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편 56:1-4; 요한1서 4:16b-18
설교문
어느 해인가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새해들어 처음 맞는 월요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마침 “종말”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 우리 사회가 다소 소란스러웠던 때여서 인지 마침 KBS 1 TV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점(占)이 뭐길래”라는 매우 이색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시내 유수 대학교들이 대학입시 고사를 치루고 있는 날이어서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긴장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방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 중에서는 그 어느 프로그램 보다 훨씬 더 돋보이는 프로그램 같았습니다. 거기 출연한 분들의 증언들은 이외로 사뭇 진지하였고 주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겪었던 바의 이야기를 마치 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하듯이 그렇게 그 어떤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첫번 째로 발언대에 나온 어느 50대 후반의 한 아주머니는, 처녀 시절에, 궁합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양가 집안에서 모두 반대하는 혼사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망설이든 중에, 어느 점술가가 “지금 사귀는 남자와 결혼하면 6년 이내에 그 남자가 죽는다”라고 하는 아주 나쁜 점괘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오히려 역으로, 한 편으로는 오기(傲氣)도 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6년밖에 못산다는 그 남자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차라리 이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나 하나 낳아서 살다가, 만일 6년이 되어 그 점술가 말대로 정말 남편이 죽으면 그들 사이에 태어난 그 자식이나 희망삼아 기르면서 재혼 않고 혼자서 한평생을 살면 그것이 내 팔자에 잘 어울리겠지 생각하고는 그 무리한 결혼을 오히려 더 서둘러 강행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놓고 보니, 점괘가 용하게 맞기라도 하듯이, 이 남편의 성질이 너무 고약하여 부부생활 하기가 너무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 용한 점술가가 이 남편이 6년 밖 에 못 산다고 했으니까 6년만 참으면 되겠지 하고는 기왕 6년만 살고 죽을 사람이니까 왠만한 것은 내가 참자고 생각하면서 꾹꾹 눌러 참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6년이면 죽어야 할 그 남편이 6년이 다 되었는데도 전혀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 있어서 이 부인은 이 남자가 살아있다는 그것 만으로도 너무 대견하고 감지덕지해서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에 미운정 고운 정 다 들어 부부의 정도 생겨나고 또 남편도 마음잡아 열심히 일도 하며 돈도 잘 벌어오고 해서 결혼한지 3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별 어려움이 없이 잘 살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점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하나의 미신에 불과할 뿐인 것을 알았노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이 두 번 째로 곧 뒤이어 나왔습니다. 역시 비슷한 나이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다른 한 부인이 나와서 그도 역시 매우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의 점 체험담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젊어서 결혼한 후, 약 15년 동안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남편과 힘을 모아서 이일 저일 닥치는대로, 즉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사양않고 다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하는 일 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인의 남편은 마침내 실의에 빠져서 늘어나는 것이라고는 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서 경찰서에 붙들려 와 있는데 부인이 속히 좀 와야겠다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설상가상, 재앙이 겹친다고 생각한 이 부인은 황급히 달려 나갔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길거리 노상에 앉아서 사주를 보는 노인네의 그 사주보는 상을 그만 엎질러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그것이 너무 미안해서 그 흩뜨러진 사주보는 책자들을 빨리 주어서 그 상 위에 올려 놓아 주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2
라고 거듭거듭 사과를 하였는데 갑자기 그 점보는 할아버지가 자기 손을 텁석잡으면서 한다는 말씀이, “손등에 푸른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아주머니 손이 열두가지도 넘는 재주를 가진 손이여, 장차 큰 일 하겠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엉겁결이기는 하였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바쁜 와중에서도 잠시 멈추어 서서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하면 성공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 말씀이 “머리 만지는 일이나 옷 만드는 일을 하면 성공하겠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그 당시에는 남편 일로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또 복체를 낼 여가도 없어서 그냥 경찰서로만 달려 갔었는데 그 모든 일이 다 정리된 다음, 이 부인은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 점치는 노인장 말이 생각이 나, 그 노인장 말대로 용기를 내어 이판사판으로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하여 여자 머리 만져 주는 “미용사”일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도 만만치 않아 기막히게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일을 하였더니, 마침내 그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국제 산업 디자이너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그가 최근에 연 전시회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부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점은 미신이 아니라 매우 믿을만한 것으로서 하나의 과학과도 같은 것입니다”라고 강변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점 또는 점술의 신빙성에 관한 “아침마당”의 토론은 “무승부”로 끝이 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무슨 신접자, 즉 신에 접한 자의 초능력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인간의 “잠재능력”이라는 것으로서 일종의 과학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성서 도처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점술은 허황된 미신에 불과한 그런 것일까요? 과연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그 처음과 끝이 그 무슨 사주단자처럼 판에 짜듯 미리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숙명적인 도표나 그라프처럼 그런 운명적인 것일까요? 도대체 운명이라는 것 3
