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평화의 약속

2012년 10월 21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9:10, 13-14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아멘.

에베소서 6:11-17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10:34-39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송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찬송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찬송과 기도와 감사를 통해서 호소하는 저희의 음성을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시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오늘 성경말씀에는 그 은혜를 총괄하여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를 평화라고 알고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또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경말씀 본문을 보면 평이하고 쉽고 분명해서, 읽으면 바로 가슴에 와 닿고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그러한데, 또 어느 부분을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끼게 되는 구절도 많습니다. 저도 설교 준비하면서 성경말씀을 택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도 찾아보고 여러 가지 참고서를 보며 뜻을 헤아리기도 하고 명상도 합니다. 그중에서 오늘 여러분이 본문을 택해서 마태복음 말씀을 읽으면 처음에는 당황스럽습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우리가 믿는 평화의 하나님 말씀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이 성경구절을 읽고 어느 분이 이런 얘기를 하셨는데, 오해하지 마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마 911 테러 이후였을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신학가가 이 말씀은 성경에 쓰인 말씀이 아니라 코란에 쓰인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무슬림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이 말씀 보면서 이 말씀은 성경에 쓰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깊이 들어가 봅니다.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예수님 말씀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만고의 진리가 되는, 시대 상황과는 상관없는 보편타당한 말씀들이 있고, 또 어느 말씀은 보편타당한 진실을 가지고 있으나, 시대 상황에 따라서 그 시대의 언어를 쓰고, 그 때의 상황을 다 집어넣으면서도 그 때 결단해야 될, 오늘 장로님의 기도처럼 예언자적이면서도 시대에 아주 걸출한, 푯대가 되는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보편타당한 진실의 말씀이나, 때로는 상황이 다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는데, 오늘 말씀은 당시 시대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가짜 평화가 아니라 진실 된 평화여야 한다. 진실 된 평화는 가짜 평화를 다 가위질로 잘라버리고,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새롭게 만드는 평화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있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런 평화를 주려고 내가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오면 그런 평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가위로 칼로 잘라낼 텐데, 그 때가 되면 과거의 가식된 평화에 따라서 맺어진 것, 묶여진 것이 다 잘리고 풀어질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고, 모녀의 갈등이 생기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될 것이다. 잘못된 관계로 엮어져 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다. 다 끊어진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새롭게, 아름답고 진실 된 사랑이 깃든 평화가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오늘 마태복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당혹스럽습니다. 2003년경 제네바에서 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성서연구의 인도자가 당시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한 신학자인 신부님이셨습니다. 이분이 오셔서 오늘 마태복음 말씀을 읽고 나서 눈물로 성서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 동안 티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평화롭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1989년 유럽 도처에서 평화와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동구라파 전체가 다 해체, 해산되는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도 해체되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북쪽의 슬로베니아부터 시작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이나, 마케도니아 전부 전쟁을 통해 다 갈라졌습니다. 갈라지는 것도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보스니아에 살던 세르비아 출신의 정회 목사, 신부, 신학자입니다. 세르비아가 실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고, 종교적으로 보스니아는 이슬람이 강하고, 소수이긴 하지만 크로아티아 가톨릭 계통 주민이 강하고, 이 분은 세르비아 정교회 출신입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갈등의 사태를 요약하면, 이런 가운데에서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독립된 국가를 가지려 하니 그동안 이들을 지배했던 세르비아가 강권을 발동해서 협박, 폭행, 저주를 합니다. 굴욕과 창피를 주어 보스니아 회교도를 굴복시키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 출신 군인들이 무슬림 지역에 있는 여성들 8만 명을 강제 성폭행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 문화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지금은 이 때 태어난 아이들이 다 성장했을 것입니다. 다문화, 전쟁 이후 세계, 평화, 어떨 것 같습니까? 세르비아 출신 신부가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평화를 주려고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어제까지 오순도순 살던 집안의 부부간에, 이웃 간에 한 동네에서 총 들고 전쟁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탄 때 촛불을 나누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촛불 대신 수류탄을 던집니다. 서로 죽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무엇입니까.”

