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8:18-22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노아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3:3-6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송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시던 날이 안식일입니다. 이 날 아마 하나님이 사람들 을 모아놓고 감사의 축제를 받고 드렸을 텐데, 그 때 무슨 찬송을 불렀는가 생각해보니 오늘 성가대가 부른 찬송을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성경에서 보면 “참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참 좋은 찬송 감사드립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에 있는 창조 이야기입니다. 요일로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요일 날 빛을 창조하시고, 쭉 나가다가 금요일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토요일 날 쉬셨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일이라고 이름하고, 구약성경에 보면 이 날 유대 사람들이 모여서 안식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금요일 날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창조의 한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에 오면 창조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 이름 하는 분이 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 창조는 요일별로 한 것은 아닙니다만 요일에 맞춰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고 너무 좋다고 하시던 금요일, 사람을 만든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난 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이 금요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마운 날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극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토요일, 새로운 창조를 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날 예수께서는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그날 유대교 안식일에서는 하나님은 만백성을 모아놓고 너무 기뻐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아들은 무덤 속에서 안식일을 지킨 것입니다. 창세기에 없는 또 다른 안식일이 생겼습니다. 일요일 날, 첫 빛을 창조하시던 날, 예수께서는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새 생명이 되셨습니다.
토요일 안식일이 옳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안식일이 옳습니까?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쉬는 날, 모든 생명을 창조해놓고 하나님이 기쁘다고 하신 날, 참 좋다고 하신 날이기에, 그래서 두 가지 전통이 지금도 흐릅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는 물론이지만 안식교를 믿는 사람들은 제 7일 토요일 날 안식일 예배를 드리고, 우리는 제 8일째 되는 일요일 날, 첫 빛을 창조하신 날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을 주일이라고 명명합니다. 제가 오늘 안식일 이야기를 날짜별로 하는데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때로 보면 사람을 창조하신 금요일 날,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첫 빛을 창조하던 날,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날짜의 차이만이 아니라 엄청난 신학적, 신앙 고백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정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고, 우리 모두를 다 구원해내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슬픔의 극치이지만, 그 분의 부활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생명 때문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승천하실 즈음, 약 서기 30, 31년 뒤로부터 한 100, 200년 동안 초대교회인들은 로마의 핍박 때문에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지하에 숨어서, 비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의 예배는 두 종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오늘과 같은 예배를 드리고, 또 한 예배는 항상 예배드릴 때마다 마지막 목요일 밤에 주님이 하셨던 성만찬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을 항상 예배 때마다 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말씀과 찬양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를 똑같이 드려야 한다. 그러나 당시 첫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주님의 부활하신 부활도 지켜야 하고, 말씀의 찬양 예배도 드려야 하고, 성만찬도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토요일 날 예배를 드리긴 해야 하는데 토요일 날 성만찬을 거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어서 교회에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고, 또 떡을 포도주에 찍어서 먹어야 하는데,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됩니다. 먹는 것도 전날 만들어 놓고 먹기만 했지, 음식을 만들 수도 없고, 물건을 살 수도 없습니다. 토요일 날 성만찬을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평일 직장에 다녀와서, 지금으로 말하면 일요일 저녁에 성만찬 예배를 드렸습니다. 토요일의 말씀 예배와 일요일 저녁에 드리는 성만찬 예배가 각각 따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의 핍박도 많고 예배 중의 급습 등 힘든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두 예배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예배 속의 말씀과 성만찬을 합쳐야 하는데, 그 날을 출근도 계산하고 안식일도 계산하여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날 아침으로 정해서 출근 날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드린 예배가 말씀과 성만찬이 합해진 첫 예배이고, 이 예배가 서기 30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배의 효시입니다. 그러다보니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 문명을 받아들입니다. 로마제국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드리던 일요일 아침 예배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을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이 아니라 우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 주님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8년이 지난 321년 3월 3일, 첫 일요일인 이 날을 로마제국 전체의 공휴일로 선포합니다. 이유는 기독교가 주일이라고 지키고 있고, 로마제국의 역사상 이 날이 태양의 날, 즉 일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는 태양을 전통적으로 제일 큰 날로 생각을 했습니다. 태양절의 중심인 일요일,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날이라고 선포한 일요일, 둘이 우연히 합치되어 이 날을 휴일로 선포한 것이 오늘 주일의 효시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흡수당했다기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 주일날을 자기의 휴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한 생명의 주인이다. 생명의 주인이 된 날, 함께 모여서 예배하자.” 창세기를 쓸 때에 예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금요일 날 사람을 만드시고 토요일 날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시게 했습니다. 예수가 오신 다음부터는, 예수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토요일 날 무덤에 계시다가, 주일날 아침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 날을 하나님이 참 좋다고 하신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이것이 주일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안식일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여러분은 아, 이 날이 주일이구나,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맞구나,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 이 눈으로 오늘 성경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와 유대인 백성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 안식일 날 당신의 제자와 당신은 배고프다고 밀 이삭을 잘라서 먹습니까?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일 하면 안 됩니다. 먹는 것도 일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 부활하신 주님이 미리 알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안식일, 주일의 주인이다. 이 날, 안식일에 부활한 나도 먹어야 하고, 많은 백성이 먹고 생명을 즐겨야 한다. 이 날은 생명을 즐기는 나를 위해서 만든 날이고, 내가 무덤에 있던 토요일 날, 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해도 틀림이 없지요. 우리는 지금 2,000년 후에 살면서 성경말씀을 배경으로 두고 당시는 어땠을까 판단을 해봅니다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래서 지금 살아가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기가 편해졌고,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은 참 어려웠을 겁니다. 