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애굽 왕 [바로] 느고가 받은 신탁(神託)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열왕기 하 23:26-30; 역대하 35:20-25

설교문

    성락교회가 이렇게 창립 50 주년을 맞이하여 여기 이 대봉동에 이처럼 우뚝 서 있게 되었다니 참으로 가슴 벅찬 기쁨을 느낍니다.  새 해와 더불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더욱 기원하면서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불과 한 2년 정도 밖에 목회를 하지 않았지만, “성락교회!” 그러면 저의 뇌리에는 제 일생에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서 섬겼던 교회로서 기억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우들 모두를 제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목회하였던 유일한 교회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뜻 깊은 잔치에는, 그냥 와서 예배에 참석만 하여도 제게는 진한 감동을 주는 데, 이렇게 축하 설교까지 요청 받게 되었으니 이 감동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러한 뜻 깊은 축제에 무슨 말씀으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우리 “성락”은 말씀 중심의 교회로서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한 매우 견실한 교회라는 확실한 이미지가 저의 가슴을 가득 매우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삼수 목사님의 위대한 신앙과 확고한 신학적 확신 위에 세워진 교회, 그 후 얼마간 다소 외도를 한 짧은 기간이 있기는 하였으나, 여규식 목사님이 다시 이 전통을 더욱 충실하게 계승 발전 시켜서 “말씀 중심의 교회”  “확고한 신학적 바탕 위에서 정곡을 찌르는 참신한 성서해석에 의거한 복음이 열정적으로 선포되는 대구 지역 유일의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게 지켜 나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기쁨과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다 하겠습니다.
    성락교회의 메시지를 읽고 명상할 때마다 느끼는 한 가지는! 성서를 기록한 성서기자들이 각 시대 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받아 성서를 기록할 때, 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사건들을 예리한 예언자적 통찰력과 주석력으로 그 시대를 교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모습과 참으로 유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강단의 설교 만으로 육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매주일 선포되는 설교 메시지는 교회 생명의 절반을 찾이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올바른 성서해석과 거기에 기초한 충실한 설교 말씀 선포는 양떼의 구원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는 교회 창립 50년을 자축하면서, 다른 설교 말씀보다도 “목자가 양떼를 먹여 양육해 주는 꼴”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부각시키는 설교를 좀 해볼까 합니다.  즉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에 나타난 바, 유다 왕 요시야의 전사(戰死) 사건에 대한 두 성서 역사가의 서로 다른 역사해석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올바른 성서해석을 통한 목자의 양떼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씀 드려 볼까 합니다.
    많은 구약 역사가들의 보도에 의하면, 유다 왕국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요시야” 왕은 기원 전 609년 초 여름 경에 “므깃도”라는 곳에서 애굽 왕 “바로 느고”의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불의의 전사(戰死)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의한 중동세계의 판도변화에 따라 꺼져 가던 유다 왕국도 재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유다인들의 그 가슴 벅찬 희망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분명, “요시야” 왕은, 모세 이래로,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대의 인물로서 성서 역사가들이 한결 같이 입이 마르게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차 올 새 메시아 대망 신앙의 중심부에도 이 “요시야” 왕이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의 그런 성군(聖君)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시야 왕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하였기 때문에 그 충격이 너무나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이 몰락의 위기에 처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한 희망이 이루어 질지도 모를 가슴벅찬 희망의 때인데, 바로 이러한 때에, 이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 지도자인 요시야가 어이없게도 앗수르를 지원하러 가는 애굽 원정군의 길을 막다가 비명에 죽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는 이스라엘인                                    2
들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래, 남아 있는 유일한 왕국인 유다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란 오직 요시야의 반 앗수르 개혁정치가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고 또 정말 때맞추어!! 저 원수의 앗스르 제국이 신흥 바벨론 제국의 힘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몰린 이런 다시 없을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 반드시 망하여야 할 저 원수의 나라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란 누가 보아도 저 “느고”의 이 원정(遠征) 행위는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반역행위였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분명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란 앗수르를 멸망케 하고 바벨론을 일으키는 그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 “느고”의 원정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중동세계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기셨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게도 “요시야”는 바로 이 느고의 반 역사적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놀랐습니다.  유다 역사가들은 정말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뜨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졌던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악한 앗수르 제국을 도우려는 애굽 왕 느고의 북방 원정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거스르는 잘못임을 알려 주려한 그 요시야가 도리혀 그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군 요시야가 이 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이 곳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유다 역사가들의 연구실 곳곳에서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에 나타난 이 돌연변이적인 요시야 왕의 급서(急逝)는 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고는 결코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하였던 사료(史料)는 구약 안에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명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열왕기 하 23: 24-30과 그리고 “역대기적 역사서로 널리 인식된 역대하 35:                                        3
