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영광의 공동상속자

2012년 8월 26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28:10-19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아멘.

로마서 8:14-17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40-45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그러나 그는 나가서, 모든 일을 널리 알리고,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아멘.
 
설교문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은 특별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나라를 유산으로 받습니다. 상속자입니다. 상속 받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또 상속 받으려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믿는 자에게는 항상 정해주신 하나님의 유산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 유산을 받으십시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상속과 하나님 나라의 유산은 자녀 혼자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입니다. 여러분이 홀로 하나님 축복 받으시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함께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혼자에게 주는 축복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받는 축복도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받은 축복에 감사하여, 이웃과 나누게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것을 제 곳간에 넣어두고, 저 혼자만 보관하라고 주신 축복은 하나도 없습니다. 받으면 받은 것을 남기지 않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동 상속이라고 이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공동으로 받는 은혜지, 홀로 받는 은혜는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외국여행 가셔서 시내 관광할 때 마차 타보신 적 있으십니까? 마차를 타면 보통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끕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타는 큰 마차는 말 두 마리가 끕니다. 말 두 마리가 마차를 끌면 끄는 힘이 두 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프랑스 심리학자인 막시밀리앙 링겔만은 1913년 마차를 한 마리 말이 끌때와 두 마리가 끌때의 힘을 비교해 봤더니 힘이 딱 두 배가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의 힘도 측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야유회 가시면 줄다리기 하시죠? 링겔만도 줄다리기 실험을 했습니다. 동아줄을 가운데 놓고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측정했습니다. 두 사람이 전심을 다해 끌어당기는 힘을 놓고 측정을 했습니다. 둘이 합하면 딱 두 배가 되어야 하는데 측정해 보니 두 배가 안 됩니다. 둘이 끌었더니 각기 93씩 밖에 안 됩니다. 세 사람이 끌면 얼마 일까 실험을 했더니 일인당 85밖에 되지 않습니다. 계속 내려서 여덟 사람이 양쪽에서 끌게 했더니 한 사람당 49 정도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몸이 가진 힘이 약해진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라 정신적인 힘 발휘의 차이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나홀로 운명을 개척하면 사력을 다해 동아줄을 끌어당기듯 힘을 쏟지만, 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당신이 있으니까” 라고 믿고 의지하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 자신이 내 뿜는 힘이 적어진답니다. 링겔만은 “공동체는 참 좋은 것 같은데, 구성원 마다 산술적으로 곱해서 공동체 힘이 나오는 게 아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공동체 인원 수 만큼의 힘이 나오려면 참여자의 육체적인 힘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이것을 모을 수 있는 집약된 힘이 필요할텐데, 그 힘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답을 오늘 본문인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데 한 사람에게 상속하지 않고, 열 사람에게 상속 했다고 합시다. 상속 받은 열 사람은 모두 다 통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모자라는 힘은 성령을 통해서 주신다고 되어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해야 내가/우리가 받은 모든 재능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습니다. 유산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에게 주셨고, 그렇기에 우리는 내/우리 힘만 의지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 발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함께해야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상속의 축복을 주시면 혼자 누릴 생각 하지 말고, 함께 공동으로 누려라. 그런데 사람끼리만 하늘 축복을 누릴 생각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갈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상속은 공동상속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방식이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꼭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보이시나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제가 하나이고,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제가 다른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를 몸이라고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저를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학문적 용어로 ‘육’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것을 ‘영’이라고 이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고, 이성으로 검증 하고, 현미경으로 조사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도 현미경에 나타나지 않는 또 다른 인간, 즉 인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 났다며, 그 형상의 주인을 "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적인 것을 타고 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적인 것을 타고 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감성, 지성, 이성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작용하고 있고, 눈으로 감지하지 못하지만 역사하고 있는 하늘 뜻과 씨앗을 선물로 받습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함께 선물로 받아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는 하늘 축복을 유산으로 곧 상속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을 믿는 다는 뜻이 아니고, 제가/우리가 예수와 함께 이 땅에서 하늘을 상속받는, 하늘나라의 복과 하늘나라의 이야기와 하늘나라의 삶을 공동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이 주신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마가복음의 말씁대로 나병환자를 치유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 밤에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 집을 짓는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나병환자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 왔습니다. 예수여, 저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나요라고 하며 호소합니다. 나병이라는 이유로 인해 하나님 나라 상속이 안 됩니까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만예수님은 "나병을 고침받아야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 때문에, 이로 인한 인간적 사회적 소외 때문에 이웃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할 수 가 없습니다. 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유는 병 고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병을 고쳐서 하나님 나라 상속자로 함께 세워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나병환자로 있을 때는 공동체 삶의 가능성이 막혀 있습니다. 하늘 축복도 그런 세상에서는 막혀있습니다. 상속은 고사하고 공동체 소속의 길도 막혀 있습니다. 막힌 것을 헐고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려면, 병을 고쳐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병 고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병을 고쳐서 하늘 상속자로 삼아 주시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 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병고침입니다.

