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다니엘 2: 44-45
마태복음 21:43-44
기원전 60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는 약 2600여년 전에, “느부갓네살”이라는 한 영웅이 신 바벨로니아 제국을 창건하고 그 제국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부터는 그의 권세가 중동 세계에서 단연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 높은 줄도 모르게 치솟기만 하던 바벨로니아 세력도 “고레스”라는 한 새 영웅이 일어나서 페르샤 제국을 건설함과 더불어서는 매우 신속하게 그 기세가 꺾이어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지성인들이 이끄는 새 세계가 중동 땅에도 도래하였는가 하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온 천하를 다스리는 자다”라고 호언장잠하던 그 페르샤 제국도 또한 마게도냐의 한 초인적인 전쟁 영웅인 “알렉산더”가 한 번 그 어깨를 크게 기지개 키며 일어나는가 하는 순간, 동서양 전 세계가 순식간에 저 알렉산더 장군의 손 안에 들어가고 말았으며 그 때부터 알렉산더 대 제국의 세력은 “헬레니즘”이라는 새 이념의 기치 아래 지중해 연안을 중심한 전(全) 세계를 한 손에 장악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더의 후예들은 세계의 희랍화 또는 희랍문화에 의한 “세계의 지성화”라는 매우 화려한 새 이데올로기의 기치 아래, 지중해 연안은 물론이고 흑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페르샤만(灣)과 애굽 홍해 연변을 포함하는, 이른 바, 문자 그대로의 동서양 전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나누어 가지고는 탄탄한 세계적 희랍 제국 건설의 꿈을 착착 성취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은 알렉산더의 후예 중의 하나인 “셀류커스” 왕조의 강인하고도 잔인한 희랍화 정책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정말 유례없는 혹독한 시련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역사적 위치는 바로 이 시기, 즉 기원전 1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2200여년 전, 셀류커스 희랍왕조의 악명 높은 독재군주인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저 전무후무한 폭력정치, 이른 바, 유대나라를 희랍주의로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유혈 군사 폭력으로 강행하고 있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가 겨냥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은, 말할나위도 없이, 저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이끄는 광적인 희랍화 운동의 단말마적 유대교 탄압정책이 종식되는 그 날, 그 “희망의 날”에 대한 당시 억압 받던 유대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에 희망의 등불을 비쳐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니엘서 이야기의 전개는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이름과 연결해서 전개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였더라면, 다니엘서라는 책은 단연코 당시 사회에서는 독서금지의 책으로서 묶여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배경은 일부러 다니엘서의 시대 보다는 530-540년 전의 아득한 옛날로 소급해 올라가서 바로 그 아득한 옛날 바벨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시대를 그 이야기의 직접적인 무대로 삼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른 바, 묵시문학의 문학적 특색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 다니엘서가 말하고 있는 그 극중의 무대는 저 먼 옛날 옛적 시대인 신흥 바벨로니아 시대인 기원전 600년대이지만, 그러나, 이 다니엘서가 읽혀지고 있는 시대와 또 이 다니엘서가 지목하여 가리키고 있는 그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시대는 그 기원전 600년 보다는 40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 지나간 후인 기원전 168년을 전후 한 희랍 패권주의 시대, 이른 바, 전 세계를 희랍문화로 식민지화하는 일에 광적(狂的)이다시피 한 저 붉은 용과도 같은 악마,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미치광이처럼 유대교 탄압정책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꿈 해몽을 하고 있는 바, 저 유명한 바벨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그 꿈 해몽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으로 추론될 수 있었습니다. 즉 왕의 꿈에는 한 거대한 사람 모양의 “우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금(金)으로 되어 있었고 가슴과 두 팔은 은(銀)으로 되어 있었고 배와 두 넓적 다리는 놋쇠[銅]로 되어 있었으며 정강이는 철(鐵)로 되어 있었고 발은 쇠와 진흙[鐵土]의 혼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2
그 꿈 속에서 그 “우상”을 우러러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
가 난데없이 날아 들어와 그 거대 우상 중 철과 진흙의 혼합으로 구성된 그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철과 진흙으로 혼합된 그 발은 물론이고 그 발을 발판삼아 그 위에 세워졌던 금, 은, 놋쇠, 그리고 쇠의 각 부분들이, 마치 작년 9월 11일에 뉴욕에서 있었던 비행기 자살 테러 때 난데없이 날아든 비행기 한 대의 충돌에 의하여 100층이 훨씬 넘는 세계 무역센타 건물이 허무하게 잿더미가 되어 내려 앉았듯이 그렇게 이 거대한 우상도 타작마당의 겨처럼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가고 자취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해몽한 바에 따라 이 꿈이 묵시적으로 지시하는 바는, 그러므로,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현대 주석가들의 전언에 따르면, 순금으로 된 머리는 바벨로니아 제국을 가리키고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은 메데 제국을 가리키며 놋쇠로 된 배와 두 넓적다리는 페르샤 제국을 가리키고 쇠로 된 정강이는 알렉산더의 대 희랍제국을 가리키며 그 다음 다니엘서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 “철과 흙의 혼합으로 된 그 두 발”은 셀류커스 왕조와 프톨레미 왕조를 가리키는데,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 내지 않은 “뜬 돌” 하나가 즉 인간의 손으로 세워지지 않은 어떤 한 초 자연적 신의 왕국이 난데없이 날아 들어 와서는 그 두 왕조 즉 셀류커스 왕조와 프톨레미 왕조를 쳤더니 두 왕조를 두 발로 하고 버티고 서 있던 저 거대 제국들 즉 바벨로니아로부터 희랍제국에 이르는 저 거대한 전(全) 세계 인간 왕조들의 역사가 모두 다 산산히 부셔지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 꿈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꿈 내용은 분명 인간의 힘의 논리와 군사적 승리를 통하여 새로운 하늘나라 왕국이 건설되리라는 세속적 희망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와는 정 반대로!! 인간의 손 3
