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전설을 거스르는 신앙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성경본문

요한복음 5:1-11

설교문

    최근 얼마동안 저의 생각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참”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참”이냐는 것입니다.  이 방향으로 생각을 깊이 하면서 우리의 주위를 둘러 보면, 일종의 “위기감”(危機感)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참”을 위장한 “거짓” 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 보아도 “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마치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 코 앞에 닥쳐 왔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울부짖으며 외쳤던 말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그들이 비록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외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일 뿐이다”라고 절규하였던 말씀이 생각 납니다.  실로, 우리의 사회현실은 한 치도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일이 합리성을 잃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어떤 법칙와 원칙에 따라 진행이 되지않고 모두가 원칙없는 “힘의 논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법 보다는 주먹이 앞 서 갑니다.”
    “힘의 논리!!” 이것은 물론 우리 세계를 이끄는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엔과 같은 세계 최고 정치협의 기구가 내 놓은 “세계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도 또한 단지 겨우 “힘의 평형 논리”라는 것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을 정더입니다.  그러나, “힘의 논리”로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거짓 논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힘의 논리”는 정직과 진실, 그리고 합리성을 우선으로 삼지 않고 “물리적 힘”만을 우선으로 삼고 모든 것을 우선 “물리적 힘으로 규제해 놓은 후에 그것에 의지하여 진리와 비진리, 정의와 불의, 그리고 선과 악의 가치판단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거품 경제와 거품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IMF 재난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기업들이 “투명한 경영”을 하여야 하고 시장 경제를 포함한 국내외 경제운영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 목사나 신부나 스님과 같은 종교인들의 입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라!!  IMF 문제를 다루는 국제 경제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 공통된 견해요 간절한 호소였다 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잘 믿고 성경말씀대로 정직하고 진실된 삶을 살면 잘 살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놓으셨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과는 매우 역행되게, 오히려, 부정직하고 부진실하여 권모술수에 능통해야 비로소 부자도 되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지 정직하고 착해 빠져서는 이 세상에서는 백발백중 소외 당하고 왕따를 당하여 굶어 죽기 꼭 안성맞춤이라는 인식이 우리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교회나 절간 같은데 가서나 정직이니 진실이니 또는 착해야 하느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교회나 절간 문밖에서는 그 무슨 성경 말씀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하는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 대신 삼국지나 손자병법의 논리로 권모술수의 달인(達人)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이젠 우리 인간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되어 버렸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이제는 일부 부정직하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그 어떤 특정 소수인들의 처세 논리로서만 머물러 있지를 않고!! 시민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되어 버렸다는데                                 2
우리의 진정한 슬픔이 있습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시민사회의 일반 서민들은 물론이고 사회 지도자 급의 경제인들이나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정의(正義)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조인(法曹人)들도, 진선미(眞善美)를 교훈으로 삼는 교육 지도자들인 교사/교수들도, 그리고 진실과 정의를 생명 처럼 존중한다는 종교인들까지도, 마치 사전에 공모(共謀)나 한 듯이, 모두 예외없이 다들 한 통속이 되어 안면몰수하고 하나같이 힘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정의로운 법질서를 자신만만!하게 스스로 무너 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 사회가 이제는 “참과 거짓”의 구별이 깡그리 아예 없어져 버린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언젠가, 티비(TV) 프로그램 중,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라는 프로를 보는데, 보호색을 가진 여러 가지 다양한 물고기들이 도처에 몸을 숨기고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들을 소개하든 티비 나레이터(TV Narrator)가 하는 말, “도처에 사기꾼들이 도사려 있습니다!”라고 풍자적으로 비꼬든 말을 듣고는 “꽤 시사적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 사회도 이렇게 도처에 “거짓”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도 그 진위(眞僞)의 구분이 불투명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단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아래와 위의 구분이 불투명하고 좌(左)와 우(右)의 구분이 불투명 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구분이 또한 불분명하고 선과 악의 구분 조차도 불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최근 우리 나라 경제비리 게이트를 비꼬아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 말이, 김대중 대통령은 최규선씨를 너무 믿었고 최규선씨는 그의 자동차 운전기사를 너무 믿어서 결국은 운전기사의 배신으로 인하여 대통령까지 낭패를 당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되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믿을 일이지 무엇 때문에 사람을 믿다가 그렇게 낭패를 당하였느냐고 안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운전기사 하나 잘 못 믿었다가 나라 망신까지 당했으므로 앞으                                 3