우리교회에 의사선생님들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들 많이 계시죠? 저도 환자로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왔습니다. 제 경험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병원은 어떤 곳인가요? 병원은 병을 고쳐 주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절반밖에 맞지 않습니다. 병원은 뭐하는 곳이냐 하면 환자에게 병 고침 이후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미래를 열어주는 곳입니다. 의사는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병을 고치고, 암을 걷어 내고 치료해 주고, 병을 낫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절반 밖에 맞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의사는 환자의 질병 고침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미래 삶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 병 치료 하실 때 병 고칠 생각만으로 치료하지 마시고, 환자에게 하늘이 준 생명의 미래를 의술을 통해서 열어준다고 생각하면서 치료하십시오.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병 고침받는 병자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늘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기회와 모든 것을 열어주마. 삶의 미래를 열어주마. 예수님의 병 고치는 역사는 미래를 열어주기 위한 역사입니다. 환자와 의사, 어제와 내일,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내가 미래를 보장한다”는 약속입니다. 그 미래는 하늘의 축복을 유산으로 받는 미래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받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이 미래를 개척해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이라 물으면 그리고 상속자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물으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미래를 은혜로 채우는 일입니다라고 답할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 은혜로 미래를 채웁니다. 가족이 채웁니다. 형제자매가 채웁니다. 이웃이 채우고, 모두가 함께 열려 진 미래를 채우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시면서 그런 미래를 주시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쳐주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열린 미래도 축복으로 제공한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미래가 어둡다고 하는 사람, 혹시 내일에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나라 상속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예수 잘 못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 그런 성령님, 그런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없습니다. 반드시 미래를 열어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 유산을 채울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저는 요즘 한국·일본·중국이 영토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북아시아에 하나님 나라 축복을 주겠으니, 세 마리 마차로 끌고 가거라고 하십니다. 열심히 해도 각기 100 힘발휘가 안될 판인데 서로 갈등하다보니 말 세필이 서로 날뜁니다. 마차가 잘 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더 필요할까요? 제 생각에는 세 마리 말의 한계를 뛰어 넘는, 보이지 않는 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역사를 발견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역사가 세 나라에 임할 때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 갈등도 풀고, 죄 지은 것은 사죄하고, 사죄하면 용서하고 서로 합의해서 성령과 함께 말을 끌어가면 동북아는 하나님 나라 축복받는 상속의 역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동북아 선교에 나서자 하고 나가는 것의 의미는 “예수 믿는 사람 많이 만듭시다.” 는 말이 아니고, 세 마리 말이 동북아를 주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동산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 이름이 전달되는 곳에 바로 이런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있고, 그 가운데 함께 공동상속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의 미래고, 이런 일 하는 것이 선교라고 믿습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미래가 중요합니다. 내일이 중요합니다.