20-25”, 즉 우리가 오늘 읽은 두 곳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의 역사가들은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와 같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도할 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인과(因果)의 법칙이 낳은 결과로 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가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는다고 구약사가들은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역사신앙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과 무관한 그 어떤 엄격한 합리적 원리가 따로 있어서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그 어떤 주역(周易) 원리로 짜여진 “숙명적 틀”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오직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만이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역사신앙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난데 없는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이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 역사가의 해석과 역대기 역사가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열왕기 하 23장을 통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끌어 들인 종교적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컸기 때문에!!, 요시야 왕의 의(義)로움으로서도! 저 전대미문의 성군 요시야 왕의 의(義)와 선(善)을 가지고서도 이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이 저질러 온 죄, 그 중에서도 약 50년 이라는 반세기 이상의 통치기간 동안에 범한 므낫세 왕의 범죄는 이미 신흥 바벨론 제국을 등장시켜 유다 왕조를 멸망시키도록 확고하게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므낫세 왕의 죄(罪)가 요시야 왕의 의(義)를 압도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4
죄 때문에 앗수르를 통하여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리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통하여서는 남왕국 유다를 치도록 벌서부터 확고하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이미 한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진노는 이미 역사의 대세(大勢)가 되어 전대미문의 성군 요시야의 선(善)과 의(義)로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은 이스라엘 전(全) 역사를 반성할 때, 그 이스라엘 전 역사를 단지 범죄의 역사로만 보는 철저히 참회적 관점에서 역사를 반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요시야의  “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비록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의 의지를 막는데에는 요시야의 의로움 만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역사해석을 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 째 본문인 역대기 하 35장 20-25절을 기록한 역대기 역사가입니다.  이 역사가는 요시야 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의 역사적 내막과 그 사실의 정확성 여부 등에는 전혀 관심하지 않고 단지! 요시야 왕의 전사, 즉 요시야 왕의 죽음 그 자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하였습니다.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가,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가 대대로 기다린 메시아인 그 대망의 요시야 왕이 왜 이 중요한 시기에 죽어야 했나 하는 것에 만 관심하였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이 때, 여기서 전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는 과연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등장시키고 그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神託: oracle)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                                    5
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이 신탁(神託)의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를 치는 것, 즉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는 것은 비록 “바로 느고”가 이방 나라의 왕이고 또 앗수르를 도우는 것이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를 도우는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과, 이 “바로 느고”가 비록 이방 나라 애굽 왕일지라도 그의 입에서 선포된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 준 신탁(神託)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앗수르가 악한 나라라고는 하여도 이 나라를 도우러 가는 애굽왕의 원정 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여지는 원정길이기 때문에 요시야 같은 성군이라 할찌라도 그 길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길을 막는 일,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로서는 마땅한 일임이 확실한데, 그리고 악명 높은 민족 앗수르와 그 종교를 돕는 일을 막는 일은 매우 의로운 혁명적인 일임도 또한 확실한데, 사실이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애굽 왕 바로 느고에게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그 일을 서둘러 하라고 명령하셨는가 하는 것과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 잘못된 길을 막는 요시야 왕, 저토록 위대한 왕, 저토록 칭찬 받는 성군을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그토록 냉혹하게도 이 시점에서 전사하게 하셨던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요시야 왕 이전의 왕인 므낫세 왕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너무 확고하여 요시야의 의로움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혀 일축해 버리고, 이 와는 매우 다르게,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 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요 비합리적인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전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비판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 그 일이 합리적이든 불합리한 일이든                                       6
