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애굽기 34:11-16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도록 하여라.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그들과 언약을 세우면,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언약이라도 세웠다가, 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며,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너희를 초대하면, 너희가 그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리고 가서, 그 제물을 먹지 않겠느냐? 또 너희가 너희 아들들을 그들의 딸들과 결혼시키면, 그들의 딸들은 저희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면서, 너희의 아들들을 꾀어, 자기들처럼 음란하게 그 신들을 따르게 만들 것이다. 아멘.
에베소서 4:21-24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9: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런데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멘.
설교문
추석을 맞이해 우리교회서도 많은 분이 고향을 찾아가신 것 같습니다. 1부 예배때 자리가 많이 비어서 고향에 가신 분이 많이 계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 교회는 두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한 교회는 일상생활을 하다가 주일날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 입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는 교회”가 첫 번째 교회고요. 예배드리고 나면 흩어져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주일 날 받은 은혜를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교회, 그런 교회를 “흩어지는 교회”라고 이름 합니다. 추석을 맞이해서 절반은 모이는 교회로 오셨고, 절반은 흩어 지셔서 각자 고향으로 가셨고, 또 그 중에 일부는 아마 휴가 가셔서 그곳에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하는 이런 교회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요?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져서 다시 모이고 하는 모습의 교회를 “에큐메니칼 교회”라고 이름합니다. 에큐메니칼 교회란 다른 것이 아니라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교회입니다. 시골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는 흩어지는교회가 되어, 전부 떠나는 구나, 흩어지는 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만은 전국 각지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할 것 없이 수많은 교파교회에 속한 식구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니, 아마 시골 교회들이 얼마나 기쁘게 에큐메니칼 예배를 드릴까고 생각을 하니까 한 편으로 뿌듯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흩어지고 모이고 하는 교회의 범위를 넓혀서 전 세계로 가봅시다. 전 세계 교회들이 한 곳에 모이는 연합된 교회의 모습이 있고, 또 모였다가 각자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 나라로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모습의 이야기 먼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가 늘 지원을 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교회 공동체 중의 하나입니다. 이 협의회가 1948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창립총회에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아주 새로운 모습을 채택해서 예배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아마 언젠가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창립 때 무엇으로 다양한 교인들이 모이는 일치의 모습을 보여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라들도 깨졌습니다. 체제도 무너졌습니다. 절망과 분노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들이 모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창립예배는 어떻게 드리면 될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창립총회 3년 전, 45년 11월쯤에 미국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WCC총회 개회 예배로 가져왔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 뉴저지 주에 교인이 100여명 쯤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2차 대전 후 상황은 힘들었고, 세상과 미국 사회를 바꿔야 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두고 목사님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것은 장례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누가 돌아 가셨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장례예배를 드린다는 초청장만을 보냈습니다. 교인들은 누가 돌아 가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누군가 돌아 가셨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와보니 제단 앞에 관이 놓여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장로님 두 분께 관 뚜껑을 열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성만찬을 드릴 때처럼 떡과 포도주를 받듯이 앞으로 나와 관을 쳐다보고, 예의를 표하라고 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예를 표하러 관 앞에 왔다가 깜짝 놀랍니다. 시신이 있는 줄 알았더니 관 밑에 커다란 거울만 하나 있었습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자기의 얼굴을 본 겁니다. 이 목사님 말씀이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셨고,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기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거기서 희망을 찾는 얼굴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 날 예배는 실제로 장례예배가 아닌 새로운 희망의 예배가 되었다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WCC가 창립예배 드리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도 같이 시작해 보자는 취지로 관속에 있는 거울 드려다 보는 예배를 창립예배의 한 행사로 진행했습니다. 오늘 이 사실을 다시 말씀 드린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요즘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거울”로 나타납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너무 부패했으면 일그러진 하나님의 얼굴로, 삶이 기쁘면 기뻐하는 하나님의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속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속과 겉을 있는 그대로 굴절 없이 보여 주는 거울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표정을,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은 무슨 약속을 주셨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은 피조 된 모든 인간에게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생활 영역에서 복되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이 일그러지면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거울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무대를 옮겨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 백성을 이집트 식민살이에서 구원해 냈습니다. 