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보냄받은 자의 신앙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창세기 45:1-8; 50:15-21  요한복음 6:38-40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온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 하나라도 내가 싫어서 내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모두 다 다시 살리려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를 요약하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1)첫째, “나는 스스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그래서 비로소 내가 온 것이다”라는 것이고,  (2)둘째,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결코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그것이다”라는 것이며, (3)세째, “이렇게 나를 보내신 그 분의 그 뜻은 아들을 보고 나를 믿는 자는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모두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여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스스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매우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을 마치 내 스스로 온 것인양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입니다.
    세상사를 조금만 더 깊이 관조해 본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성서의 세계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고 하더라도, 누구든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 것도 아니고 또 우연한 하나의 해프닝도 또한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매우 자연스러운 성서적 결론은 “우리는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간에 조금만 생각할 줄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평범한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그 맨 첫 머리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천지 간의 모든 것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결단코 하나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섭리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이 세상에 오게 된 “하나님의 사건” 즉 우리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어김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요 기초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초적인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성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셉의 “의” 그리고 그의 신앙,  그리고 그의 그 완벽에 가까운  경건! 우리는 과연 그 어디에서, 즉 그의 신앙의 어떤 점에서부터 그러한 그의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본문을 통해서 살펴 본다면, 다음 세가지의 관점에서 그의 신앙의 깊이와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비로소 온 것일 뿐이다”라는 그의 확고한 신앙에서부터 그의 신앙의 깊이와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곳은 그가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그 사실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셉”은 양식을 사러 온 힘없고 가난한 유목민, 거기다가 총리의 은잔을 훔친 죄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을 처지에 있어서 뚜려워 떨고 있는 자들인 그 형들 앞에서 자기가 요셉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그리고 자기네들의 운명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그 막강한 권력의 애굽 총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그 옛날 비정하고도 몰인정하게도 노예로 강제 인신매매 처분을 하였었던 바로 그                                  2
동생 요셉이라는 이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기절초풍 어안이 벙벙하여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을 때, 요셉은 다음과 같이 그의 형들에게 말하였다고 우리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형님들, 나는 형님들께서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긴 바로 그 아우 요셉입니다.  그러나, 형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하여 너무 근심하지 마시고 너무 한탄하지 마소서.  사실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실제로는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신앙이 지닌 위대성의 그 첫 번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요셉은 여기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내어 보내진 자일 뿐이라는 분명한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천명한 말입니다.  우리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무엇보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신앙의 자세는 바로 이러한 분명한 “자기인식(自己認識)”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는 많은 신앙인들 조차도 또한 이러한 자기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자기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존재인양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만 학식이 높거나 재물이 남보다 많으면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어 마치 무신론자처럼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오 이 세계 역사 속에 살아계셔서 홀로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요셉 그는, 감히 악을 악으로 갚으려 들지 아니하고 악을 도리혀 선으로 이기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순응(順應)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떠한 불행하고도 억울한 처지에 처하여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은 없다”라는 마지막 말 같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그 기막힌 억울한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3
의 구원섭리의 손길이 오히려 그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더욱 바쁘게 그리고 더욱 힘있게 움직이고 계시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목도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보내셔서 온 것일 뿐이라는 확신을 요셉은 확고부동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 신앙을  기초로 하고서 드디어는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의 경지에 감히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요셉의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계시는 이 역사에 대한 깊은 신앙적 성찰에로 승화/발전(昇華/發展)되어 갔던 것입니다.
    (2) 따라서 두 번 째로, 요셉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그 활동 속에는 반드시 그 “보내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결코 “뜻”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 뜻이 있으셔서 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을 요셉은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가인의 표”라는 제목의 설교를 할 때 말씀드린 바가 았습니다만, 창세기 4장의 성서기자가 인류 최초의 형제 살해자인 가인의 출생 조차도 전적으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증언하였다고 말씀드렸듯이 요셉도 또한 이 인간 역사 안에 펼쳐지는 모든 하나님의 사건들에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언젠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않고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세계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즉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행복 뿐만 아니라 불행도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이사야 45장 7절에서도 증언된 바 있었습니다.  즉 이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말하기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야훼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나니라”라고 하면서 이 신앙을 역설한 바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스                                 4
라엘 최대의 신앙인이요 의인인 욥도 또한 형언키 어려운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향하여 참다 못해 “차라리 하나님을 욕이나 하고 죽으시오”라고 항변하였던 아내를 향하여서는 정색을 하고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福)을 받았은즉 화(禍)라고 하여 어찌 받지 아니 하겠소”라고 외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앙의 터 위에 서서 증언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임한 이 기막힌  재난도 또한 하  나님이 뜻이 있으셔서 하신 “하나님의 일”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셉이 당한 이 재앙은 결코 그 무슨 마귀가 장난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요셉은 그가 겪은 그 참혹한 고난 속에도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도 지으셨지만, 어둠도 또한 지으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시지만 취하여 가시기도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복도 주시지만 화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신32:39; 삼상2:6).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삼상 2:7).  말하자면, 하나님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모두!!”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生)과 복(福) 뿐만 아니라 사(死)와 화(禍)도 또한 주관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사 모든 것에는 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사를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더불어 역할분담을 하고 계시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신이시오 하나님 만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하나님 만이 홀로 이 세상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그런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살고 있는 이 모든 일에                                 5
