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3:19-24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아멘.
히브리서 10:36-39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7:11-16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주셨다”하였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지금 창조절 중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창조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은총이 감사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가 왜 이렇게 일그러지고 있는지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계절은 사주기로 바뀝니다. 시작이 봄이고 봄-여름-가을-겨울로 바뀝니다. 그런데 갈수록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 특별히 여름이 자꾸 길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창조절은 가을에 들어서는 때입니다. 가을이 조금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실도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많이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인생의 계절 가을에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는 게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인생도 계절이 있으며, 그것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합니다. 꼭 그렇게만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로병사가 있는 것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에서 사까지의 계절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낼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노가 많아서, 병이 많아서, 고난이 많아서 하나님께 애타게 탄원하면서 지내는 분은 없으십니까? 세상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레미야 애가서를 봉독할 때 들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은 나라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를 압박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나라까지 빼앗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 백성의 아픔을 호소하고, 동시에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서이고, 그중에서 당한 고통과 아픔의 이야기를 따로 모아서 “정말 슬프다. 비참하다.” 이렇게 당할 수가 있나 해서 자기 백성이 당한 모습을 본대로 적어 놓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다섯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오늘 읽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할 때 사건 하나하나를 기록하는 것도 있지만, 사건 전체를 보고 문학으로, 시로, 수필로, 고백으로 적어 놓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애가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사람, 더 나아가 민족전체가 당한 아픔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적었습니다. 집에 가셔서 예레미야 애가서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읽으실 때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먹고는 살았을까? 숨을 쉬고는 살았을까? 마실 물은 제대로 마셨을까? 어머니는 자식을 보듬을 수 있었을까?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읽어 보시고, 전쟁 때 우리가 당했던 어려운 사정을 염두에 두어 두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이 당했던 이야기, 예레미야가 기록한 슬픔의 이야기 중에 몇 군데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애가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 살펴주세요, 주님께서 예전에 사람을 이렇게 다룬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게 기른 자식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과 예언자가 맞아 죽을 수 있습니까? 젊은이와 늙은이가 길바닥에 쓰러지고, 총각과 젊은 여자가 칼에 맞아 쓰러집니다.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 그러니까 식민지가 시작되는 날, 그들은 사정없이 우리를 베어 죽였습니다.” 다 읽을 수는 없는데요. “굶어 죽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칼에 맞아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다쳐서 죽은 사람이 먹거리가 없어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저보고 무슨 예언을 하라고 하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지만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이런 사정을 보면서 제가 아침에 일어나 당신께 마지막 호소겸 저의 결단을 말씀드립니다.” 결단 내용은 여러분이 읽어서 들은 내용입니다. “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쓴 죽으로 연명합니다. 쓸개즙 같은 쓰디쓴 죽으로 배를 채웁니다. 저는 고난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울적한 마음 가눌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면 제가 희망을 갖는 게 하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예레미야의 피 끓는 애정이 담긴 심정,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 정성을 다해 고백겸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은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의 끝이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쓴 죽을 먹는다 하더라도 주님의 신실하심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주님, 당신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입니다.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이야기를 오늘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도탄 앞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먹여야 되는 배고픔 속에서, 분노와 좌절, 불행이 온 거리를 휩쓰는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희망, 당신만이 내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이 상황은 예레미야가 당했던 상황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당한 상황입니다. 