눈물로 성경공부를 하는 상황에서 마태복음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세가 되면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입니까. 이 땅의 하나님의 평화는 총 맞고 죽임당하고 울고 폭행당하고 죽어갑니다. 예수님 오셨던 당시는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 로마 황제가 평화의 왕이며 독립도,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는 이 상황을 혁명을 통해 다 없애려고 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온갖 폭력을 내 어깨에 지겠다. 살상도, 부자유한 억압도, 착취도 내가 지겠다. 사람이 버리고 싶은 온갖 죄악, 평화에 반대되는 온갖 잘못을 내가 십자가에 지고 대신 죗값을 치르겠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이다. 나와 함께 이 길을 오려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가족도, 재산도, 아니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어야 나와 함께 이 길을 갈 수 있다. 마지막 결단이다.” 불자들은 스님이 될 때 출가합니다. 천주교 신부님들은 가족을, 인연을 떠납니다. 개신교 목사는 거꾸로 가족을 가지면서 목회를 합니다. 진실로 평화의 주님을 따르려 하면 무엇인가를 단절하고 버려야하는 결단이 필요한 줄 압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이 길을 가려는 사람은 다 버리고 나서, 십자가에 죽은 뒤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 끊어지면 다시 세우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워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평화를 만들어가자. 오늘 이 땅에는 가식된 평화가 너무나 많으며 이것은 언젠가는 잘라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가 끝이 아니듯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거짓된 평화를 잘라야 하는 칼의 역할을 하신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냥 일반 상황이 아닌 유고슬라비아 상황에서 읽었더니 같이 눈물을 흘리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과거에 많이 경험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6.25 전쟁에도 이 말씀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성장에 대해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며 찬양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있을 수 있지만, 엄청난 발달과 성장 속에 양극화 때문에 매일 울어야 하는, 배고파 눈물을 흘려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좋은 것 같지만, 그럴수록 그림자는 짙어갑니다. 유대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너무 추우니 햇볕을 주었는데,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구름을 주어서 햇볕을 막아주어야 합니다. 어느 상황이든 양극단이 있는데, 이 둘을 잘 모아서 인간의 생명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 속에서 꽃 피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잘못 지휘하면 제도는 망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역사 속에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체제를 만들어 오신 분도, 첨단 무기를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만드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운영하는 중심의 사람이라면 마음속에 하늘의 심장을 가지라는 말씀을 하시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에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창조의 근본, 사회, 모든 윤리, 안보의 근본을 깨달아야 합니다. 근본이 없으면 거짓된 평화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제 우리나라에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송도에 녹색구호기금(Green Climate Fund)라는 첫 UN 기구가 들어섰습니다. 보도를 보니 1년의 경제 이익이 3,800억 정도가 되며, 8,000명의 고용 효과가 있고, 전 세계에서 8,000억 달러의 기금을 모아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 정부 예산의 두 배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이렇게나 우리나라가 성장했습니다만, 빠진 것이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는 것만이 평화가 아닙니다. 성장 안에 녹색 성숙이 필요합니다. 환경파괴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는 이제 녹색 평화를 통해서 발전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연평도 옆인 송도에 전 세계가 함께하는 국제기구가 들어서면 전쟁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군사 충돌이 발생하기도 어렵습니다. 국제기구는 녹색 경제 성장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군사 안보, 마음의 안보 차원에서도 엄청난 방파제 역할을 하며, 사회 평화를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송도 프로젝트가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기구를 유지하는 데에 힘을 쏟는 것도 중요하나, UN, 국제기구, 우리나라 전체, 동북아, 온 세계의 핵심인 생명 존엄을 가지고 이 기구를 확대·심화시키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근본을 하늘 뜻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이러한 소명감과 사명감을 늘 가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면 거대 담론도 중요하지만, 담론을 따라 움직이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 뜻을 담아 일을 실천해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이 필요하고, 모든 것을 초월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부활을 주신 그분이 필요합니다.

2011년 대법원의 사법연감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20년 이상 산 부부의 이혼율이 자꾸 증가하는데, 이것이 전체 이혼율의 24.8, 1/4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혼 사유로 경제적 이유가 12, 부정이 8, 가족 간의 불화가 7 밖에 되지 않으며, 가장 큰 이유가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부유한 인프라가 생기고, 다양한 기회가 많아지지만 이것이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유해져도 서로 근본적이고 깊은 정과 사랑을 나누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이 미국에도 많다고 합니다. 워싱턴 주립대의 존 가트만 교수는 아주 단순한 세 가지만 지키면 이런 일 없이 행복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시시비비를 너무 가리지 말고, 가능하면 감사 표시를 많이 하고, 긍정적 태도로 살라는 아주 작고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이것이 사람을 못 살게 만듭니다. 국가 간의, 사회집단 간의 평화에 있어, 시시비비 잘못을 가리고, 감사 대신 분노를 먼저 표출하고, 긍정적 미래 대신 부정적 파괴적 과거를 논한다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런 모든 사회상을 아시고 잘못된 평화나 성령을 가지고 거꾸로 살지 말고, 필요 없는 것은 잘라내 버리고, 새롭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답을 오늘 에베소서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국가나 사회나 개인이나,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차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아무리 찔러도 좋은 검인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검을 들고 사십시오. 이 모든 것을 몸에 다 끌어안고 움직이며 살아야 하는데, 움직이는 발길마다 그 발길을 평화라고 이름 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평화는 진리, 정의, 믿음, 구원, 성령의 말씀이 함께 어우러져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이 평화를 드리겠습니다. 이 평화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정의로워야 합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뜻을 담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이 이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남의 나라 바빌론에서의 70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종료시켜 주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곧 약속인데, 숫자가 정확하게 산술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징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 맞추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제 식민지에 있을 때 70년이 절반인 36년이 지나니 하나님이 풀어주셔서 해방이라 이름 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오늘까지 우리는 분단이라 이름 하는 평화에 반대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2015년이면 70년이 되는 때인데, 한 번 꿈꿔 볼까요? 70년,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이 땅에도 통일이라는 평화를 주십시오. 그 때 통일노래 부르고 평화의 축복 받으며 예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꿈을 맡기지만 말고 만들어나가 봅시다. 하나님은 이런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서도 역사할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허리띠 삼아라, 가슴막이를 정의로 채워라, 믿음으로 방패를 삼아 구원의 투구를 써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 말씀으로 항상 사람들을 만나라. 그러면 이 땅이 가는 발길마다, 가정마다, 사회마다, 한 사람 사람마다 평화가 심어지고 움터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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