로는 그런 비리를 행하려면 정말로 믿을 수 있고 의리가 있는 사람과만 모의하여 비리를 도모해야 승리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하기는 우리 사회에 밝혀지지 않은 비리가 이러한 상식 밖의 논리에 대한 어리석은 신념 때문에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진 범죄사실들이 한두가지는 아닐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서울 신학대학 입시부정 사건에 연루된 어느 충직한 학교 직원이 윗 어른의 불명예스러운 것이 폭로되어 성직자의 비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하여 모든 비밀을 혼자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을 해버리므로 그 입시부정 사건은 오늘까지도 해명되지 못한 미궁으로 빠져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관념의 오류 때문에 우리 사회의 기초가 그 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인간 이성의 판단오류, 잘 못 교육된 관념, 진리에 대한 신학적 판단이 결여된 잘못된 신앙, 등등이 우리 사회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념이 수습불가능의 자기모순(自己矛盾)을 불러 와 이 지구가 송두리째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마져 들 정도입니다.  말하자면, 참으로 종말론적인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 말씀도 또한 이러한 인간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이름 불리우는 못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이 하나 얽혀 있었습니다.  그 전설에 의하면, 하늘의 천사들이 간혹 그 못으로 내려와서 그 못의 물을 휘저어 놓는데, 그 때, 그 물이 움직일 때, 그 물 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간에 곧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베데스다” 못에는 오늘 날의 온천(溫泉)과 같은 그런 “간헐천”(間歇川) 현상이 있어서 “거품을 일으키는 물”이 간헐적으로 솟아났을 것으로도 추측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면서는 그 거품이 이는 신기한 물에 몸을 맨 먼저 접촉하기만 하면 무슨 병에 걸렸든지 간에 그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전설이 추가되고 그 못                                 4
에 깊이 얽혀지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까지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는 “진”(Jinn, Jinni)이라는 신령이 깃든 특별한 간헐천 (intermittent spring)에 대한 전설들이 이야기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본래, “전설”이라는 것은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도 추측 하건대, 그런 전설이 거기에 있기는 있어도, 실제로는, 10중 8, 9는, 아니, 10중 10 모두가 다 질병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로 끝나는 것이지 그 전설에 그 무슨 신빙할만한 힘이 있어서 그 전설 때문에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무지의 소산일 뿐입니다.  대체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면 그 대부분이 허위선전으로 판명됩니다.   황소 개구리 알이 몸에 좋다해서 그것을 날로 먹었다가 그 독성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어이없는 뉴스도 있었습니다만, 전설같은 떠도는 이야기에 얽힌 정보는 어떤 것이든 신빙성이 없는 것이 상례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못의 이름이 “베데스다”라는 것을 보면, 즉 그 이름의 뜻이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못이 지니고 있는 그 전설적 기능은 더욱 많은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 못이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쉽게 쉽게 생각하여 그 곳에 몸을 접촉하기만 하면, 더욱이, 늘 조용하기만 하든 못의 물이 예기치 못한 때 거품울 일으키며 요동할때는 그 못의 물에 몸을 잠그기만 하면 자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그런 심리적 최면(催眠)에 쉽게 빠질 수도 있었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자비의 집” “베데스다” 못 주변에는 행각이 다섯이나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자비를 기다리는 많은 환자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서, 일종, 이 못 주변과 그 행각에는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매우 절박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행스럽게도, 자비를 입고 병 고침을 받는                                  5
그런 실제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전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물이 움직이고 또 제일 먼저 그 물 속으로 뛰어드는 자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일어난 병치유의 기적은 거기엔 없었습니다.  역사적 기록도 또한 물론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설(傳說)은 전설로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지프려진 얼굴들과 기다림에 지친 얼굴들, 그리고 거듭 거듭 기다렸으나 전설의 허구성 만이 언제나 사실로 드러나므로 인한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얼굴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본질상 늘 이러한 좌절의 현장으로 찾아 와서 그 전설이 지닌 허구를 깨뜨려 주고 또 생명력이 있는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은 이 곳을 찾아 오셨고 이 희망 없는 현실을 직시하시고는 그냥 지나쳐 가지 않으시고 여기 이 곳에 있는 헛된 전설신앙에 붙들려 있는 자들에게 생명력있는 진리를 가르치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38년 간이나 병마에 시달려 온 한 환자를 찾아 가셔서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낫고 싶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 상황의 심각성을 더욱 절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질문의 포인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체 다음과 같이 동문서답하듯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다가 저 못에 넣어 주는 사       람이 없습니다.  내가 내려 가는 사이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그 못으로 들어 갑니다.”