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이고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부활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영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종말이라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요? 성서의 말씀처럼, 종말의 때와 종말의 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모르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 만이 아시는 극비사항에 해당하는 그런 것일까요? 운명과 사주팔자는 과연 창세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그런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의 운명을 <숙명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이미 창세 전부터 다 정해져 있어서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는 그 어떤 “타임머신”이라는 시간기계를 타고 얼마간 미래를 날아가보면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미리 사전에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도 될것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부터 이미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도록 아예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라고 하는 것은 도데체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입니까? 나는 너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는데, 너도 또한 나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는데, 그러면, 나와 너의 이 사랑고백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다 써놓으셨던 하나의 정해진 각본이고 우리는 단지 그 각본을 그저 입으로만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인간 역사는 결코 그러한 숙명론적 운명의 틀 속에 요지부동 붙박혀 있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것이 성서의 진정한 대답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음 두 가지의 성서적 주장을 통해서 그 대답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성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로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온 우주가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두 다 저 창조주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하늘에서 땅 4
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이 모든 일들이, 즉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생명과 죽음 등등의 이 모든 생사화복과 영고성쇠가 모두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도 또한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정해진 고정된 법칙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즉 그 모든 일들이 즉 행이든 불행이든 축복이든 재앙이든 그 모두가 다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불행이라고 해서, 재앙이라고 해서, 불운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 무슨 하나님 이외의 존재인 마귀나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그 무슨 “판에 박은 듯이 미리 짜놓은 사주팔자나 또는 인간의 길흉화복과 인간사회의 영고성쇠를 도표에 다 그려 놓은 그 어떤 토정비결과 같은 그런 운명의 책이라는 것이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지 거기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만”이 계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은 모두 전적으로 그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의 자유로우신 뜻에만 달려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계시하는 첫 번째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답변은 매우 중대한 그 다음의 물음을 제기하게 합니다. 즉 절대주권을 홀로 갖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홀로 우리의 모든 운명을 관장하고 계실 뿐, 결단코 우리의 운명이 그 어떤 사주팔자와 같은 것에 얽매인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만일 그것이 그러하다면, 그 하나님, 즉 이 조화로운 세상사의 원 주인이시고 한 분 뿐이신 그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냐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오직 한 분 뿐이신 그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서 만일 선하시지 않고 운명의 장난을 즐기시는 정체불명의 도깨비 같은 분이시라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절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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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따라서, 우리의 문제에 대한 성서의 두 번 째 대답은 이러한 것이 됩니다: 즉 <저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의 역사활동의 근본목표는 결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라는 대답입니다. 언젠가 설교 시간에 저는 이런 성서의 답변은 일종의 “천기누설”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비록 때때로는 우리 인간을 채찍질도 하시고 재앙의 심판도 내리시지만, 그러나, 성서의 일관된 주장에 의하면, 그 하나님의 재앙과 채찍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의 교육수단일 뿐, 하나님의 근본 목표는 “인간 심판”이 아니라 “인간 구원”이었을 뿐이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악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복음적 증언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요한복음 3:17의 말씀으로 요약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진실되고 확실하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살기어린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들에게는 또한 자신을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셨다는 그 사실에서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거나 정죄할 수 없는 관계의 대표적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정죄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피를 나눈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기본 윤리는 분명 <그들 사이에는 정죄가 없다>라는 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 께서는 결단코 <자식>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라고 성서는 정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거기에 그 어떤 정죄나 심판이 있다면, 그 모두는 실상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훈련, 단련, 시련, 연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모든 운명적인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문제에 관한 한 완벽한 성서적 대답을 얻은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숙명적 운명은 거기에 없습니다.