우리도 경험했고, 오늘도 세계도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3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3천 년 전 예레미야가 경험한 이야기가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8월 28일 있었던 보도 하나만 인용하겠습니다. “이슬람의 나라 터키에서 성폭행 당해서 5개월째 임신한 유부녀가 분노 끝에 엽총으로 성폭행한 사람의 성기 부분에 10발을 쏘고, 그 성폭행범의 머리를 잘라서 마을 광장에 내 던졌습니다.”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비극입니까? 2011년 3월 공부를 잘하라고 자식을 학대하던 어머니가 살해된 사건의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살해된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4년 동안 골프채로 100대, 200대 때리고, 마지막에는 삼일 동안 잠도 못 자게하고, 밥도 굶겼습니다. 그래서 15살이던 사춘기 소년이 어머니를 칼로 난자하고, 일어서서 반항하자 목 졸라 죽이고 나서 8개월 동안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재판 후 얼마 전 항소심이 열렸습니다. 그때 판결한 여성 판사의 고백 같은 이야기 한 줄만 인용하겠습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어머니로 피고인이 겪었을 고통을 이해합니다. 탄원서를 받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에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구형합니다. 피고인을 아버지 품으로 보내주지 못하는 것은 미안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형벌을 통해서 속죄함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저도 어머니의 심정으로 피고인과 피고인 아버지가 섬기는 하나님께 피고인의 장래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애가서에서 읽었던 내용, 터키에서 일어난 이야기, 오늘 서울의 한 복판에서 있는 벌어지고 있는 비극, 아프리카 빈곤 속에 있는 모든 비극, 이런 모든 비극 속에 하나님은 나라와 가정과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분만이 나를 살려주고, 나한테 희망이 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다시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다니던 중 예루살렘에서 100km로 떨어진 ‘나인’이라는 작은 동네에 당도했더니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과부의 유일한 아들이 죽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먹여서 살릴 사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살기는 살았지만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과부를 모셨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면 아들이 죽은 것도 서럽고, 남아있는 과부의 목숨도 서러울 것입니다. 그 장례식의 분위기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고, 위로하고, 슬픔의 극치에 장례행렬을 따라갑니다. 예수께서 그 장례식과 마주칩니다. 온 동네가 모여서 죽은 자를 관속에 있고, 슬퍼하는 사람은 그 과부된 어머니 이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장면입니다. 이 모든 장면은 엄숙하고, 눈물 흘리고, 괴롭고, 아픈 것이 집합되었습니다. 이 집합된 공동체의 주인이 누구지 아십니까? 죽음이 이 공동체의 주인입니다. 죽음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슬퍼하는 자가 있고, 죽은 자가 있습니다. 때로는 편히 가신 분도 계시지만 남은 유가족이 너무 불쌍해서 우리가 함께 웁니다. 죽은 자도 슬프고, 유가족도 슬퍼서 함께 울기도 합니다. 이 모든 장례식을 한 마디 언어로 표현하자면 장례식의 주인은 죽음, 죽음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심정은 눈물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주인으로 하는 공동체를 만난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예수는 죽음을 주인으로 하는 공동체 사람이 아니고, 죽은 자도 살리고, 괴로운 자에게 위로를 주는 생명이라는 공동체의 주인입니다. 오늘 생명과 죽음이 만났습니다. 죽음의 주인과 생명의 주인이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뭐라고 답변할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게 아니고, 죽음의 문화 속에 생명 공동체를 대표하는 예수님이 와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웁니다. 눈물 흘립니다. 그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슬픔의 주인인 과부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울지 마라.”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슬프냐?” 이게 아니고, “울지 마라.” 무슨 뜻입니까? “입었던 검정 옷 벗어라. 검정 넥타이 풀어라. 관 열어라. 조가 부르지 마라. 악기 치어라. 조사 없애라. 죽음에 관해서 준비한 모든 것은 무효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울지 마라. 죽음의 문화 끝이다. 죽음은 가라. 분노와 좌절도 가라.” 예수는 한 마디 “울지마.” 여러분 <아르헨티나여, 울지마오(Don’t Cry For Me, Argentina)>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끌어안았습니다. “과부야 울지마.” 이 말속에 “모든 것은 무효다. 좌절도 무효다. 절망도 무효다. 나는 이제 안한다. 울지마.” 이 희망의 주인이 이렇게 선포 합니다. 아마 그 장면에 같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 말만 가지고 희망이 왔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울지마라고 말씀하셨던 생명의 주인이 울지마의 목적, 울지마의 근거, 울지마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관을 열고, 죽어 있는 아들에게 손에 대고, “젊은이야 일어나라. 왜 죽어 있느냐. 일어나라.” 젊은이가 일어났습니다. 젊은이가 일어 남가 동시에 모든 죽음의 문화는 그 순간 무효, 절망도 무효, 울음도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산자의 주인이 하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젊은 아이가 영영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해도 죽습니다. 영원한 부활은 예수께서 오셔서 재림 하실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 이외의 부활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모든 치유는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생로병사의 운명입니다. 마지막 부활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산다고 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유가족은 울지마라. 죽은 자는 일어나라. 고통은 가라. 울지 말고 일어나라.”