이것은 명백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낫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그 환자는 못의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그 못에 넣어 줄 자가 없는 그 외롭고도 불행한 상황을 탄식하고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결코 여기서 저 허구적인 전설에 대한 신앙에 관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6
지, 예수님은 오직 그 환자가 갖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만 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의 고민을 함께 고민하며 그 치유에 대해서만 관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동문서답적인 태도가 바로 이 세상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6절 이하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이러하였습니다: 즉 “[빛이신 예수님의 그] 빛이 세상을 향해 비치고는 있으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 그가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세상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세상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에게 참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즉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쳐 주셨지만 세상은 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천박한 약자논리로만 오해하고 그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까지도 인간들의 이 오만과 착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 즉 성서의 말씀에 대해서는 동문서답하며 딴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세계의 모습입니다.  그저께의 어느 일간 신문에서는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현실이 오늘의 한국의 정치현실이라고 개탄하는 어느 논설위원이 이러한 한국의 정치현실을 가리켜서 “거대한 정신병동(精神病棟)”이라고 혹독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DJ 죽이기” “YS 죽이기” “이회창 죽이기” “노무현 죽이기” 해서 툭하면 “누구 누구 죽이기”에 열을 올리는 “광기(狂氣)에 휩싸인 한국의 정치세계”, 그것은 마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 사이에는 대화가 단절되어 상호간에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정신병동처럼 오늘의 한국의 정치현실도 또한 어느 누구도 상대방 죽이기의 광기어린 폭언들만 쏟아 내었지 그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                                 7
지는 않는다> 라고 매우 강한 톤으로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만, 동문서답, 즉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남 죽이는 자기 이야기만 거품울 토하면서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한국의 정치현실, 이것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거대한 정신병동”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여기 38년간 병상에 있었던 이 환자의 동문서답도 바로 이러한 대화상실의 인간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환자의 어이없는 동문서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환자를 그 누웠던 병상에서 일으켜 세워서 그 누웠던 자리를 걷어 가지고 자기 길을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의 사실을 증언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즉  <“자비의 집”으로부터 치유의 자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시고 빛이신 그 “예수님”으로부터 은총의 자비가 왔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하여 두 실체의 극명한 대립을 봅니다.  그것은 전설신앙의 철저한 허구성과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의 철저한 진실성 사이의 극명한 대조(對照) 현상입니다.  전설은 전설이요 구세주는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전설과 구세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설 신앙과 구세주 신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메세지가 강조하고 주장하려는 핵심입니다.
  이러한 대조적 모습이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나타난 그 첫 번 째 실례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절, 즉 10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안식일 제도의 준수를 인간생명의 구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38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 온 사람이 꿈에도 그리든 건강을 되찾고는 그 지긋지긋한 병상에서 일어나, 그 38년간 누웠었던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며 건강회복의 기쁨과 그리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이 신생(新生)의 기쁨을 노래하는 일, 비록 이토록 기쁜 구원사건이라 하더라도 안식일에는 그것도 일이니까 해서는 안되는 금지된 일이며 안식일 법을 어기는 범법행위이다”라고 상식 이하의 주장을 하는 율법주의 신앙의 이 허구성이란 정작                                 8
진리이시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냐 하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이 강력하게 중언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베데스다 못에 얽힌 전설적 신앙을 여기서는 율법주의 신앙의 허구성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증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 즉 하나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 이른 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의 병든 곳을 고치는 구원사역보다 종교형식으로 인간을 규제하고 종교교리에 인간을 얽어매는 인본주의적 공로주의/공적주의 종교를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된 허구적(虛構的)인 信仰(신앙)이냐 하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율법주의 종교, 즉 인간을 종교교조에 얽어매는 종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종교, 사람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종교의 형식과 교조에만 관심하는 종교, 사람을 용서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바뀌게 하는 사랑의 역사가 없는 종교,  종교교리의 잣대로만 사람을 심판하는데 열을 내는 율법종교는 생명력이 없는 허구(虛構)라고 하는 것이 우리 본문이 말하려는 그 근본 의도라 하겠습니다.
    불교의 가르침도 또한 매우 심오한 철학을 담고는 있으나, 인간의 공적주의에 운명을 거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일 뿐입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애써서 자기를 갈고 닦아야 인간이 비로소 “깨달음”[覺]을 얻게 되고 또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말하고는 있지만 신의 자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공덕을 말할 뿐입니다.  율법주의가 또한 그러 하였습니다.
    인간 공적주의는 가히 환상적이고 전설적이며 신화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원의 은총이 없습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신념에서처럼,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신(神)이 될 수 있는 무한 가능의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은 허구입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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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창조주도 아니요 조물주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비록 힘쓰고 애써서 저 거품이 이는 신비한 못 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질병이 치유함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정치가들의 헛된 구호와 거짓 변명처럼 허구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이 필요합니다.  진실된 자기정립이 필요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38년 간이나 병마에 시달려 온 무력한 인간입니다.  주여, 주님의 은혜로 나는 낫기를 원합니다.  나는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교육받아 회개하고 새 사람되기를 원합니다.  저 못의 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움직일지라도 그것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바로 서야 비로소 살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 낫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의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본문이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전설 신앙이 우리를 살리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만이 우리를 얽어맨 모든 인생고의 멍에와 율법주의 종교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다.  나의 은총의 멍에는 메기도 쉽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으라.  허상을 보지 말아라.  신화를 믿지 말아라.  전설을 의지하지 말아라.  정치가들의 헛된 공약에 희망을 걸지 말아라.  거품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못 속으로 들어가는 허황된 일을 함으로서 그 무슨 구원받는 “지름길”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말아라.  그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속임수다.  전설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과 모방 만이 사는 길이다.  그 길 만이 38년 간 나를 괴롭힌 저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를 벗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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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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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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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