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신명기 6:1-5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이 모든 말을 듣고 성심껏 지키면,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들이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아멘.
야고보서 2:5-10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2:34-40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이렇게 찬양을 들으시면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죠. 성가대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가 찬송을 부르고, 기도드릴 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어느 문인 한분의 짧은 고백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스위스의 롤프 도벨리(Rolf Dobelli)입니다. 이 분이 쓴 수필집(Die Kunst des klaren Denkens. 52 Denkfehler, die Sie besser anderen ueberlassen, Hanser 2011) <사람이 살면서 잘못사고하는 52 가지) 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이분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장르 구분하지 않고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참여를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연주회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받았고, 이러한 느낌은 삶을 살아가는데 활력소랍니다. 음악회 중간의 휴식 시간이 되면 또는 음악회가 끝나고 나면 삼삼오오 모여 “오늘 지휘가 너무 멋있었다. 연주 중에 솔리스트가 참 잘했다. 오늘 곡 해석도 좋았다” 는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곡을 작곡한 작곡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거론 되지 않습니다. 원작곡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곡을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연주한 사람, 지휘한 사람, 독창한 사람만을 놓고서 이야기 하니 참 아쉽다는 거에요. 연주, 지휘, 노래 부르는 것과 동시에 작사가 및 작곡가의 뜻을 함께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이 짤막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이 주보를 보시면 우리가 꼭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부탁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가 제목을 쓰고, 그 옆에 괄호로 성가를 만드신 분의 이름을 적는 것입니다. 제도 오늘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풀어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는 제 말이 아니고, 제가 인용해야 할 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 제목 위에 세 본문을 적어 놓습니다. 이것은 그냥 요식행위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말씀의 진실 된 모습을 알리자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설교를 마치고 나면 “설교가 감동적이었다. 재미가 없었다. 형편없다.” 등의 여러 가지 평가는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긍정하시던, 부정하시던 간에 이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선포할 때 인용했던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이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께서 이 한 가지만은 꼭 지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음악회, 연주회, 스포츠 등 모든 것 속에서 감동, 행복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 이 행복과 감동을 원초적으로 선사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는 꼭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창조절입니다. 왜 우리는 창조절을 만들어 지킵니까? 하나님은 피조물의 영장이라고 이름하는 인간이 마음껏 행복을 누리고, 보람을 누리고 잘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 만드신 분의 부탁이 있습니다. 만든 주인은 "나 하나님"이지만, 일단 만들어 놓은 이상 모든 것은 피조물의 자유다. 단, 창조주가 의도한 행복을 만들어 갈 때 한 가지만 기억해라. 창조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창조의 "주인은 나"이니라 라고. 창조주가 계십니다. 우리가 창조를 즐기며 살아가되 이 사실 하나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외에는 자유입니다. 창조절은 다른 게 아니고, 창조주가 창조하셨다. 창조주를 잊지 말자, 그런 뜻의 계절입니다. 이 분은 창조 하셨고, 나중에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어느 때가 되면 완성하시는 처음과 나중이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 하나만은 잊지 마십시오. 나머지는 마음껏 즐기십시오.
