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1:13-17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아멘.
요한계시록 3:14-19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아멘.
누가복음서 13:6-9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아멘.
설교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가 간구할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져 신앙의 결단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셔서 은혜로 우리의 결단을 받아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한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불완전이 채워져 완전한 사람이 되고,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지난여름 런던 올림픽 잘 보셨죠? 올림픽만 되면 우리들이 신납니다. 올림픽 끝나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장애자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애자 올림픽에 대해서는 보도를 잘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장애자 올림픽을 보면서 장애자에게도 올림픽경기가 축복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장애자 올림픽이 있기 일주일 전에 WCC총회를 준비하는 목사님 몇 분과 함께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장애자 올림픽촌을 방문했습니다. 위치는 이천하고 여주 중간에 있는데요, 시설이 아주 좋아서 감탄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5번째 들어 갈 정도로 좋은 시설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우리 교회를 비롯해 몇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장애 체육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갔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남녀 책임자들이 오셨는데, 자기는 어느 교회 권사인데 장애자 올림픽에 와서 헌금 들고 위로하러 오신 목사님들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좋은 올림픽이 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헌금하고 기도했는데, 장애자 올림픽을 위해서는 우리 교회들이 그렇게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참 고맙다고” 하더군요. 많은 감동과 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애자 올림픽 때 개막연설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과학자, 스티븐 호킹박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분을 9년 전 캠브리지 대학 교수사택에서 만나 뵈었습니다. 두 번째 아내 되신 분이 간호사 출신인데, 이 부인 말이 21살 때 호킹 교수가 루게릭병 판정을 받고, 생명년한이 2년이라고 진단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답니다. 그럼분이 장애자 올림픽까지 와서 개막연설까지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늘이 준 생명이라서 믿고 의지하고 견디면 또 다른 생명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분이 개막 연설을 한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 언론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는 생김새가 다릅니다. 표준적인 인간이란 도대체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진 창조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들이 잘해 낼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는 다 가지고 있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장애자 올림픽 참가자들에게 한 장애자의 고백적 연설입니다. 제가 이 연설 내용을 들으면서 9년 전 뵙고 지금까지 건강한 그 분을 보면서 제가 감동으로 다가온 구절입니다. 세상에는 “표준적인 인간”이라 없습니다. 동의하시나요? 혹시 우리나라에도 언어가 있습니다만 어느 지방 말이 표준어인가요? 서울말이에요? 옛날에는 그랬지요.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느 지방 말이 표준어고, 어느 사람이 표준인간입니까? 물건 만들어서 이 정도면 국산품으로서 제품을 확실히 믿을 수있다라고 붙여주는 것이 “KS 마크”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GS 마크“가 필요합니다. KS마크는 최고의 품질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최적의 품질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완벽한 건 아니죠, 이 정도면 됐다는 의미죠. 세계 시장에서 GS 라는 정도는 되어야 품질을 인정받습니다. "최대 공약수" 정도가 기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하나의 표준이 절대적인 표준일 순 없습니다. 이분의 말대로 표준적인 인간은 없습니다. 그 말은 장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표준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입니다. 표준은 몸의 구성체만 가지고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몸도 몸이지만 인간은 몸과 혼으로,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창의성이 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분이 말하는 것 속에 구구절절이 실존적으로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아픔을 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며 제 가슴을 움직입니다. 