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12장 15~16절
설교문
전쟁이 한창이던 때 어느 부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교가 전투 중에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보다가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가 애타게 물을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 중이라 물이 귀했지만 장교는 자신의 수통에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내주었습니다. 목이 무척 말랐던 그는 무심코 마시려다가 동료 병사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모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이 귀한 상황이라 모든 병사들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수통을 입에 대고 꿀꺽 꿀꺽 소리를 내면서 물을 마신 후 다른 병사에게 수통을 넘겼습니다.
수통을 넘겨받은 병사가 마시려고 보니 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깊은 눈빛으로 동료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꿀꺽 소리를 내며 맛있게 물을 마신 후 수통을 또 다른 병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며 모든 병사들이 물을 마셨습니다.
마침내 수통이 장교에게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수통의 물은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고 더 이상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갈증을 해소한 것은 물이 아니라 뜨거운 동료애였습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랑 가운데 자신을 양보할 줄 아는 헌신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때 교회는 하나 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근자에 한국의 상당히 유명한 교회들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은 신자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과오가 마치 저의 과오인 것 같아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은혜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떤 삶을 살아야 교회와 사회 모두에 공헌할 수 있습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배워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1.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15절).
언젠가 교계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신 분의 취임감사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취임하게 되는 분은 교계에서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설교하는 분도 교계에서 인정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한참 풀이하다가 갑자기 그 취임하는 분에게 “본래 시골 촌놈이며 별것 아닌 사람인데 이 높은 자리를 얻었으니 목에 힘주지 마세요”라며 소리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설교자는 “자기는 친구니까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이 말을 꼭 들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취임하시는 분은 얼굴이 홍당무 같이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설교자가 취임하시는 분께 한 말씀은 그 자리에서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디서 출생했건 그것이 흠이 될 것이 없는데, 그것을 어찌 큰소리까지 지르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설교하시는 분의 취임하시는 분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공개적으로 토로된 것이어서 그 자리는 몹시 씁쓸한 자리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을 내 것으로 여기고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잘 되면 오히려 마음이 상하고 시기하여 분노하고, 다른 사람이 잘 안 되면 좋아하곤 합니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비도덕적인 행동입니다. 성공은 정당한 성공이 있고, 정당하지 못한 성공이 있습니다. 후자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기에 참된 성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성공을 부러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성공한 것이라면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당하고 합당한 기쁨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우리가 가지지 못한 남의 성공에 함께 동참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죄악된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새사람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기하지 않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이고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의 지체가 되면 우리는 성령을 받아 사랑, 희락, 화평, 온유 등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런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기 때문에 타인의 성공을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지체이기에 성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처럼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12:26).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2. 서로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16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16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신자들이 모든 일에 생각을 같이 하고, 하나가 되어 일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환상적인 실험'이란 제목의 실험이 있습니다. 이 실험은 한 사람의 지도자를 통해 집단이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험의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은 정말 보통의 학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도'라는 집단에 속하면서 아이들은 폭력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실험은 파도 회원증, 파도 마크, 파도 경례 등을 함으로써 공동체의 소속감을 갖게 했습니다. 파도가 아닌 사람들은 파도 회원들과 차별을 두게 하였고 파도를 거부하는 소수들을 협박, 폭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실험 3일만에 30명에서 200여명으로 회원 수가 급증했습니다. 실험 5일째가 되던 날 이 실험은 이 실험을 계획한 역사교사 벤 로스가 파도 운동의 창시자의 영상이라며 학생들에게 독재자 히틀러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이 실험을 계획한 교사는 실험 종료 후에 자신도 이 지배자의 역할에 매료되어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실험은 '나치의 시대에 왜 일반 시민이 침묵하였나?'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물어본다면 분명 모두 끔찍한 살인자, 정신병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 당시의 독일 국민은 정작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당시 독일 국민이 나찌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과 일체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입장으로 바라본다면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자신이 그 집단에 소속된 상태에서는 그 행동마저 우월감과 소속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집단이 파괴되고 난 뒤에 사람들은 왜 자신이 침묵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체로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우월감을 느끼고 개인이었을 때보다 더 과감해지는 것을 우리의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획일적인 가치를 아무런 비판 없이 자신의 가치인양 받아 들여 다른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데에서 전체주의가 생겨납니다.
“모든 일에 생각을 같이 하고, 하나가 되어 일을 하라”는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생각에 반대되는 의견을 폭력적으로 거절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는 전체주의를 부추기는 논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권면의 말씀은 차이와 다양성을 무시하고 한 가지 생각이나 행동으로 무장하라는 전체주의적인 권면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성을 무시하면 결코 안 됩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연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즉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위대한 진리입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상호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할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16절).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요한과 야고보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때가 가까워지는 줄 알고 그 나라가 오게 되면 자신들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어찌 너의 형제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올라 오셔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누구도 예수의 발을 씻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발을 씻어 주면 그 공동체에서 제일 뒤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놀랐고 그럴 수 없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종과 같이 비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섬겨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높은 자리에 너무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를 무리하게 바라보아서도 안 되고, 오히려 거룩한 멸시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합니다. 실상 이것보다 더 크고 높은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낮고 천한 자리에 내려와 죄와 사망으로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인간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낮은 사람에게 겸손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나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더욱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만심에 빠져 있는 한 남에게 겸손할 수 없습니다.
전북 김제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조덕삼이라는 지주가 있었고 그의 집에 머슴으로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주 조덕삼이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는 교회에 갈 때 언제나 말을 타고 갔습니다. 머슴 이자익도 주인 어른을 모시는 마부로 교회에 나가 주인이 예배드릴 때 그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상당 기간이 지난 뒤 그 교회에서 장로를 피택하는데 지주 조덕삼은 떨어지고 머슴 이자익이 선출이 되었습니다. 이자익은 머슴이었으나 믿음과 인품이 훌륭해 교인들이 그를 뽑았습니다. 지주 조덕삼은 너무 자존심이 깎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마음을 절제하고 머슴 이자익을 교회에 와서는 장로님으로 존중해 주었다고 합니다.
후에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 장로를 평양에 유학을 시켜 목사로 키웠고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오랫동안 섬겼다고 합니다. 조덕삼은 너무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기품로 인해 그는 한국 교회사에 길이 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주와 머슴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 지주 조덕삼이 머슴 이자익을 존경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주 조덕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기에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하며,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함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하며, 겸손하게 남을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한 행동을 내 것으로 만들어 참된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