요즘에 물건 하나를 만들어 팔아도 특허권을 지불해야 합니다. 글 하나를 쓰려고 해도 남이 쓴 것을 함부로 도용할 수 없습니다. 각주로 밝히던가. 인세를 지불하고 써야지 그냥 쓰게 되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경말씀 읽을 때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마음껏 읽으라고 하십니다. 단 “이것은 내 말이다” 하는 것만은 기억하라십니다. 창조절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심오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데,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도 아니고, 이상한 신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요한일서 4장 8절, 16절에 보면 명확하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념도, 물건도 어느 형상도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 이니라” 라고. 창조는 사랑의 작품입니다. 창조절은 베푸신 사랑을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사랑 때문에 창조주가 있고, 사랑 때문에 피조물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랑 때문에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객관적인 신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는 없습니다. 창조신학 또는 무슨 진화신학이 뭐라고 말하던, 성경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창조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랑은 즐겨야 되고, 사랑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이 분이 이스라엘 백성한테 부탁을 합니다. “나 사랑인 하나님"은 그대들을 이집트에서 사백년 종살이에서 건져내어 광야로 이끌어 주었고, 광야에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향할 텐데 한 가지 부탁할게 있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며 살라는 부탁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잦은 유목생활을 하는 백성에게 뜯어 먹을 풀도, 마실 물도 많다는 뜻입니다. 꿀은 양봉이 잘 되어서 목축업 하는데 좋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대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땅이 될 것입니다. 이 말속에 담긴 물질적, 환경적, 인간적, 영적 축복을 다 포함해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젖과 꿀을 마음껏 농사와 유목을 통해 먹고, 마시고, 즐겨라. 한 가지만 부탁하자.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다. 나는 사랑이다. 사랑을 마음껏 받아라. 동시에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만 부탁하시고, 나머지는 자유에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신명기서 말씀에 보면 이 말씀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창조주의 창조 행위는 "사랑의 행위"임을 잊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은 사랑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사랑을 받고 감사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인들의 질문이나, 신명기서 이야기나, 야고보서 이야기 중에 똑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입니다. 말을 뒤집어 볼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 자신의 뜻과 정성과 하나님 자신의 몸을 다하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알면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하나님 사랑에 여러분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함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사랑해 주셨으니까. 먼저 주신 사랑에 감사로 반응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에 보니까요. 야고보 사도가 엄청난 비판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해서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왜 그 사랑을 모릅니까. 특별히 부자 여러분, 왜 가난한 사람을 압제합니까. 왜 여러분은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 이름을 모독합니까. 여러분이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 법정으로 끌고 갑니까. 야고보는 부자를 엄청나게 비난합니다. 물건 가진 게 샘나서일가요, 아닙니다. 모든 성경말씀 읽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하시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 곧 사랑을 너무나 많이 가져서 사랑 부자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랑은 버리고, 엉뚱하게 물건으로만 채우십니까? 왜 하나님의 창조적 생명사랑을 버리고, 그 대신에 화폐, 재화라는 이름의 물건만을 채우십니까. 그렇게 부자가 되는 사람은 사랑이 없으므로 당연히 이웃을 멸시하고 모역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부유한 것 자체에 대해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이 없음을,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 부유해 지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고치라고 합니다. 모든 생활의 영역이 그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이야기가 주제 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으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의 옛날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매개 없이 하나님과 인간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중간 매개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받았으면 인간이 갚아야 하는데,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그냥 허공에서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를 통해서 누군가를 통해서사랑하셨습니다. 중간에 매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인간은 "이 사람을 믿음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예수라는 아들을 통해서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예수를 보면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분의 사랑을 보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칠 때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사랑을 명세하면 됩니다. 그런 때문에 기도 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 할 때도 예수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듯이, 인간이 사랑의 감사하듯이 나 보다는 먼저 너를 사랑하십시오. 네가 사랑을 베풀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사랑하였으니, 너는 나를 향해서 감사하다고 믿으면 사랑을 베플라. 내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너를 사랑하듯 너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 그래서 너와 나는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We)가 되어 살자.”고.
예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과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로 많이 표현합니다. 요즘은 디자인 시대입니다. 혹시 그림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하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합쳐서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습니까? 하나의 형상으로 디자인 한 번 해보시죠. 여러분 앞에 최고의 디자인이 있습니다. "십자가" 형상입니다. 십자가 보실 때 무슨 생각하시나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죗값을 대신 지고 죽으시고, 용서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새로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간직합니다. 십자가 은총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다르게 십자가 한 번 바라다 보시죠. 하나님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직선의 위에 께신 하나님과 아래에 있는 우리 안간의 사랑 나눔입니다. 그런데 수직선이 있고, 수평선이 만나는 십자가, 바로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 입니다. 수평의 왼쪽에 있던, 오른쪽에 있던 위치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 쪽에 있는 "나"는 다른 쪽에 있는 "너"를 이웃으로 알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똑같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너"가 "나"를 사랑합니다. 수평의 사랑과 수직의 사랑이 만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는 그냥 수평과 수직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을 묶어주는 "중심점"이 있습니다. 만나는 점이지요. 이 만나는 점을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남니다. 이웃과 이웃이 통하는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사랑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중심만 확실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이웃과 이웃은 서로 사랑을 나눔으로 아름다운 복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제/우리의 의지만이 아니라, 원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고,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연결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여기서우리가 자주 듣던 삼위일체 하나님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한테 베풀어 지고, 우리도 그 사랑이 고마워서 사랑으로 감사를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쌍방통행식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저는 과거 종교개혁을 하면서 우리 선조들이 잘못한게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톨릭, 성공회를 가면 그리고 정교회 신자들을 만나면 감사를 표할 때,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말로만 하지요. 이 분들은 손가락으로 위아래 옆으로 십자표시를 합니다. 이 성호의 십자가 표시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표시합니다. 저도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이러한 표식을 회복하십시다. 이제는 말로도하고, 상징으로도 합시다. 왜 없애 버렸습니까? 이것이 “하나님도 사랑하고 인간도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것을 말로 고백하고, 행위로 고백하는 것이라면 좋은것 아닙니까.