어느 분이 연구한 결과 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백 원을 잃어버리면 실망이 큽니다. 잘해서 백 원을 벌면 기쁨이 큽니다. 기쁨의 크기와 실망의 크기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무겁겠습니까? 연구결과는 잃어버린 감정이 얻은 감정보다 두 배나 무겁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병도 빨리 고쳐야 새로운 날을 보장 받는 것이지요. 잃은 것을 채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얻어도 회복이 없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니까 이런 뜻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씨가 추울 때 온도계에 나와 있는 날씨보다는 체감온도가 훨씬 더 낮지요?. 물건 값이 비싸면 시장가격보다 체감물가가 훨씬 비싸지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정적인 것이 훨씬 괴롭고 힘듭니다. 이것을 고쳐주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병을 고친다는 말입니다. 부정을 빨리 극복하고 열려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십자가 은총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실제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병자를 고치면서 예수께서 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름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을 세대별로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 사람 이름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주관 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씁니다. 야곱이 하나님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와 싸우고-풀죽을 먹이고 장자권을 빼앗아 도망갔다가-돌아오는 길에 산에서 잠을 자는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돌을 베게삼아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다리 윗편에 계시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하나님이 사다리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주었던 나라를 너에게도 주겠다. 이 나라를 역사 대대로 이어가면서 함께 축복으로 삼아서 이 땅에 살아라.” 야곱이 얼마나 고마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너무 좋아서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를 기둥삼아 집을 짓고, 그 집을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말합니다. 집은 베드, 우리도 침실을 베드라고 하죠. 하나님은 엘. 그래서 벧엘(Beth-el)이 됩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의 벧엘입니다. 제가 사는 집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 집의 이름은 벧엘 입니다.” 벧엘은 야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상징으로 주어지는 축복의 언어입니다. 우리 자신이 벧엘이고, 사는 집이 벧엘이고, 내 가족이 벧엘이고, 이 나라가 벧엘입니다.

그 벧엘에는 무엇이 있나요? 중요한 이야기는 사다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집은 항상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합니다. 이 사다리 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다리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이 집에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사다리는 무엇일까요? 물론 야곱이 본 사다리 비유는 당시 하늘과 연결되는 가장 좋은 도구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행기가 나오던지, 아니면 인터넷이 나오던지 그랬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다리는 하나님이 우리하고 소통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도구라는 것입니다. 사다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다리입니다. 사다리는 실제로 무엇일까요? 보이는 것은 사다리이고, 보이지 않는 사다리 뒤에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다리는 하나님 자신이랍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4장 8절과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다리 자체이신 하나님은 귀신도, 영도 아니고,"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사다리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결혼하고, 헤어지고, 싸우고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 이름 하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통로입니다. 이 사랑의 통로에 대해서 로마서 8:38-39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하늘같이) 높음도, (바다같이)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중대한 말씀입니다. 죽음도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죽은자를 부활시키는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하늘과 땅을 메주는 힘도 사랑의 힘입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힘도 사랑의 힘입니다. 온 세계만민이 하나님과 함께 소통하게 하는 힘도 사랑의 힘입니다.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사랑을 너무 값싼 언어로 쓰지 마십시오. 사랑은 한때 누리다가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사랑은 십자가 사건에서 처럼 자기 목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성서는그 사랑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으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읍시다. 사랑은 그 만큼 강합니다. 그 사랑 속에서 죽은 자와 산자가, 산자와 죽은 자가 사다리를 통해 소통합니다. 하늘과 땅도 소통합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소통합니다. 아마 위에 있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땅에 있는 사람만 보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하늘은 보이는 땅 속에 임재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사도바울이 하시는 말씀이 곧 여러분 이렇게 소통하며 누리는 상속을 영광의 상속이라고 하십시오라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상속은 여러분이 누리도록 주셨지만, 완전한 상속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공동상속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행복입니다. 가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상속받으시지요. 깊게, 넓게, 높게 즐기도록 역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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