이 전혀 닿지 않은 돌, 즉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인, “어떤 초자 연적 메시아 왕국”이 난데없이 그리고 예기치 못한 때 우리의 역사 속으로 날아 들어 와서 저 도도한 제국주의의 오만을 완전히 꺾어 놓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꿈을 통한 예언에 자극을 받아서 저 마카비 혁명이 기원전 165년, 한 때 잠시나마 안티오커스의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하나님께 재봉헌(再奉獻)하는 일까지 해 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 다니엘서의 기본 역할은 역시 마카비 군대의 무력혁명을 충동하고 선동하며 정당화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희랍제국의 억압 아래 시달려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유다 민중의 마음에 “새로운 종말론적 희망”을 심어 주어 이 폭력의 역사 속에서도 그 좌절의 민중이 끊임없이 부활하여 역사현장으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그런 신앙적 교화의 기능을 하려는 것이 다니엘서의 기본 목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니엘서의 “우상환상”이 당시의 억압받는 민중을 격려하여 역사 속에 끊임없이 부활하도록 충동하는 그 “교훈”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 첫째(1)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대한 낙관주의(樂觀主義)적 패권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는 한 교훈을 여기서부터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희랍주의로 세계 지배를 노리는 그 야욕 속에는 오늘 날의 Pax Americana 이념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패권주의적 낙관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인격적인 삶 같은 것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단지 경제의 부흥, 교육의 확대 등을 통한 민중의 엘리뜨화, 과학의 생활저변화와 그리고 힘의 평형의 유지, 등등 이런 것만 있으면, 인류사회는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고 우리를 회유하고 있는 저 기만적이고도 허구적인 패권주의적 인본주의의 낙관주의가 바로 그것인데 그러한 인류의 패권논리의 인본주의적 낙관주의가 만들어 낸 산물로서 등장한 여러 오만한 제국주의 국가들, 이른 바, 바벨로니아, 메데, 페르샤, 4
그리고 희랍제국으로 이어지는 그 전(全)인간세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의 참 인간다운 삶보다는 물질주의적 풍요와 패권주의적 지배논리를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생의 유일하고도 궁국적인 과제로 삼게 될 때, 그 운명은 저 우상의 운명과 같아서!,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의하지 않고서도!! 곧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다니엘서는 경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경우는 오늘 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어쩌면 과학만능주의와 정교한 테러리즘 및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큰 열병을 앓고 있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 자유와 자기 해방은 낙관적 지식주의를 통하여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러한 패권주의적 낙관주의의 주의 주장은 기만적이고도 허구적이라고 하는 자기 비판이 오늘 날에 와서는 특히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뿐입니다. 다니엘서는 이<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에 의해서 그것이 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묵시적 예언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이것은 인본주의적 낙관주의가 지니고 있는 그 기만성과 허구성을 비판하는 하나의 성서적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토록 호화롭고 강대한 저 막강제국들이 그래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돌 하나에 의하여 우연하게도! 여지없이 깨어져 박살이 났다고 할 때의 그 거대한 우상이 지닌 그 기만성과 허구성은 더욱 더 명명백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위엄있고 당당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권위가 그렇게도 일순간에 역사에서부터 소멸해 버렸다니, 실로, 저 제국주의 국가들의 오만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었나 하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가 지닌 가장 큰 위험도 또한 제한된 인간 인격성 위에 무제한의 신적인 힘을 부여하고 기대한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분명 인간의 능력은 무한히 발전시켜 가되 그러나 동시에 그 능력의 “유한성”만은 그 무엇보다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인식 5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유한성을 인식치 못하는 낙관적 지식주의는 분명 바벨탑의 허구처럼 본질상 자기 기만성과 자기 허구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에 의하여 예기치 못한 때 여지없이 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2)로, 다니엘서의 이 우상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모든 생과 역사란 전쟁영웅이나 절대권력의 군주와 같은 그 어떤 카리스마를 지닌 초인적 인간에 의하여 운명지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방향지어져 있다는 것을 강력히 교훈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결단코 역사과정과 무관한 존재로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묵시종교가 