구원의 방식은 아주 기적적인 방식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너서 그 많은 사람을 사막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단지 약속 하나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목축업과 양봉 산업이 최대로 번성해서 잘되는 경제적인 부와 축복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가나안 땅에 너희들을 인도해 내겠다는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속에 포함된 정치, 경제, 사회, 복지, 생명 모든 삶의 조건을 풍성하게 해줄 테니 단 하나만 지켜라, 이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 이라는 것만 변치 않고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하나님은 질투가 많아서, 다른 신을 섬기면 나는 질투 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출애굽을 통해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쁜 선물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습니다. 돌판 두 개를 가지고 가서 첫 번째 돌판에는 1-4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두 번째 돌판에는 5-10계명까지, 부모를 공경하라 부터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고 까지 말씀하시는 5-10 까지의 6가지 계명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가 4계명과 6계명의 두 개의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시간에 처음 출애굽 때의 약속을 깼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한계가 부딪히니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믿었던 신이 아닌 이집트에서 그렇게도 많이 봤던 신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본래적인 약속 위반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십계명의 돌판을 바위에 던져 완전히 깨트렸겠습니까. 이 일로 모세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깬 죄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다 받지 못합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에라도 가나안 입성을 거부당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주셨던 백성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하나님은 기존의 온 백성을 다 멸절 시키고, 새로 가나안으로 입성할 백성을 세우고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지도자들이 “약속받은 축복, 학수고대했던 가나안 입성의 축복을 받은백성을 멸절 시키면 안 된다”고 하는 간구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불렀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으로 올라가 똑같은 십계명을 다시 돌판에 새겨 받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시 확인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반드시 보내주마". 경제 걱정하지 마라, 복지 걱정하지 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풍성한 복으로 함께 해주마. 다시 약속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집트 땅에서와 같이 온갖 잡신들이 많다. 거기에서 잡신을 섬기고, 승복하면 내가 준 약속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영생의 복음, 생명의 복음은 끝이다. "이거 지킬 수 있느냐?”고 확인 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젖과 꿀의 이름하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젖과 꿀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젖과 꿀을 가진 모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에, 또 하나님의 품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사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삽니다. 말씀으로 삽니다.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혼으로 삽니다. 영으로 삽니다. 땅에서만 사는 땅사람 만이 아니라 하늘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땅에서는 마음껏 자유를 누려라. 마음껏 먹어라. 단 하늘을 품고 산다는 사실 하나만은 잊어버리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인간이 아닙니다. 동물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사람은하늘의 품성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되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인 생명으로, 생명의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 모습 하나 가지고,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든 삶은 하나님이 주신다. 인간이 가진 자유는 마음껏 누려라. 단 한 가지 그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음을 기억하라. 자유권을 행사할 때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으로 자유권을 행사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자유는 나와 관계 속에서 행사해야 한다. 자유권을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옳게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은 이웃 앞에서도 자유를 정직하게 행사합니다. 성경 말씀 속에 있는 자유는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음껏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한 자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과 관계에서, 이웃 앞에서 떳떳하고 진실 된 자유입니다. 이런 경우 떳떳한 책임적 자유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유는 속박입니다. 방만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 후에 또 하나 기적을 행사 하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에 있는 내용입니다. 네 명의 장정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메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세 복음서에 나옵니다. 누가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사람의 믿음과 환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이 너무 기특해서 "네 죄가 사함 받았다. 네 병도 나았다". 그리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병이 나았으니 혼자 일어나 가지 말고, "네가 누워 있었던 침상을 어깨에 메고 나가라"고. 아주 중대한 말씀입니다. 제가 아파보니까요, 일어날 수 가 없어요. 제 마음은 빨리 일어나서 걷고 싶고, 운전도 하고 싶고, 이야기도 하고 싶고, 밥도 먹고 싶은데요. 그러나 꼼짝을 못해요. 누가 아픔을 고쳐주고 몸을 받쳐주지 않으면 침상에서 일어날 수 가 없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병원 침상이 고맙지만, 저한테는 한편으로 엄청난 짐이었습니다. 