 “더불어 사는 그것”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사랑하듯 사랑하며 사는 그것” 그것 만이 그대를 구원하는 최선의 길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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