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62:6-7, 10-12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아가거라, 성 바깥으로 나아가거라. 백성이 돌아올 길을 만들어라. 큰길을 닦고 돌들을 없애어라. 뭇 민족이 보도록 깃발을 올려라. 보아라, 주님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신다. 딸 시온에게 일러주어라. 보아라, 너의 구원자가 오신다. 그가 구원한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그가 찾은 백성을 앞장 세우고 오신다.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라 부르며 ‘주님께서 속량하신 백성’이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너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도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아멘.
로마서 1:16-17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0:32-33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은 종교개혁 49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가 1517년입니다. 그후 8년 동안 종교개혁 운동을 많이 한 덕분으로 루터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현재 동독지역입니다만- 그 지역에는 종교개혁의 물결이 아주 많이 일어나서 대부분의 지역이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변화는 상황이 벌어 졌습니다. 그때 루터는 시간이 흐른 1529년 종교개혁 물결이 어느 정도 동독 지역을 다 평정한 다음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이제야 비로서 종교개혁의 본질이 살아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하자면, 종교개혁 승리 축하 겸 정리하는 설교였습니다. 루터가 설교한 그 교회가 지난여름(7월 15일)에 저희 교회의 남성노아합창단이 다녀왔던 성토마스(St. Thomaskirche) 교회입니다. 저는 그때 상징적이긴 합니다만 루터가 설교했던 설교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영광을 가졌고, 우리 노아합창단은 그 교회에서 200년 뒤에 지휘자로 오신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가 지휘하던 성가대(Thomanerchor)가 tjdrkfmf 불렀던 곳에서 찬양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저희 2부 성가대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편곡해 찬양으로 불렀고, 여러분은 아멘하셨죠. 또 저희가 예배시작하면서 시편교독 다음에 <내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함께 불렀습니다. 루터가 이 찬송을 작사 작곡한 해가 바로 라이프찌히 성토마스 교회에서 설교하셨던 1529년입니다. 이 분은 이 찬송을 작사하시면서 우리가 같이 봉독했던 시편 46편을 읽고, 감동하여, 찬송을 작사 작곡 했습니다. 이 곡의 초연이 어디에서 됐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토마스 교회 기록을 봤더니 루터가 작사한 찬송을 가지고 와서 본인은 설교하고, 당시 토마스 교회 성가대에게는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이러한 계기로 이 찬송이 설교와 함께 교회에서 불러졌습니다. 제가 오늘 그 장면을 연상해 봅니다. 물론 성가대가 편곡으로 불렀습니다만 이 찬송과 루터의 설교와 1529년의 이야기가 오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토마스 교회는 건축 예술에 있어서도 엄청난 교회였습니다. 아주 유명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교회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한 고비를 마감하는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에 속할 것입니다. 495년이 지나서 오늘 2012년 종교개혁 감사주일에 서울 장충동에 있는 경동교회에서 비슷한 뜻을 가진 종교개혁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가 서울시에 있는 25년 이상 된 건물 중에서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해서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혼자 받았으면 그저 그렇겠구나 했겠는데, 비교해서 보니까 괜찮더군요. 여러분 잘 아시는 세종문화회관이 대형건물로서 아주 좋은 건축물이고, 또 하나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이 외국계 건물로서 아주 좋은 건물입니다. 우리교회가 작지만 아름다운 혼을 담은 건축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저는 세종문화회관, 대사관, 우리교회 셋이 25년 이상 된 대표적 건물로 상을 받게 되어서 아주 마음속으로 기뻤습니다. 설계자, 신학자, 같이 건축에 동참해 주신 분들, 헌물, 기도로 같이 해 주신 분들 모두가 영광이고 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여름에 성 토마스 교회에서 찬양과 말씀으로 또 성만찬에 함께 동참할 때 그때 가졌던 감동은 이렇습니다. 그 교회는 건물만 있는 게 아니고, 그 건물이 "가득찼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 노아성가대 찬양으로, 참석하신 분들의 숨결, 호흡, 사랑의 눈빛, 모든 것으로 가득 찬 예배를 성만찬과 함께 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경동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이런 확신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건축학상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평가를 못하지만 사람들이 와서 하는 말이 여기에서 꼭 독창이든 합창니든 찬양 한 번 하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 건물이 받쳐주는 공간에서 오는 엄청난 음향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교회는 건물 만이 아니라 이 건물 속에는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의 혼이 오늘 가득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가득합니다. 여러분의 눈빛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하늘을 향한 기도의 음성이 가득합니다. 또 하나 가득한 것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이 건물 속에 가득합니다. 건물은 외양이 아니라, 건물은 혼을 가져야 건물의 가치가 있습니다. 혼이 없으면 건물은 그냥 서 있는 물체 일 뿐입니다. 그 물체를 좋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물체를 존경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할 수 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건축물에 더하여 정말 진지하고 깊고 넓은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매일 같이 그러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혹시 이 다음에 건축상이 아니고 "건축혼" 시상 대회가 있으면 한 번 나서 보십시다. 건축에는 혼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입김이 있고, 입김을 받는 사람이 응답하는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가득해야 아름다운 건축물이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건축이 그런 뜻을 담아 생겨났고,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건축이라고 한다면, 제가 아무리 화장을 잘한다고 해도 그 화장때문이 아니라, 제가 풍겨내는 인간미, 사랑, 진심, 기쁨이 사람들에게 부딪힐 때 저보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경동교회라는 아름다운 건축물, 멋있는 건축물,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맛있는 인간성과 진지한 신앙과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가득하더라. 