저를 옥죄는 아주 제한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 있는 것도 사실은 고맙지요. 제 꿈은 무엇이냐 하면 빨리 나아서 제가 마음대로 자유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와 똑같은 심정으로 예수께 중풍병자가 왔습니다. 예수님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병이 나았으니 빨리 일어나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를 옥죄고 있는 너의 생활 바탕인, 너의 환경인, 너의 사회구조인 침상을 이제는 없애라. 구조개혁을 해라. 제도도 바꿔라. 네가 왜 침상에 묶여 있느냐. 나았으니 그 침상, 즉 너 사는 환경을 어깨에 메고 나가서 던져라. 그리고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뜻에서 “침상을 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 이야기는 그냥 사람 고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활 전체를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장로님께서도 중보기도에 언급하셨습니다만, 저는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많습니까? 왜 이렇게 자살자는 더 많아집니까? 부자가 되었다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더 굶주리고 괴롭습니까? 우리 침상은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지요. 사회체제, 제도, 많이 좋아졌지요. 침상이 아무리 바뀐들 환자가 낫지 않으면 침상은 그대로 침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침상 이건, 나쁜 침상이건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나음 받고, 그 침상을 메고 갈 정도로 사람이 바꿔져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침상이라고 묻지 않습니다. 다만 침상위에 있는 환자는 나아야 한다. 완전히 자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환자의 침상도 어깨에 메고 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삶이 바꿔져야 한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사람이 완전히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음 받은 환자는 얼마나 힘을 받아야 합니까? 나음 받고 새로 태어난 자는 온 세상을 짊어질 만큼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우리 운명은 침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명이 침상을 메고, 업고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힘을 받아서 우리 운명을 세롭게 개척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운명대로 살지 마십시오. 운명을 업고 다니십시오. 운명을 바꾸어 가면서 사십시오. 하나님한테 힘을 얻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지만 이 땅을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한답니다. 이 땅을 화석화된 제도로 만들면 안 됩니다.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바꾸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관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바꿔져야 합니다. 인간은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온 세상에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껴야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갑니다. 주인이 바꿔지지 않는데 시스템만 바꾸면 무엇합니까? 오늘 예수님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과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젖과 꿀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성을 받아야 복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 환경을 바꾸십시오. 동시에 주변 환경을 관리하고, 우리가 이끌어 가고 있는 주변 환경의 주인 노릇 하는 우리 자신도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추석 때 농사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데, 물건으로 감사의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은 사람의 중심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확인해달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에베소서가 아주 정확히 썼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진리가 무엇인지 아시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사건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오늘 여러분에게 새 힘을 줄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에 보시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대로 새 사람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우시냐하면 이렇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반드시 처벌을 받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 분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죄를 모른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죽음을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는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신 것처럼 용서 받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참 의로움"이란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 심판 받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은 심판과 용서를 통해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그 분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함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허나 거룩한 하나님은 하늘에만 거룩함을 두시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 땅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니, 성속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신것 처럼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이 땅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거룩하듯이 하늘나라를 품고 사는 이 땅도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참 거룩함"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의 요지는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고, 행복하고, 복되고, 하나님께 영광 드릴 수 있으려면 이 땅의 주인으로 부름받은 여러분도 젖과 꿀이 흐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인간이 되십시오. 땅도, 인간도 함께 젖과 꿀이 흐르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임하시면 그것이 오늘 추석에 저희들이 누려야 할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인격추수와 물건 추수, 세상 추수와 하늘 추수를 함께 원하십니다. 이 두 추수로 하나님의 축복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