흔히 말하는 그 무슨 숙명론적 역사순환설 같은 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 된다거나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다거나 하는 낙관론적 주장도 또한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그 우상과 같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 시대에 살고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가뭄, 홍수, 지진 등등의 자연적 재난 앞에서의 인간의 무한한 무력을 자주 느껴왔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점점 더 파괴되어가는 지구의 생태학적 위기를 보면서는 더욱 그렇게 느낍니다만, 인간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섭리라는 굴레를 충분히 그리고 능히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 매우 허구적인 주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 다니엘서의 주장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이룩해 놓은 바벨로니아-메데-페르샤-희랍-로마로 이어지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어김없이 따라가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다니엘서의 주장입니다.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에 의하여, 즉 인간의 손에 의하지 않은 힘에 의하여 순식간에 그 역사과정을 파국과 중단 또는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역사라는 6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역사는 그 모두가 하나님의 목적 속에 있을 때만 그 뚜렷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아무도 손대지 않은 돌 하나!
그 돌에 의해서 저토록 찬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가 마치 빙하시대를 맞은 공룡들의 세계처럼 순식간에 끝장이 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역사가 지닌 신비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의 역설적 신비를 용감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3)로 우리는 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의 신비를 통하여 역사 앞의 인간은 모름직이 겸손(謙遜)해야 한다는 한 교훈을 얻어내게 됩니다. 바벨로니아가 그 세력을 그토록 자랑해었는데, 그리고 페르샤는 온 세계를 자기들의 고답적인 지성으로서 능히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까지 하였는데, 그리고 또 저 알렉산더 대제국은 자신을 쇠덩어리같이 강력한 나라라고 오만을 떨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그 찬란한 문화제국들이 놀라웁게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에 의해서 그토록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느부갓네살이나 고래스나 알렉산더 그리고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 같은 그런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오만한 자들의 기세도 또한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맥락에서 볼 때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하나의 자기기만적 광대역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다니엘서의 기본 주장이라는 말입니다. 금년 6월은 한국이 월드 컵 축구 열기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조국의 승리를 기원한, 이른 바, 매우 보기 드문 “민족화합”을 이루어내었던 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월드컵 잔치를 통하여 얻어낼 수 있었던 가장 뚜렷한 성서적 교훈도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이하게도 이번 축구 대회에서는 명성있는 축구 강국들 중, 특히 상대편을 깔보며 오만을 떨었던 국가들은 거의 모두가 다 초장부터 탈락하는 이변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다니엘서에 나타난 이 우상 환상을 통하여서도 더욱 확실하게 증언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
7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그렇습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었던 축구신진국 선수들이 찬 둥근 돌 같은 그 볼이 이름만 들어도 주녹이 들만큼 강력한 우승후보국들의 꼴문을 순식간에 통과해 들어 갈 때, 그 볼은 분명히 사람의 발에 의해서 “킥!”된 볼이라기 보다는 분명 아무도 손대지 않은 신이 차 넣으신 볼이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 모든 인간들을 향해 역사 앞에서의 인간은 모름직이 겸손(謙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권력을 쥔 자들은 본래 역사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기가 쉽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힘을 가진 자가 겸손해 진다는 것은 분명히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는 일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역사 속에서 힘을 가진 오만한 자들 그리고 많이 가진 부유한 자들의 오만 을 끊임없이 낮추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다니엘서의 신념이었습니다.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한 돌에 의하여 예기치 못한 때 홀연히 하나님은 힘있는 자와 가진 자의 오만을 꺾어 부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돌 하나!
아무도 떠내지 않은 돌 하나!
이 돌이 역사를 쉬지 않고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매우 귀중한 신앙적 지혜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도원 장로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성서의 신앙 세계를 충분하게 이해하셔서 말씀에 튼튼한 기초를 둔 굳건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홀로,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간 역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어시고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