여러분, 그렇게 움직이는 교회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1521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아름다운 교회인 성곽교회(Schlosskirche)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테제형식으로 붙였습니다. 이미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제가 오늘 설교를 위해 95개조 테제를 다시 한 번 다 읽어 봤습니다. 대부분 왜 면죄부라는 잘못된 도구를 팔아서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 자금으로 활용하며, 왜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용서의 은총을 돈 주고 산 수표 같은 죄책표로 대신 하는가 하는 반박문이 대부분입니다. 이 질문에 루터는 "안됩니다!"라 합니다. 그 이야기가 95개조의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합니다. 반박문 1조에 예수께서 오셔서 마태복음 4장 17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는데 회개하라는 말은 면죄부로 탕감 받는 게 아니고 몸과 마음 전체의 사람이 다 변화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입니다. 중간으로 내려가 보면 27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연보궤 안에 동전을 던지면, 던진 돈이 땡그랑 땡그랑 소리를 낼 때 마다 돈을 내는 사람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이렇게 교황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43조로 가보겠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한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돈 주고, 면죄부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훨씬 더 합당합니다.” 여러 가지를 풍자해서 비유한 말들이 나옵니다. "오늘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큰 교회를 짓겠다고 교황님께서 나서셨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차라리 부자인 교황 당신이 당신의 돈을 내어 교회를 짓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것이 86조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95조에는 "아무래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평온한 상태에서 예수 믿기보다는 가난고초를 견디며 하나님 나라의 들어가야 할 험난한 길을 타고 났다고 믿습니다. 구원의 길은 험난한 것 같군요. 하나님의 은총에 아멘!", 이렇게 해서 95개조 테제가 마감을 합니다.
루터는 1529년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설교하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로 일단락을 지었다고 했습니다만 루터는 그렇게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St. Peter)에는 우리교회와 비슷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계단을 딛고 교회당 입구로 올라올 때 골고다 언던을 올라오는 것처럼 형상화되었듯이, 바티칸 성당 진입구에도 계단이 많습니다. 루터의 기록에 보면 이 성당을 올라오면서 "하나님 제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라며 고통, 아픔, 후회, 회환, 모든 것을 담아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때 심정을 루터가 자신의 일기에 많이 썼습니다. 그렇게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아서 성당이 거대하게 지어졌습니다. 루터의 심정을 이렇게 한번 표현해 보겠습니다. “웅장한 건물 안에 가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찾는 신도들의 믿음을 제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속에 갔는데, 웅장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의 입김이 내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루터는 신부였고, 수도사였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어서, 본인은 무슨 소리 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라틴어로 미사가 진행되고, 라틴어로 설교하고, 라틴어로 찬송 부르고, 모든 것이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를 배운 성직자만 알지 그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을 빗대어 루터는 “나도 모르는 라틴 말로 강론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합니다. 가봤더니 진실로 말씀이 없었읍니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루터 이야기는 단순 합니다. 루터는 죄를 짓고, 죄 지은 것을 자신의 선생님이신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신부에게 늘 회개했습니다. 루터의 성격이 꼬장꼬장했나 봅니다. 죄 지은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못들어간다고 생각했던지, 죄만 지으면 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슈타우피츠 담임 신부님이 루터에게 말했답니다:“루터야, 자주 오지 말고, 제발 죄를 모았다가 고생성사해라.” 루터가 굉장히 자주 했나 봅니다. 너무 모으면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주했나 봅니다. 이런 루터는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면죄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말씀입니다. 면죄부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뱉는 마음의 고백, 곧 믿음으로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 사실이 루터에게 오면서 "믿음이 없는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사람들이여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 구원의 이르는 길입니다.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라틴어로 오직 믿음만(Sola Fide), 이 말 한 마디 속에 면죄부는 무효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으면 구원에 이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음만 가지고 구원 받습니까. 루터는 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믿음은 사람이 하는 결단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이 표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구한테 표출하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표출합니다. 제가/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드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믿음으로 만" 하는 이야기는 그 다음에 반드시 "은혜만"(Sola Gratia)을 전재로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납니다. 믿음의 사람이 은혜의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믿음이 은혜의 접촉 창구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은 자신을 여셔서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믿음과 은혜가 만나고, 믿음의 사람과 은혜의 하나님이 만나고, 둘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구원입니다.