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그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결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       다”(요한6:38-39a)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확신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 26:39)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이 그에게 임한 그 참혹한 고난에 저토록 자신있게 침묵하며 복종하였던 것도 또한 분명코 그에게 임한 이 고난(苦難) 속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선한 뜻이 있다는 그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 임한 그 감당키 어려운 고난에 정말 의연하게 인내하며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불가피하게 남는 문제는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따라서, 셋째로는, 즉 마지막으로는, 요셉의 신앙이 지닌 그 위대성이란 이러한 그의 고난을 기초로하여 이 인간역사 속에 전개되고 있는 그 사건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르고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는 그 점을 들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사가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들어 있다고 믿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그리고 더욱 정확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었다는 그 점이 그의 신앙의 위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셉은 그리하여 형들에게 매우 확실한 언어로 그리고 반복적                                 6
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신 것  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요! 실제로는! 하나님이십니다.”(창 45:5-8a)  그렇습니다.  자신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그 엄청난 비극도 그 무슨 사탄이 저질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뜻이 계셔서! 행하신 일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그 비극적인 고난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란 과연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놀라웁게도, 단지 넉절 밖에 안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이 물음에 대답하는 우리의 창세기 본문 속에는 (1)“나를 애굽으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설명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고 또 (2)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실제의 근본 목적이란 전적으로 인간생명을 구원하시려는 데 있었다”라고 하는 설명도 또한 역시 무려 세 번이나 반복 해서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간 요셉의 그 비극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그 비극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전적으로 인간생명을 구원하시려는 의도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말하자면, 불행스러운 비극적 고난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 생명 구원의 놀라운 사역을 펼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목표는 “심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생명의 구원”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은총의 선포요 놀라운 복음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계 역사 속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그 근본 의도는 전적으로 “인간생명을 보존하시고 인간생명을 끝까지 살려 두시려는 것”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죽이시기도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 목표는 “살리시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상하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지만, 그러                                 7
나, 그의 근본 목표는 “고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축복도 베푸시고 환난도 조장하시지만 그러나 그의 근본목표는 오직 축복을 베푸시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문제는 그 무  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말 갈피를 잡기 어려운 부조리의 혼미함 속에서 회오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그 뜻이 무엇인지가 그 무엇보다 먼저 분명하지 않으면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있고 악이 난무하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이므로 이 세상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가 그 무엇보다 먼저 규명되어야 할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연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가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일 의롭지 않으시고 선하지 않으신다면 이 역사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완전히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한 신앙인인 요셉은 이 난해한 신학적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형님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이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형님들은 두려워 하지 마소서, 내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창 50:19-21a)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불가해한  비극의 역사를 조장하시면서까지 인간생명의 구원을 성취시키려 하시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하나님을 가리켜서 요셉은 당당하고도 분명하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어서라도! 인간구원을 기어히 도모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아,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까지 하시면서 인간생명의 구원을                                  8
도모하신 하나님!”  이 사실이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속성에 대한  깊이 있는 새로운 이해를 도출해 내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비로소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체험하고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생명을 기어코라도 살리시려는 분이시지 결단코 인간생명을 죽이시고 심판하시려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을 그는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악 조차도 악을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시고 악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요셉은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 가는 지극히 희망이 없는 그 상황을 오히려 아버지의 가문 전체의 생명을 이 전대미문의 치명적인 중동의 대 기근(饑饉)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먼저! 미리! 그리고 앞서! 보내시는 하나의 구원과정으로 감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신앙의 경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자신은 결코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것이 아니라! 자기를 노예로 팔아 넘긴 자들을 포함한 자신의 가문 전체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 구원의 사자(使者) 자격으로 애굽에 “미리 보냄을 받은 자”일 뿐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요셉의 이러한 신앙사건은 먼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구원 사건의 예시(豫示)가 되었다고 하여 성서학자들은 요셉을 가리켜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수 앞서 와서 그 길을 닦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주자(先走者)”라고들 합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 모든 인류에게                                 9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기초적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 또 지금도 보내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류는 모두 다 예외없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2) 둘째로, 그 모든  보내시는 일에는 인간생명 구원이라는 뚜  렷한 하나의 뜻과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  님의 뜻이라는 것.
    (3) 그러므로, 셋째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그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간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것, 증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역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 이것이 인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근본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내신 그 분의 그 선하신 뜻도 또한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므로 여하한 경우에서라도 기어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우리를 기어히 살리시려는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다는 그것입니다. 
    따라서, 또 하나 더 분명해진 것은,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인 이상, 보냄을 받은 자인 우리도 또한 이러한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  그러므로,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나를 보내신 그 분이 우리를 살리시는 일을 이토록 끝까지 추구하셨으니, 우리도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살리는 일을                                  10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의 기본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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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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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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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