표준적 인간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표준입니다. 표준적인 행복이라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표준점수는 있습니까. 평균은 있을 수 있지만 표준은 없습니다. 행복은 자기가 알아서 행복인 것이지. 표준적 행복이 저의 행복이라는 절대적인 잣대일 수는 없습니다. 주관적으로 제가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주관적으로 느낀다는 것은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가 느끼는 합의된 표준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절대적 기준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도 바로 이것입니다. 표준적 신앙은 없습니다. 누가 믿는 신앙이, 어떻게 고백하는 교리가, 어떤 신앙의 형태가 절대적 기준이라고 그런 것은 제 경험상 제가 아는한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표준은 모양이 너무 달라서, 다양해서 어느 하나만 하나님이 표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앉으신 여러분이나 저나 각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아셔서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신앙 가지고, 생김새 가지고, 성적 가지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표준은 없습니다. 아니 말을 바꾸면 표준은 다양합니다. 아주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표준은 하나님이 정한다는 거죠. 신앙의 세계는 그렇다.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이론과 감성 가지고 신앙의 표준을 절대화 하지 마라. 표준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죠.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대결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기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믿고,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올 때 마다 살찐 송아지 잡고, 물건 가져다 받치고, 그리고 여러분이 만든 것 중에 제일 좋은 것 가지고 와서 나한테 선물이라고 재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싫다. 더 이상 제물 받기도 싫고, 너희들 하는 모든 행사가 싫다, 지겹다. 왜 그런 것만 가지고 오느냐 하면서 오늘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제물을 가져오지 말고 차라리 억압받는 사람 도와주워라. 나한테 찬송 부르지 말고, 고아를 도와주어라. 과부를 위해서 변론해라. 그게 내가 보는 신앙의 표준이지, 나한테 물건 가지고 오는 게 표준이 아니다. 나를 찬양하기보다 일상 속에서 정의를 찾아라. 그것이 내가 보는 신앙의 표준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숱하게 여러 성경 구절에서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을 전제로, 신앙을 갖는 사람과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이에 어디서 표준을 구하면 됩니까? 우리의 질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갈까요? 무엇을 가지고 가면 되느냐니까, 정의를 말씀하셨고, 과부 도와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물건도, 정의도, 선행도 받으시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또 있습니다. 선행을 행하는 사람 자신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받고 싶어 하십니까. 우리가 함께 봉독했던 주보의 교독문, 시편 51편을 한 번 찾아보시지요. 교독문 제일 마지막 두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 함께 봉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장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구체적입니다. 찢겨진 심장을 가지고 오라. 짓밟힌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것이 진정한 내가 받고 싶은 제물이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신앙의 세계에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도 받치는 그대들의 인생길에, 결단 속에, 예배 속에, 찬송 속에 나도 동참하고 싶다. 왜 내 동참의 길을 막고 너희가 알아서 포장해 가지고 잘된 것처럼 꾸며가지고 진실인 것처럼 가지고 오느냐. 지겹다. 있는 모습그대로 가지고 오라. 아주 구체적으로 찢겨진 심장을 가지고 와라. 그러면 내가 보완해 주마. 믿음의 마음으로 찢겨진 심장을 가지고 오면 내 은혜로 다시 고쳐주마. 그래서 아름다운 행복의 마음을 주마. 짓밟혔으면 그냥 가지고 와라 내가 다시 일으켜 주마.
하나님이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을 전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남겨놓아라.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가로채지 마라. 신앙이 좋다고 절대화 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그렇게 하면 하늘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신앙이 좋다는 말은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 주시고, 채워 주시고, 보살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과 나와 하늘과 땅의 합작품, 그것이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거 아닌가요? 내가 믿는 것을 절대화 하고, 내 사고방식을 절대화 하면 모든 것이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립니다. 옳고 틀림은 하늘이 결정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오랍니다.