면죄부는 이 구원의 만남 중간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루터가 또 하나 깨닫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라틴어 설교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믿어야 하는지. 믿으면 은혜의 창구가 어떻게 열리는 것인지. 믿으면 구원 받는 이야기를 어떻게 압니까.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열린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을 아는 창구가 있는데,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만"(Sola Scriptura)인 복음입니다. 성경말씀입니다. 라틴어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제일 먼저 루터가 결단한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아는 언어로 번역하자. 그래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독일어 성경 번역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우리말로 읽습니다. 그러니까 알죠. 그 속에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믿고 싶으면,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또 알아야 믿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말씀을 번역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런 일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먼저 우리가 믿어야 한다.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린다. 이 모든 사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쓰여 있다. 그래서 루터가 말합니다. 믿음만(Sola Fide), 은혜만(Sola Gratia),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만(Sola Scriptura) 입니다. 그래서 솔라, 솔라, 솔라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 세 가지는 루터가 개발한 발명품이 아닙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열립니다. 열리면 구원이 있다는 것이 성경에 쓰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서의 말씀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오늘 이 사실을 루터는 전국 곳곳 마다 다니면서 선포합니다. 그래게 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루터가 시작 한 이 계획은 면죄부 파는 걸로 시작했지만, 과정과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루터는 종교를 바꾸려고 개혁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껍데기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 건물과 종교는 종교개혁이후,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경동교회 건물도 83년 이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 성당도 변한게 없습니다. 껍데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개혁은 종교라는 껍데기의 변화가 아닙니다. 종교라는 틀 속에 담겨있는, 거기서 살아 숨 쉬는 우리 신앙인들이, 우리들 사람이, 사람이 갖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열고, 말씀을 접하고, 말씀대로 살고,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어울려서 사는 삶 전체가 변하는 것이 개혁이지, 삶을 만든 거죽이 변하는게 아닙니다. 종교개혁 한답시고 시스템 바꾼다. 건물 바꾼다. 이걸로 만족하시면 안됩니다. 그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복음이, 아름다운 건축물 속에 담겨있는 맛있는 복음이, 훌륭한 건축물에 담겨져 있는 혼이, 노래 소리가 아니라 노래 소리가 담고 있는 아름다운 찬양의 혼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기도의 소리가 아니라 기도소리 속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말씀에 쓰여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기도 들어보셨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된 백성 만들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아, 가만히 있지 말아라. 약속 주신 하나님을 깨워라. 반드시 받아 내어라. 하나님을 주무시지 못하게 해라. 다른 곳에 가시지 못하게 하고, 꼭 약속을 받아내도록 해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깨우라. 하루만 깨우지 말고, 매일 같이 깨우라. 그래기에 우리도 매일 같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의 아름다운 은혜와 우리 인간의 믿음이 아름다운 경동교회 건축물에 가득 채우게 하랍니다. 베드로 성당을 가득 채우게 하랍니다. 토마스 성당을 가득 채우게 하랍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이 채움의 은총을 가정에 가가져가셔서, 직장에 가져가셔서, 함께 채움을 노래하고 실천하면 우리에게도 개혁이 생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서 루터가 했던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 드리면 좋겠습니다.
루터가 교회에 가보니까 교회에는 믿음이 없고 종이쪽지만 있고, 혼이 없고 가죽만 있더래요. 그래서 잘 쳐다 보니까 사실 누가 없느냐 하면, 그속에 하나님이 안계시고, 사람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엮어 주는 것이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인데, 예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더랍니다. 루터가 찾은 성경말씀에 보면 죄를 짓고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에 메시고 대신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면죄부는 돈을 받고 사고팔지만, 십자가의 은총은 돈이 필요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성경 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런데 죽음으로 끝나고 아름다운 죽음을 죽은 게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원흉인 죄를 물리쳐 이기시고,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서 부활하셔서 새로운 생명이 되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승리를 맛보셨습니다. 그 승리한 부활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분, 부활하신분의 이름을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 합니다.
십자가 위에 죽으신 예수와 십자가를 이기고 부활하신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는 한분이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고통 없이 무임승차 하시려고 하시는 분은 성경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무임승차가 없습니다. 고통과 감내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십니다. 하나님이 은총과 사죄를 베풀어 주신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안됩니다. 부활은 믿는데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않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는 예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만나고 교통하는 우리의 증보자로 믿습니다. 루터가 발견한 건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믿음을 통해서 열쇠로 열면 하나님의 은혜가 열리고 구원의 은혜가 열리는데, 이 모든 진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도 세상도 이렇게 개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오늘도 종교개혁은 계속되어갈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새롭게 주님의 은총이 오늘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길 간구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