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내가 회개하나이다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욥기 42: 1-6; 마태 6: 33-34

설교문

    “욥”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의인(義人)이라고 구약성서가 내세운 세 인물, 즉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겔 14:14).  그러나, 이 세 인물 중에서 “욥”은 다른 두 인물과는 그 특성에 있어서 매우 구분되는 인물입니다. “노아”나 “다니엘”과 같은 경우, 이들은 전통적 신앙에 매우 충실하였던 모범적 인물로 설명되어 있지만, 욥“은 이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즉 욥의 경우는, 1-2장의 서론부와 42: 7-17의 결론부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3장으로부터 42장 6절까지 무려 40여 장(章)에 이르는, 그것도, 전적으로 시문(詩文)으로만 구성된 방대한 부피의 토론문 형식의 본론부에 의하면, “욥”은 1-2장의 서론부에서 보았던 그 “욥”과는 아주 다르게! 자신이 당한 고난을 불평없이 수용하는 그런 “참고 인내하는” 유형의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전혀 달리,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의문(疑問)과 항거(抗拒)를 끝없이 제기하는 사람, 심지어는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리 만큼(욥 3장 참조) “산다는 것” 그 자체를, 즉 “인생” 그 자체를 괴로워하며 탄식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세상을 이토록 부조리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조차도 심각한 회의(懷疑)와 항거(抗拒)를 하기까지 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읽으시는 성도님들께서는 적어도 욥기만은 성서지도자의 가르침과 안내를 받으며 읽으시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인, 욥기 42: 1-6의 말씀은 피골이 상접하여 형언하기 어려운 몰골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항변하는 한 신앙인의 그 안스러울 정도로 홀로 투쟁하는 외롭고 고독한 그의 “신앙적 투쟁”의 최종 결론을 담아 놓은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고난 속의 신앙인이 겪는 그 심각한 신앙적 고뇌가 매우 첨예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심각한 고뇌가 또한 어떻게 그토록 놀라울 정도의 그의 그 위대한 신앙적 승리로 전환(轉換)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위대한 신앙적 승리에 관한 놀라운 각성과 깨달음도 또한 매우 뚜렷하게 소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본론은 특별히 매우 차원 높은 수준의 신학 논쟁을 아주 절묘한 문학적 수사들과 철학적 토론어법을 동원하여 긴장감 넘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욥기”를 가리켜서 “사람이 붓으로 쓴 글로서는 가장 웅장화려한 언어로 이루어진 최대의 문학”이라고 까지 격찬한 바가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천재 시인 괴테(Goethe)의 걸작 중의 하나인 “파우스트”(Faust)라는 작품도 그 작품구상의 실마리를 이 욥기에서부터 얻었다고들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가 아닌 저로서는 이 “욥기”가 지닌 그 위대한 “문학성”에 대하여서는 별로 할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또한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본론이 갖고 있는 그 종교성과 신학성에 대하여서만은  참으로 할 말이 많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우리의 신앙문제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논쟁점으로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 <“죄의 까닭없는 고난(苦難)도 있는가?”>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정립하는 데에도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의 구약본문은 욥이 오랜 신앙적 투쟁을 끝내고 있는 그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욥은 여기서 마침내 그토록 긴 신앙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옷깃을 여미며 겸손하고도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 ①주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못하실 것이 없으시다는 것과 무슨 계획이든 못 이루실 것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②정말,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지  한 말로 세치 혀를 놀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설정해 두신 세상 사                                 2
는 이치를 감히 가리우려고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었던 자가 바로 저입니다. ....  ③솔직히 말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을 저는 지금까지 단지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이 두 눈으로 직접 똑똑히 주님을 뵈었습니다. ④그러므로, 이제 저는 저의 모든 주장을 모두 다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를 하나이다.”
