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선교> 총장칼럼(제197호, 2008년 12월, 2-6쪽)
1. 한 연예인의 죽음이 주는 충격
얼마 전에 한 연예인의 죽음이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국민적 스타 대접을 받던 그가 자살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해맑은 미소를 띤 모습을 보여주던 그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보도는 너무 뜻밖이었다. 무엇보다도 악성 루머들이 그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듣고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메모에는 "나는 외톨이…, 왕따…, 도무지 숨 쉴 수가 없다"는 등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문장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 ‘악플’이 그의 죽음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악플을 올렸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그들을 향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파괴하고 말았다.
우리가 지닌 판단의 잣대로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떠난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숨 쉴 수가 없는” 삶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 내는 것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2. 몸이 성전이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글에서 바울은 이렇게 단언하였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6: 19)
사람들은 흔히, 영혼만이 깨끗해질 수 있으며 우리의 몸은 영혼의 구원을 방해하는 올가미라고 생각한다. 바울과 동시대인이며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생각도 그러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혼과 영으로는 신들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나, 영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하찮은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3:16에서 이미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기에서 바울은 당시 로마사회에 일반화된 종교적 상식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은 육체를 경멸하고 다만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 영혼만 잘 관리한다면, 육체를 어떻게 굴리던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념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처세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 가지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이었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였다. 고린도 지방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극단적인 쾌락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생활방식이었다. 그들은 성매매에 가담하면서도 영혼만 성결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러한 쾌락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이해하는 ‘몸’은 영혼과 육체를 함께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몸을 온갖 억압과 착취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투쟁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펼치는 구원사역의 특징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출애굽 사건은 노예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전체, 곧 몸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몸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애쓰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성경의 신앙전통은 우리의 몸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셨고, 우리의 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육체가 없는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성경의 관심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몸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과 그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샬롬을 지향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선언하였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린도전서 6: 20) 그렇다, 예수께서 고난을 겪으면서 이루려한 것은 몸을 지닌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영혼이 아니라 몸으로 예배할 것을 권면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몸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가? 그것을 바울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12:2)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 했다.
3. 우리의 몸에 대한 예의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안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하겠다. 우리의 몸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게 되며, 이웃의 몸 또한 진정으로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에 대하여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자이며, 이웃을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이다. 더구나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단에서 사도바울의 가르침보다는 세네카의 가르침이 진리로 선포되고 있다. 그래서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지닌 종교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하는 모순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예배를 드리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에 대한 예의가 없는 자들이 어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영혼구원에 대한 탐욕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몸을 아끼고 사랑할 능력을 상실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이웃사랑이란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며, 세상을 살맛나는 삶의 터전으로 만들 소금이 되겠는가!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소중한 도구이다. 어찌 우리가 그 몸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 그리고 그 뜻이 성취되도록 협력하는 일 -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몸으로 살아남아야 할 소중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