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사랑과 은혜의 자유 안에 들어 있을 뿐입니다. 운명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거기에 그 무슨 하나님 조차도 어찌하실 수 없는 그 어떤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운명록(運命錄) 같은 것이 감히 거기 있거나 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또 거기에 그 무슨 불 꽃 같은 눈으로 인간의 모든 부끄러운 죄상들을 살펴서 그 범죄자들의 이름들과 그 부끄러운 행적들을 일일이 다 적어 놓은 그 어떤 “하늘의 치부책(恥部冊)” 같은 것이 거기 있거나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거기에 그 무슨 심판의 칼날로 참형에 처해야 할 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하늘의 살생부(殺生簿)” 같은 것이 거기 있기나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자유로우신 사랑의 지배를 받을 뿐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그 사랑은 전적 으로 “어버이의 자식 사랑”이라는 은유(隱喩)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자유로우신 사랑, 그 무한하신 사랑의 본질은 영원히, 끊임없이, 그리고 결코 중단됨이 없이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시는 그것입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양육하시며, 지키시는 그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너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하나님께서 네 오른 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출입을 영원히 지키시리로다”(시 121:3-8). 그렇습니다. 그 어떠한 나쁜 운명도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떠한 운명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 7
님의 이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 시편 56편 시인은 감히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감히 어떻게 하리이까?>(4절, 11절) 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또한 이 시인의 고백과 동일 선상에 서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또한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로 대답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기근입니까? 벌거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 하겠습니까?>(로마 8:31, 35, 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와 사랑 안에(!!) 있는 자는 결단코 자신을 운명에 맡겨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심판하고 파멸시킬 운명이 있다는 그 어떤 운명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운명을 설정하시기도 하고 운명을 폐기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운명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것도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창조적 섭리 안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 바깥에 있거나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을 초월해 있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운명을 관장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면, “운명”이라는 것이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것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서가 말하는 바의 강조점은 전적으로 “사랑 안에!!”(έν τη άγάπη)라는 말에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Φόβος ούκ έστιν έν τη άγάπη 번역하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또는 좀더 축자적으로 번역하면 "두려움이란 사랑 안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됩니 8
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말을 “운명”이라는 말로 대치하여 표현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은 분명 “사랑 안에는 운명이란 없다!” 또는 “사랑이라는 사전 안에는 운명이라는 단어란 없다!”라는 말로도 번역하여 읽을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면 그 어떤 운명이든 운명이 결단코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숙명적 운명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있다면,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사랑만이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운명에 매어서 운명의 노예가 되어 전전긍긍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자유로우신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을 가로 맊고 있는 저 모든 운명적인 것들을 능히 이겨내며 그리고 이 토록 사악한 세상에서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언제나 그 모든 사악함을 이겨내어 승리하는 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운명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그 길 뿐이라 하겠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아무 뜻없이 사는 자처럼 운명에 복종해서 사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운명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두려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만 있으면, 우리의 믿음이 독수리가 날아 오르듯 날아 올라서 우리는 확고하고도 담대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끄는대로 마침내는 이루어진다!”라고 외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그 무슨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며 또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