    욥의 이 답변은, 분명, 일종의 하나님을 향한 항복 선언문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욥이 매우 심각하고도 끈질기게 하나님과 “오랜!” 아마도 매우 오랜 논쟁을 하였다는 것을 전제하고 암시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בויא←ביא[ביוא])로, “대적자” 또는 “원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욥”이 욥기 본론 전체에서 “대적하는 자” 또는 “논적”(論敵)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점과도 적확하게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논적”도 “논적” 나름이지, “하나님의 논적” 역할도 하였을 정도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진실로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대적(對敵) 관계에 있으면서도!! 또 이렇게 불경스럽게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항변을 하였는데도!! 그의 그 대적 행위(對敵 行爲)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의(義)롭다!”라고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의 진정한 내용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놀라운 사실의 진상을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살펴 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 또 구원을 향한 우리의 달음박질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살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욥이 그에게 임한 육체적 고통이 너무도 심하여 견디다 못한 나머지, 마침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의 태를 저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드디어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 당신은 어찌하여 이런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이런 마음이 아픈 자에                                 3
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 이런 자는 차라리 빨리 죽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옳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죽기를 바라지만 그 죽음조차도 찾아 오지 아니하고 나를 비켜가니, 아, 하나님에게 이토록 사방으로 첩첩이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자를 주님은 어찌하여 이토록 놓아 주지 아니 하시나이까?”(욥 3: 20, 23)라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욥의 그 고통받는 몰골이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파손되고 상하여 그를 문병하려고 찾아 오는 자들도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릴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자를 위로하기 위하여서 도데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그 무슨 “좋은 말”이나 그 무슨 “교훈”이나 그 무슨 훌륭한 “설교”가 필요한 것은 본래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단지, 함께 그 아픔을 함께 나누며, 마치 우는 자와는 함께 우는 그런 자세 이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욥”을 찾아 온 위로의 세 방문객 중, “엘리바스”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참다 못하여 우선 가장 먼저 입을 열고 이렇게 “욥”을 향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참고 말을 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  그러나,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로워하고 또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며 절망하는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죄없는 사람이 망하는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하는 일이 있더냐?  내가 본대로는,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이니라,”(욥 4: 2-8)
    친구 “엘리바스”의 이 발언은, 비록 위로(慰勞)라는 형식을 빌려서 말은 하였지만, 실은, “위로”라기 보다는 “욥”이 겪는 “고난”(苦難)에 대한 신학적 또는 철학적 해석과 그 해석을 근거한 “교훈”                                 4
을 전달하는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 교훈은 이스라엘 사회에 널리 일반화된 것으로서,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삶의 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이라는 결과는 반드시 “범죄”라는 원인의 한 필연적인 결과(結果)라는 논리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까닭이 없는 고통이란 없다!”는 것입니다.“고통”에는 반드시 “종교적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는 이런 유형의 교훈이 위로가 되거나 용기가 되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입니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괴로운 하는 자에게 그 무슨 인과응보의 철학이나 신정론(神正論)의 신학 같은 것을 잘 설명해 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욱이, 이 엘리바스의 다음과 같은 말, 즉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어디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어디 있더냐? 죄악을 행하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더라!”라는 말은 분명 위로(慰勞)라기보다는 오히려 아픈 곳을 더 아프게 하는 일종의 질 나쁜 악담에 해당하는 말이 된다 하겠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할 자에게 위로는 커녕 오히려 정죄의 칼날을 휘둘러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욥은 분명 이러한 인과론(因果論)의 논리가 매우 과학적인 논리라고는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고난을 범죄의 인과법칙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질병의 고난은 죄가 낳은 결과(結果)이고 죄는 질병의 고난을 낳은 원인(原因)이다!>라는 논리는 오히려 논리의 비약이고 동시에 생(生)의 의미와 생의 다양성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 욥의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죄는 질병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질병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질병에는 원인(原因)이 있겠지만, 그러나,  죄가 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맹인(盲人)”된 사람을 보고 그가 맹인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부모의 죄 때문인 것도 아니며>, 단지,                                    5
<하나님이 하시는일>을 나타내려고 생겨난 것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요한 9:3). 욥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와는 관계없이, “육”(肉)을 가진 인간이란 고난의 질병을 경험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르기를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다 함께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바니라”(롬 8:22)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욥이 말하기를,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된 종살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의 일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아니하냐?”(욥 7:1) 라고 한 것은, 분명, 인간의 생 그 자체가 고난이라는 것을 역설(力說)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고난받는 그것이 유익(有益)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성서가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 시편시인은 말하기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이라 그 고난 때문에 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시 119:71)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마냥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지금은, 그 고난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나이다”(시 119:67)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욱 심하게는,  디모데 후서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겪어십시오”(딤후 1:8)라고 고난받는 것을 권유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기자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벧전 3:14)라고 말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의 징계는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질”일 뿐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기뻐하시는 자녀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징계를 여러분만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히 12: 6-8)라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을 위로한답시고 욥이 받는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몰아치고 정죄하는 것은 일종 거짓교사의 가혹한 오류요 심지어는 거짓 교사의 악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자는, 또는 성서를 가르치는 자는 병든 자를 방문하여 위로할 때는 엘리바스가 저질른 악을 본받는 시행착오를 범하l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엘리바스의 주장을 듣고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친구들이라는 것들이라고는 모두들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욥 6:15)라고 말합니다.