사랑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뭉쳐 있으면, 그 사랑이 만든 세계는 행복합니다. 이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인데,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 인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한 사람의 본성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면, 인간도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한 인간도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사회는 전쟁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 우리교회에서는 캄보디아에 의료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봉사 다녀온 후 있었던 보고 예배 때 캄보디아 상황을 들으며 저는 속으로 많이 괴로웠습니다. 여러분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캄보디아는 최근에 와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975년 월남전이 끝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 했습니다. 그 때 캄보디아에서도 정권의 혼란을 틈타 중국에 망령 갔던 <시아누크> 왕이 귀환해서 다시 정권을 잡았는데, 당시 좌파세력이었던 <폴 포트> 정권과 연합했습니다. 그때 만든 당이 크메르 루즈(Khmer Rouge) 라는 당입니다. 이 당을 등에 업고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습니다. 1975년의 일입니다. 이후 크메르 루즈는 황폐한 농촌을 다시 일으키자면서 대도시에 살고 있는 갑부들, 자본가들, 속칭 지식인들, 유산계급, 이 모든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징집하여 전부 농촌으로 보내고, 저항하는 사람은 잡아다가 전부 집단살해를 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800만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나라를 이끌 지도층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그 여파가 지금도 캄보디아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흔이 산에 가면 여러 가지 종류의 유실수를 싶어서 숲이 잘 유지 되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한 가지 나무만 심자” 입니다. 소위 자기들이 말하는 ‘인종 플랜테이션’입니다. 이 사람들은 백성을 위한답시고, 분노의 정치를 했습니다. 그 속에 사랑이 빠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캄보디아입니다. 남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도와주고 싶어 간 나라의 현실입니다. 제발 이 나라에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사랑의 역사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좌파든, 우파든, 극단의 정치는 세상을 항상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잘 살다고 했던 유럽에서도 엉터리 분노의 정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독일 나치가 그렇습니다. 여러 인종이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게르만족만 살자. 인종플랜테이션 입니다. 사랑 대신 타인종 분노의 극우정치를 히틀러가 했습니다. 줄잡아 600만의 유태인이 죽임당했죠. 크메르 루즈가 극좌의 분열정치를 했다면, 나치는극우 정치입니다. 둘 다 공통점은 사랑이 없고, 분노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없는 세상은 망합니다. 그런 곳에 새 창조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제 36년을 지내면서 겪었던 식민화 전제 정치와 삶속에는 사랑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걸 우리 모두 압니다. 그런데 일본은 분노의 살상을 해 놓고선 미안하다는 말도 안합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이 분노하시겠지요. 동북아 사태가 괴롭습니다. 힘들어 집니다. 어떻게 하면 잘 되느냐? 그것은 사랑을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은 약한 게 아니고 엄청나게 강한 것입니다. 지배하고 싶으면 사랑으로 지배하십시다. 분노로 지배하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사랑으로 지배하면 살립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통치를 하시느냐하면, 아주 높은 곳에서 아주 낮은 곳으로 오셔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섬김의 정치를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것이 그대로 진실입니다. 이 사랑 없이는 세상의 행복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본체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진실입니다.
신앙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 사랑부재의 시대를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다. 진심으로 힘을 원하십니까? 지배하고 싶습니까? 많이 갖고 싶습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랑으로 지배하십시오. 사랑으로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사랑해 보십시오.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해서 녹여 보시지요. 사랑은 생명을 만듭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든, 수평적인 인간의 사랑이든 중심에 그리스도만 품을 수 있으면 우리는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깁니다. 사랑은 살립니다. 사랑은 행복하게 합니다. 이 사실을 단순 명확하게 온 땅에 전하십시오. 그리고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하나님은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뿐, 귀신으로 둔갑될 뿐, 살아있는 사랑의 신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 복되게 하는 사랑. 함께 살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인 사람 되신 여러분, 사랑이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랑하십시다. 사랑으로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랑으로 형제자매와 함께 이어 사십시다. 사랑은 이깁니다. 살립니다. 구원해주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