상관 없이! 그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 무조건 복종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두 역사가의 해석의 차이를 봄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계시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따라 전혀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성서의 진리가 지닌 진정한 역동성 같은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 啓示(계시)도 시대에 따라 그 메시지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성서 본문 자체 안에서  이미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역대기 사가 자신의 시대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즉 바로 느고의 이 말을 역대기 역사가는 그 시대를 향해 주신 진정한 의미의 참 신탁(神託)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가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신 말씀의 메시지는 <요시야와 같은 전무후무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장악하려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신앙을 증언하기 위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특이한 증언을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그 어떤 인간 이념에 의해서도 간섭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인문주의, 계몽주의, 등등,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3세계가 내어 놓은 “해방의 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교권으로부터 지키는 데에는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구 상의 인류는 <점차적으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오류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단지 우주의 한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지식의 급진적 성장과 더불어 인간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닌 위험성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실감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이 아무리 존엄하다고 하여도,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든가                                    7
또는 자연보다 인간이 더 고귀하고 더 위대하다든가 하는 생각들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는 더욱 더 뚜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도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연의 원리에 따라 얼마든지 복제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단지 어안이 벙벙하여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여, 그리고 악명 높은 제국 앗수르를 돕는 일이 역사를 거스러는 일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확고하고 뚜렷하다 하여 성군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에 대하여 순종하기를 싫어 하고 오만스럽게 자기의 이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자기 자신이 직접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 때, 비록 성군 요시야라고 할찌라도 불행스러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념을 잣대로 하여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으로부터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구분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는 분명 젊어지고 있고 동시에 성년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의 결과를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듭니다만, 우리 시대는 모든 인간사(人間事)란 이미 그 어떤 윤리적 판단이나 시국적 판단에 따라, 그리고 인간 이념의 옳고 그름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지 않고 우리 인간으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그 어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승패가 결정나는 시대로 이미 접어 들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이 말은 이번 대선의 결과가 옳았다거나 틀렸다거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승패가 인간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 간다는 것일 뿐입니다.
    성군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짓고 그 애가를 노래하는 남녀 성가대들이 슬픈 곡조로 노래하며 그 곡조와 가사를 애가집 중에 수록하여 오래 오래 역사 속에 전승시켜 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운영은 요시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a) 라고 시편 시인이 노래 하였듯이, 하나님의 뜻은 도도하게 온 하늘과 온 땅에 통하고 역사의 주님이신                                    8
하나님의 뜻은 세계 끝까지 이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직 요구되는 것은 단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평화의지, 구원의지, 사랑의지를 믿는 것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정답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시야”와 같은 그런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그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한 요시야의 오만이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였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조리의 역사현실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일관된 답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시야 왕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방향을 바꾸려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불운한 운명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모든 증언과 그리고 성서역사의 그 결론부에 자리잡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증언이 웅변적으로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평화의지, 하나님의 구원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지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것, 하나님 만이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민중신학이 강변하였듯이 그렇게,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많은 젊은 이들이 기쁨에 들떠서 <민족주의적 주체사상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유일한 대안이다>라고 성급히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확신 위에만 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우리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 즉 그가 받은 신탁(神託)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락교회의 50년 전통은 바로 이러한 “올바른 말씀선포”를 교회 제1의 과제로 삼는 전통이었음을 확신하고 또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축하를 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미래의 “성락”도 바로 이 전통 위에 확고히 서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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