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4:1-5,8-10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그가 대답하였다.“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주님께서 말씀하셨다.“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아멘.
사도행전 6:1-6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서 음식 베푸는 일에 힘쓰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아멘.
마태복음서 6:1-4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예배시간이지만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동북아 불교와는 달리 동남아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이름 합니다. 얼마 전에 그리고 어제도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에 대해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어 시청했습니다. 어제는 라오스에 있는 불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린 동자승들이 승려가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동자승이 되는 것인데, 그 나라에서는 그렇게 동자승이 되는 것이 영광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훈련 과정 중에 아침에 일어나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소위 먹을 것 동냥하러 다니는 그런 순서였습니다. 아이들이 해맑은 얼굴로 그릇 하나씩을 들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찾으러 가는 모습마저도 아주 해맑고 좋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내는 아빠, 엄마, 친척들이 동자승에게 주는 아름다운 아침 헌물, 선물을 준비하는 아빠, 엄마의 얼굴이 저렇게 좋을 수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지나 갈 때 마다 밥도 넣고, 사탕도 넣고, 많이 넣습니다. 마지막에 보니까 너무 많이 받아서 동자승이 가지고 있는 자루가 넘칩니다. 그래도 좋다고 웃습니다. 그러면서 옆에는 “이것은 우리만 먹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눠 먹습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습니다. “참 착한 동자승(들)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또 이웃이 어린 동자승에게 헌물을 받칠 때 받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봤습니다. 제가 그렇게만 봐서 그런지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헌물만 받치는 것이 아니라 이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함께 받치는 구나!”. 자연스럽게 동자승이 받아 맛있게 먹는 것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는, 소위 이런 자선행위가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이걸 통해 불자가 되어, 불성을 닮아 세상을 보람되게 살자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오늘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마태복은의 본문 말씀을 다시 생각 했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랑하듯이 자선을 베풀지 말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로 자선을 베풀라.” 이 말의 핵심은 자선을 베풀 때 물건만 베풀거나, 그 받아먹는 사람을 물건 받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 물건을 줄 때 진심을 담아서 주면 받는 사람은 물건도 받고, 지성(至誠)도 받는다는 뜻입니다. 말을 바꿔서 이야기 하면 베푸는 사람은 자기가 일해서 번 것을 헌금으로, 물질로, 헌물로 베풉니다. 그러나 베풀 때 그 속에 베푸는 사람의 마음, 인격, 사랑, 생각 모든 것을 담아라. 물건 속에 사람을 담아라. 받는 사람은 물건을 받는 게 아니라, 베푸는 사람을 함께 받는 것이다. 생각을 담는 것이다. 이런 듯이죠. 물건은 혼이 빠진 물건이 아닙니다. 물건 속에 혼이 있고, 정신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 때는 혼, 정신, 생명, 마음을 함께 담아 베푸는데, 그 마음속에는 베푸는 사람의 마음만 있는 게 아니고, 물건을 드리는 사람의 인격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인격 속에는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가 있읍니다. 신성이 인성에 담겨 있읍니다. 우리가 물건, 제물, 소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다시 베풀 때 버리지 말고 은혜를 함께 담아서 주어라고 하십니다. 헌물 속에는 인간이 있고, 헌물 받치는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래서 받는 사람은 물건을 받고, 사람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성, 신성을 함께 받습니다. 그 만큼 우리의 구제행위는 하늘도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이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면 주심에 감사하여 베풀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식으로 함께 베풀어야 한다.”
오늘 아름다운 성가대 찬양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찬송을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합니다. 물론 사람이 합니다. 여러분 찬양을 듣고, 찬송을 부르면서 감동을 받지요. 노래 소리에 감동받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래 부르는 사람의 정성 때문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소리 속에 진한 생명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실 때는 담순히 기도내용 때문에 응답하시는 게 아니고, 기도 속에 담긴 지성 때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 창조의 뜻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프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드리는 인간을 너무 좋아하십니다.
오늘 창세기 말씀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님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고, 동생은 유목민입니다. 형 가인은 하나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정성으로 바쳤습니다. 동생 아벨은 유목민이니까 첫 배를 잡아 하나님께 받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형인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수납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상상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답은 하나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열납 하셨다.” 한 마디 답입니다. 그 말은 가인은 믿음을 드리지 못하고, 물건만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물건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가인의 인간 그것이었습니다. 자기의 형상을 닮은, 자기의 신성을 가진 거룩한 사람 가인이 하나님께 받치는 정성을 요구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믿음 없음, 정성 없음을 보고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제사, 예배, 자선, 모든 일은 언어와 행실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언어와 행동, 속과 겉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이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 하나님께 물건만 드리고, 물건의 혼은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답은 단순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물건만 드리는 게 아니라 자기의 혼을 드리는 것이 믿음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홀로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우리 안에 계십니다. 내/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우리는 그것을 내/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은혜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내/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오셔서 나/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없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에서 내/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말하는 것이지 내/우리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 사업, 사회 모든 영역에서 너무나 많은 언어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듣는 사람이 정말 듣고 싶은 언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표정, 진심, 그 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됨일 것입니다. 언어만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건만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건을 받을 때는 주신 분의 마음을 함께 받고,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아벨처럼 살기보다 가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할 때 가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 저 때문에, 저의 언어 때문에 상처 받은 분이 계신다면 용서하십시오. 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발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제 언어를 통해서 표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언어로 고쳐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상생활, 사회생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된 삶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함께 하는 삶,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고, 열납하시고, 축복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오늘 우리한테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물건이 없나요? 너무 많습니다. 도구도 너무 많습니다. 인간군상도 많고, 세상의 문명도 많고, 다 많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냥 단순히 말하면 일, 물건, 제도는 많은데, 한가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사람은 있는데, 하나님의 형성을 닮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진심을 담은 사람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비판, 우리의 자각은 모두 다 공유할 수 있습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을 빌어서 자기의 형상을 담을 인간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받치는 제사는 당연히 열납하십니다. 혹시 제사를 많이 받쳤는데, 많이 헌신 했는데, 많이 봉사했는데, 답이 없고,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 속에 마음까지 받쳤는지 한 번 반성해 보시죠. 아니면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으나, 하나님이 진실로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반성해 볼 수는 없습니까? 사람을 받치며 제사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이한 운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물건을 함께 바친 아벨은 죽고 없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는 아벨이 성경에 쓰여 있어서 알 뿐입니다. 실제로는 아벨은 이미 죽고 없으며, 흔적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흔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조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벨이 아니고, 가인입니다. 가인이 우리의 조상이고, 우리 믿음의 선조입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벨 같은 사람을 우리의 조상으로 삼지 않고, 왜 가인을 조상으로 삼았을까요? 하나님의 뜻인가요? 아닙니다. 사람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소리칩니다. 하나님, 제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죽일 텐데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은 가인의 후속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는 살려주마. 죽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살려주마. 내 약속을 믿고 살아라. 그러나 회개하며 살아라.”
