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윤응진 교수의 기독교 교육 아카이브<바로가기 클릭>
<세계와 선교> 총장칼럼 (제193호, 2007년 9월, 2-6쪽)
지난 6월 말에 나는 18년 만에 해외 나들이 길에 올랐다. 유학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온 이래 한국 땅에 그토록 오래 ‘칩거’한 내가 인천국제공항을 뒤로 하고 하늘 길로 오른 것은 직원퇴수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목적지가 베트남의 하노이였다.
사실 나는 독일에서 귀국하기 전에 동베를린과 폴란드의 아우쉬비츠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곳은 사회주의권이어서 여행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사회주의 국가, 그것도 베트남이 귀국 후 나의 해외여행 첫 방문지라니!
‘베트남’이라는 말만 들어도 나는 부끄럽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일부 한국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을 비롯한 폭력행위만이 아니라 ‘라이 따이한’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베트남 국민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나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그들의 표정에는 적개심이나 원망은 묻어 있지 않았다. 물론 내가 찾은 곳은 북부지방이기에 한국인에 의한 직접 피해를 경험하지는 못했으리라.
베트남 여행에서 인상 깊은 풍경은 물론 하롱베이의 절경이었지만,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은 호치민의 삶에 대한 강한 감동이었다. 호치민의 지도력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 체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관여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890년, 청빈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치민(호지명: 胡志明, Ho Chi Minh, 1890.5.19~1969.9.3)의 본명은 ‘탄’(Nguyen Tat Thanh)이었다. 그는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1살 때(1911년)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활동으로 수배령이 떨어지자, 조국 인도차이나를 떠나 프랑스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프랑스 파리에서 정원사, 청소부, 하인, 사진 수정사 등 다양한 허드레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구엔 아이 퀙’(阮愛國, ‘애국자 구엔’)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서 반식민주의 투쟁의 대의를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모인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정권이 인도차이나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하여 유명해졌다.
호치민은 늘 쫓기는 몸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에서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 투옥당한 무렵부터 ‘호치민’('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민중들이 총봉기 하도록 지도하여,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하였다(8월혁명). 그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ㆍ자유ㆍ행복을 주었다……!”
호치민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노선을 추구한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기회만 된다면 힘이 아니라 설득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소박한 삶을 살다가 1969년에 베트남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75년 4월 30일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민중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호치민의 비전과 의지와 지도력이었다. 베트남인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살아있지 않은' 영웅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다.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던 호치민은 그가 사망하면 화장하여 재를 베트남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호치민이 사망하자 그의 추종자들은 시신을 소련으로 보내어 방부제로 처리하여 영구보존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5년 9월 2일, 건국 기념일에 맞추어, 그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던 바딘 광장 옆에 묘지를 조성하였다. 그의 묘지에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참배객들은 검색대를 통과하여 침묵을 지키며 그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향한다. 그의 모습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노인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호치민이 살았던 거주지와 관저는 2층 구조의 간소한 주택인데, 집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집에는 작은 나무 책상과 간소한 침대가 놓여 있다. 그가 남긴 유품들은 몇 되지 않지만, 바로 그의 소박하고 서민적이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는 말년에,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대화를 했다고 한다.
호치민의 묘소와 관저를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호치민에 대한 편견과 경계심이 무너져 내리면서, 오히려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 가득 채워졌다.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으면 오히려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관례를 깨고, 그는 그의 삶 자체를 사회주의 혁명의 표준 모델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과연 베트남 민족에게는 출애굽 사건을 주도한 모세와 같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그 열매를 누리지는 못했다.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졌듯이.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무소유를 실천하였다. 그는 무덤조차 지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몸은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의 소유가 되어 전시되고 있다. 부패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마땅한 그의 몸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유리관에 영구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진정으로 그를 기억하고 그를 배우고 그의 삶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웅으로 혹은 심지어 신으로 추앙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정부에 국민들의 마음을 묶어두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의 삶을 본받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그의 추종자들 때문에 그가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그는 결코 관광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타까움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나는 베트남에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군대가 저지른 범죄와 개신교가 우세한 미군이 저지른 범죄로 인하여 더욱 부끄러웠다. 그들은 선교사나 군목들을 앞세워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이라 여겼을 것이다. 미군들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1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중부 베트남의 정글을 아예 초토화시켜버렸다. 그것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행위일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범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자’ 호치민은,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으나, 프랑스와 미국의 어느 지도자보다도 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였으나 실제로는 물질과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바알과 마르둑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반역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은 그들에 의해 고난 받는 베트남 민족의 ‘출애굽’을 위하여 투쟁한 예언자였다. 그는 약소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제국주의 세력들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써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한 종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요즘 이른바 ‘대권 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은 국민을 섬기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권력투쟁일 뿐이다. 이웃을 섬기고 국민을 향해 봉사하려는 자세들은 실종된 채, 권력투쟁만이 난무하니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하다. 우리에게는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