     그런자, 두 번째 친구 “빌닷”은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즉 자신의 인생경험(人生經驗)에 의거하여 고난받고 있는 욥에게 인과론적(因果論的) 정죄(定罪)를 하고 나섰습니다: “욥이여, 조상들이 경험한 바를 통하여 배워 온 진리를 잘 한 번 생각해 보아라(욥 8:8)” ... “어찌 늪이 없는 곳에서 왕골이 자라겠으며 어찌 물이 없는 곳에서 갈대가 크겠느냐?”(욥 8:11)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잡아 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다.”(욥 8:20)라고 욥을 좀 더 죄인 취급을 하며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인과론(因果論)이 대단한 악역(惡役)에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엄청난 고난 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욥 9:1) “내 영혼이 살기에 피곤하니... 인생의 연륜이 어찌 하나님의 연륜에 비할 수 있다고 나의 허물을 이토록 샅샅이 찾아내며 나의 죄를 이토록 샅샅이 들추어내려고만 하느냐?”(욥 1:1, 5-6)라고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고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그 어떤 짧은 인생경험에 의거하여 단죄(斷罪)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90편 시인이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즉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아, 유한한 인생, 주님께서 한 번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팔십이요 건강하면 구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                                 7
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나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시 90:3, 5, 9-10)라고 하였듯이, 인생고(人生苦)는 결코 인과론적  교리의 칼날로 단죄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부터, 오히려 그 고난의 자리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교훈을 찾아야 할 구원섭리의 한 일환으로 이해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라고 욥은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일이 이쯤되자, 세 번째 친구인 “소발”은 “욥”의 태도를 오만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차마 참고 들을 수 만은 없다는 듯,  신속하게 이 토론에 끼어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구인들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줄 아느냐? ... 네가 받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인 네가 감히 신의 뜻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느냐?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네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네 팔을 그분 쪽으로 향하여 들고 기도하며 악에서 손을 떼고 네 집안에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하면 너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11장, 2,6,7,13-15)라고 말합니다.  일종 거짓 실토라도 하도록 우격다짐으로 강요하듯이 욥을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교리가 인간현실을 이토록 무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이 종교교리 때문에 구원의 길을 걷는데 많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이웃에게 위로를 전하려는 자는 이러한 유형의 죄 고백 강요는 반드시 삼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욥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아찌 안다고 그렇게 나를 비웃기만 하느냐? 그런 판단은 하나님 그분의 고유한 권한이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지 말아라.  나는 확신한다.  나를 구속(救贖)하실 구속자가 살아계신다(욥 12:5,16; 19:25)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욥의 끈질긴 항변에 의하면, 까닭없는 고난도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긴 논쟁은 끝이 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즉 그것은 이토록 길고도 복잡한 논쟁을 끝까지 지켜 보신 하나님께서는, 의외(意外)에도, 욥의 손을                                   8
들어 주며 “너희 세 친구들은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다”(욥 42:7)라고 말씀하시며, 욥의 승소 판결을 선포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로 빚어 만드신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의 “생”(生)이란, 그 자체가 본래부터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     입니다. 그리하여, 욥기는 불완전한 종교교리를 가지고 그것을 무기삼아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인간을 억지로 통제하여 교리에 의거하여 고난받는 자들을 이렇게 저렇게 교훈하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인간의 불법행위라고 욥기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도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여야만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할 일이고 한 날의 고난과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할 뿐이라는 것입니다(마태 6:33-34).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오히려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손을 들어 주어 욥의 옳음을 선포해 주시고 이와는 달리 세 친구들의 인과론적 교훈과 언어유희(言語遊戱)는 “옳지 않다!”라고 하시며 저 세 친구들에게는 패소 판결을 내려 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오히려 그 승리의 선포를 듣는 순간, 무릎을 치며, “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말한 제 주장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항복하오며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라고 말하였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욥기의 결론은 왜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요?
    욥기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인생고의 문제에 관한 한 인간은 모든 논쟁을 종식시켜라!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고난에 관해서는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이렇쿵 저렇쿵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의 선하신 뜻만을 찾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마지막으로 말한 바,                                 9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단지 귀로만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제 눈으로 이렇게 똑똑히 주님을 뵙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모든 주장을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라고 말한 그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은 결단코 이웃의 고난에 대하여 이렇쿵 저렇쿵 교훈하려 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일은 오직 단지!! 우리의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고난을 함께 나누며 함께 더불어 같이 아파하는 것 이외의 모든 교훈행위는 무익하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위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 세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두고 말할 때,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다”(욥 42:8b)라고 판단하신 그 이유입니다.  이웃의 고난에 대한 모든 종교교리 논쟁을 종식시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의 고난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기에, 너희는 더 이상 이웃의 고난, 즉 인간고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이러고 저러고 말 유희(遊戱)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난받는 자들을 교훈하려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2:20에서 예언자가 말하기를 “오직 야훼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라고 한 그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온 땅의 인류는 그 분 앞에서는, 이웃의 고난 문제에 대하여서 만은 반드시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며, 하나님의 이치를 가리우며 함부로 떠들었던 그것을 뉘우치고 단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교훈하려들지 말고, 단지, 아무리 동참하려 하여도 그 아픔이 진정으로는 내 살과 내 피가 되지 못하는 그런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여, 단지 우리는 잠잠하고 회개만 하자!는 것입니다. 욥기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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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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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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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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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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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