우리 조상은 가인이어서, 그 조상의 죄악을 우리가 담고 살고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인의 후예인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주셨다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가인만을 생각해서는 구원을 베풀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인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직접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라 이름하는 자기 분신을 보냈습니다. 성탄절에 "예수"가 우리에게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 합니다. 화육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한테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가인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세상성공의 역사 속에, 실패의 역사 속에, 고난 속에서도, 기쁨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계신 예수 이름으로 행함을 고백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만 계시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암ㅎ습니다. 우리를 넘어서도 계십니다. 하늘이 이 땅에만 있다고 그러면 하늘이 이 땅에 종속 됩니다. 그런데 하늘은 이 땅에 있지만 동시에 이 땅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 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우리가 철학적/신학적으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인간의 세계 속에 "내재"하시지만 동시에 "초월"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럼 "초월"이 무엇입니까? 가인을 생각해 봅시다. 가인에게 있어 초월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는 내가 있습니다. 당신은 내 밖에 계시죠. 가인에게 하나님은 안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가인 밖에 있는 객관적, 절대적 신입니다. 그러나 아벨에게는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우리를 관여하시기 때문에 내/우리 안에서 나/우리를 지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세상 속에 같이 있지만 세상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아벨의 하나님입니다. 가인의 하나님은 세상에 안 계신, 세상에서 쫓겨난, 세상과 관련이 없는 완전히 초극하시는 신일 뿐입니다. 그런 신을 가인이 믿었으나, 성경에는 그런 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서 초월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모르거나 잊고살아가는 삶입니다. "아네서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이 분이 우리가 말하는 초월의 하나님이십니다. 밖에 내 쫓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동시에 우리 위에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때, 물건 나눠 주는 일로 갈등이 있었을 때 "집사들"를 뽑아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 때 섬발의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이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말은 이 땅을 세상의 잣대에 더하여 하늘의 잣대로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충만한 사람은 지혜와 덕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교회만이 아니고, 온 세계의 지도자들이 이와같은 품성을 지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부르십니다. 이제 아벨은 죽고, 남은 가인에게 하나님이 명을 주시고, 약속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가인아, 네가 어디야 있느냐?” 이렇게 부르는 게 당연한데,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람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묻지 않고, 사람아 너와 함께 사는 동족들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합니다. 함께 삽니다. 남편아, 네 함께 사는 아내가 어디 있느냐? 아비야, 네가 함께 사는 자식이 있느냐? 자식들아, 너희가 함께 사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저/우리 혼자를 두고 묻지 않고, 공동체로 묻습니다. 내 사랑하는 동족이 어디에 있느냐? 제/우리가 동족을 죽이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동족의 피가, 동생의 피가, 이웃의 피가 자기한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함께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사는데, 목적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동생 안에 있고, 형 안에 있고, 누나 안에 있고, 자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를 만들어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나 꼭 드려야겠습니다. 1960-70년대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강했습니다.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비판도 많습니다. 단 한 가지 그 분들에게서 배워야 할 요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불쌍해서 돕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짓눌린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 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 배고프고,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 목마르다고, 그 분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 너무 짓밟혀서 아프다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의 밥 달라는 음성으로만 듣기보다, 그 사람 속에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요구는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라고요. 저는 그것은 아주 훌륭한 깨우침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 중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고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 속에 계신 하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었으면 회복합시다.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병자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삶을 평가했을까요? 아주 단순한 이야기 하나만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유리컵에 물을 반쯤 담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이 물 속에 담았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직도 물이 없는 빈 공간이 이렇게 많은데...” 하고 불만을 표시하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방법은 “ 벌써 이 만큼 채워 주셨군요”하고 고마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혼자 만으로, 또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평가하는 방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가인은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직도 빈 공간이 이렇게 많은데 겨우 이것만 주세요?” 하면서 제물을 받쳤을 것입니다. 아벨은 “제가 무엇 이길래 이 만큼이나 주셨습니까!” 하면서, 감사합니다. 이만큼이나 채워주셔서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은 이 땅위에 편만합니다. 여러분, 믿음 있는 만큼 받으십시오. "이만큼 이나" 많이 받으셨으면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베프신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 하나님이 늘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