도대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람이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다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태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길을 재촉하게 됩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의 날이다. 이 날 하나님이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다시 살고, 죄악에서 구원받고, 모든 사죄함을 얻게 했기에, 나는 생명의 역사를 오늘 시작한다.” 찬송, 찬양, 기도, 말씀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부활 생명으로 모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립니다.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 주일입니다. 안식일 성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일 성수가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여 이 날 찬양하고 이날을 하나님과 함께 기쁜 날로 지켜야한다는 것이 안식일 성수의 핵심입니다. 먹지 말고 안 먹고 장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과거의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안식일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신 다음의 안식일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에 있던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새로운 구세주의 역사를 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 주일의 주인인 예수는 오늘 주일이라는 한 날에 묶여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 사람이 땅의 사람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 하셨듯이, 오늘 행복한 날, 찬양이 넘치는 날, 기도가 용솟음치는 날, 너무 기쁜 이 날은 오늘로 묶어두면 안됩니다. 내일 월요일, 모레 화요일, 토요일까지 성스러운 날이 아닌 소위 일하는 날에도, 예수님의 날인 오늘을 그 주인처럼 하루하루 삶 속에 잉태해야 합니다. 주일날은 오늘 있는 날이 아닙니다. 내일도 주일이 있어야하고, 화요일에도 주일이 있어야 하고, 토요일에도 주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정신이 매일매일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부른 찬송은 출발이지만, 내일에도 찬송이 불러져야 합니다. 여기서 드린 예배가 이것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이 예배의 뜻과 정신이 내일 내 직장에서도 살아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도 울려 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안식일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참 좋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킵시다. 이렇게 하면 먹을 것, 마실 것 다 드셔도 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시스템이 예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모든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일 속에 잉태합시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하신 안식일의 뜻입니다.
이 눈으로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아담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하고,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홍수로 멸망시키고, 일부 남은 자들만 방주에 태워서 40일 동안 비를 안 오게 하고, 물이 다 빠지는데 걸린 기간이 3개월입니다. 오늘 노아의 방주 얘기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안식처, 홍수 속에서 사람이 살 집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거처할 집, 안부, 안식처, 보금자리를 주겠노라고 하셨고, 이것이 우리가 받은 축복입니다. 단 하나님은, 노아의 방주에서는 40일과 석 달 동안만 지내고, 방주의 문을 열 테니 방주로부터 나가서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농사짓고 축복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창조 때 하나님이 아담을 보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서 이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라, 했습니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다 멸망한 뒤에, 방주 문을 열고 다시 노아의 식구들과 세상의 모든 동물을 내보내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똑같습니다. 이제 땅을 새로 줄 테니, 비와 홍수가 떠내려가고 없어진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축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방주는 피난처이지만 영원토록 사는 피난처가 아니고, 이로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사명의 세계로 넘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식일에 묶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보호막을 터뜨리고 나와서 매일매일 지속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안식일의 뜻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부족한 면이면서도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내가 평생 살아온 내 집, 내가 살아온 사고방식, 삶의 방식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이것들을 영원무궁토록 지켜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사고, 틀을 참 좋아하는데, 인간의 가장 큰 고뇌는 자기가 살아온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터뜨리고 나오는 것,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희망이 있을까,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거기로부터 벗어 나와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의 기존의 틀, 벗어났으면 하는 틀, ‘status quo’, 이것이 방주입니다. 여기에 머물면 하나님이 만드신 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못 받습니다. 하나님은 40일 동안 방주에 계셨지만, 그 나머지는 땅에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넓은 세상을 향해, 가능성을 향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가셨습니다.
노아의 방주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 십계명은 돌판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돌판을 성전의 지정소에 보관하고,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돌판에는 십계명을 먹물로, 법으로, 문자로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는 돌판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은 사람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으로, 돌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가슴 가슴마다 하나님이 직접 영으로 썼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영으로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한 군데에 좌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찬양은 화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걷는 곳마다, 마음이 가는 곳마다, 움직임이 있는 곳마다, 구석구석에 계십니다. 찬양은 그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방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방주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현장입니다. 그러면서 나와서 일하고 살고 말하는 순간순간마다, 역사의 고비마다, 오늘까지도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을 즐기고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말씀, 그분이 주신 말씀을 오늘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본 속에, 가장 깊은 곳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의 화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 부활의 은총을 받은 여러분, 생명을 받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메신저입니다. 동시에, 전달하는 메신저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내 표정, 말,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내가 삶으로, 고백으로, 표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합니다. 아니, 그 나라를 제가 대표합니다. 당신들은 영으로 쓴 하나님의 생명 편지입니다. 생명의 메시지를 전달하십시오. 사십시오. 만드십시오. 하나님을 주일날 만들고, 만나고, 내일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내일도, 모레도 메시지이고, 살아 숨 쉬는 공간마다, 움직이는 발자국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편지입니다.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 찬양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살아있는 생명 메시지, 하나님의 축복, 풍성하게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