영화를 보시거나, 작품을 보시면 한창 사건이 진행되다가 옛날 옛적 어느 때 내가 슬퍼했던, 내가 아주 기뻐했던 감동적인 장면을 끌어다가 재생시킵니다. 과거에 했던 것을 다시 끌어 옵니다. 과거로 돌아옵니다(flash back). 이 말씀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부활,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미리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늘 나인성에서 부활사건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은 이렇게 된다. 이 다음 부활절 아침에 있을 위대한 사건은 미리 끌어다가 오늘 이 나인성에서 보여 주십니다. 미리 보여(flash forward)주고서 끌어다가 오늘 보여 줍니다. 오늘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이렇게 오는 것이다. 부활이 이루어지는 날 모든 사람은 울음을 그쳐야 한다. 웃어야 한다. 죽은 자는 일어나야 한다. 고통은 끝내야 한다. 이것이 부활절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미리 보여주마. 부활의 복음은 이 다음에 사는 것이 아니고, 부활은 오늘 완벽하지 않지만 작지만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나라지만 이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리 한 번 오늘처럼 미리 가져와서(flash forward) 맛보자.” 오늘 주일 날 예배는 부활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끊고 울지마라. 일어나라. 살아가시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고 사셨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그 예수가 우리의 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아무나 고통당한 사람보고 울지마하고 위로하지만, 그 위로는 가식입니다. 진실 된 위로는 우는 사람과 함께 울 때 입니다. 마음으로 울던, 눈물로 울던, 진실로 나는 당신의 고난과 함께 하고 싶다. 운명공동체입니다. 죽으면 같이 죽겠다. 그걸로 위로는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죽을 때 같이 죽고, 또는 대신해서 죽고, 죽은 자를 살려내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해서 죽고, 같이 죽으신 분이 장례를 같이 치르신 분이 울음이 끊으라고 하시는 분이 살아나셔서 우리보고 같이 살자. 일어나라. 내가 일어난다.” 선포 하십니다. 자기아들 예수가 죽었을 때 우리 모든 사람보고 울지 마라. 내 아들을 살리면서 너희 모두 살려내마. 이 약속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고 살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죽어주고, 함께 살아나게 하신 당신, 당신이야 말로 나의 모든 것, 나의 희망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낳아서 자라고 살아가면서 죽는 모든 일생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입니다. 흘러가는 역사, 진행되는 역사, 사계절 역사, 인간의 역사. 이 역사를 헬라어로 크로노스(chronos)의 역사라고 합니다. 아침-점심-저녁 하듯이 흐르는 역사입니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 아팠다가 나음을 받고, 죄악의 빠졌다가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살아나고, 죽었다가 부활도 하고,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세속 역사의 토막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하늘의 개입, 하늘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역사의 모습을 헬라어로 카이로스(kairos)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냥 수평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하늘이 때를 따라서 비처럼 카이로스의 개입이 있어야 우리 역사를 살아가고,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부활은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우리 인간의 크로노스 속에 담아서 전해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고, 동시에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우리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쓰여 있는 말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오늘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 울지 마세요. 그리고 힘들어서 우는 자들에게 일어나라. 울지마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왔다. 함께 웃고, 함께 일어나 주님의 나라 만들자. 소망이신 주님이 여러분 자신의 주님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역사 하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