오늘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런 비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라오디게아, 이 도시는 요한계시록에 쓰여져 있는 7개 교회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교회 전부가 지금의 터키 서남부에 집중해 있습니다. 그 중에 라오디게아라는 도시가 있는데, 지금도 있습니다. 두 도시 중간에 있습니다. 히에라볼리, 이 도시는 유명한 관광도시로, 온천수가 많이 나는 곳입니다. 그 밑에는 골로새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두 동네에서 나오는 물은 전혀 다릅니다. 히에라볼리에서 나오는 물은 온천수로서 따뜻합니다. 골로새서에서 나오는 물은 산간지대라 찬물이 나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찬물이 나와서 중간에 있는 라오디게아에서 연결이 됩니다. 이 도시의 사람은 둘을 섞은 미지근한 물을 먹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이 환상을 보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따뜻한 물도 아니 것이, 찬물도 아닌 것이 뒤섞여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물로 먹고 사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봤더니 열정적인 신앙도 없고, 그렇다고 아주 많이 아는 차가운 이성적 신앙도 없고, 하나님 닮은 모습도 없는 것 같고, 참 사람의 모습도 없는 것 같고, 적당히 만들어서 미지근한 교회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싫다. 미지근한 게 싫다. 차라리 히에라볼리처럼 따뜻한 던지, 골로새처럼 차든지 하면 내가 은혜를 어떻게 베풀지 알겠는데 미지근하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히에라볼리 사람들은 신앙의 열정이 뜨거워 가지고 펄펄 끓는 감성과 가슴을 가진 신앙을 갖는 사람들이니까, 그것 그것대로 내가 좋다.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냉철한 합리적 사고니까요. 골로새서 사람들은 너무나 차가운 이성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따뜻한 감성적 신앙이다. 그것을 내가 더해주면 되겠구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이 합해져야 참 인간이 되는데, 두 곳이 다 짬뽕이 되어서 미지근하면 이성도 없는 것 같고, 열성도 없는 것 같다구요. 따뜻한 마음도 없는 것 같고, 차가운 냉철한 이성도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는 뱉어 버려야겠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완성시키고 싶은 영역이 없는 때문입니다. 참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하고, 미지근한 것 버리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바쳐라. 사고방식을 바꿔라. 미지근한 것이 제일이라고 했던 사고방식을 바꿔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표준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화하는 사고방식을 바꿔라. 사고만 바꾸지 말고 행동도 바꿔라. 미지근하게 살지 말고, 차게 살면서 따뜻함을 구하든지. 뜨겁게 살면서 차가운 이성을 하나님께 그렇게 은혜를 간구해라.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고 나한테 오라.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일상적인 말씀이긴 한데 우리가 믿는 신앙과 사고를 절대 표준치로 갖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제일 못마땅한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서죠. 하나님이 한일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를 절대화하면, 자신을 신격화 하면 그 다음에 하늘의 양식은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현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하늘이 해야 할, 보충해야 할 일을 사람이 채가지 말라.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채워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신앙의 영역만 있나요?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경제는 어떻고, 문화는 어떻고, 사상의 세계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각자가 각 표준이 있는데 나만 표준이라고 생각을 하다보니까 사람이 들어올 곳이 없고, 공동체가 들어 올 곳이 없고, 하나님마저 들어올 것이 없습니다. 개방하십시오. 여십시오. 하나님 일 할 것을 빼앗지 말고 드리십시오. 그리고 함께 모여서 아름다운 합작품을 만듭시다.
예수께서 오셔서 유대사람들과 무화과나무 열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어서 3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본문에도 3년째 되어 주인이 와서 보니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는 말이 이 나무는 잘라서 불쑤시개로 버리겠다. 그러니까 과수원지기가 하는 말이 한해만 더 참아 주시면 내년에 열매를 맺게 하겠습니다. 거름도 주겠습니다. 그때도 안되면 불쑤시개로 잘라서 버리십시오라고 애원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목적은 줄기가 잘 자라서 잎사귀가 엉성하고,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식물마다 다 목적이 있는데, 소나무는 자라서 건축 자제가 되면 좋습니다. 허나 무화과나무는 구부러져도 괜찮습니다. 곰팡이가 피어도 괜찮습니다. 줄기가 낮아도 괜찮습니다. 열매만 맺으면 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요구하는 것이 열매이지, 무화과나무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병들었다고 아프다고 자라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으면 무화과나무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저도 중동을 방문하면서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를 많이 봤습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도 그랬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는 것이 존재이유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존재의 이유를 망각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거죽만 말끔합니다. 그러면 잘라 버리겠지요.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교지도자 당신들이다.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했더니 신앙의 열매는 맺지 않고 자기가 만든 스스로의 열매만 맺고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니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 있고, 자기들이 건강하다고 하나님을 병자의 심판자로 규정해 버렸으니 누가 병을 고쳐주겠느냐? 율법을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하니, 그것을 표준으로 하니, 율법 밖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신앙, 그것이 절대적 표준이 아니다. 표준은 나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것입니다. 논쟁이 벌어 졌습니다. 안식일 논쟁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의 표준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표준은 다릅니다. 안식일이 표준으로 주어졌지만 사람을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죽은 자를 안식일에 살려야 한다. 배고픈 자를 안식일에도 먹여 주어야 한다. 목마른 자는 안식일에도 마시게 해야 한다.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안식일이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표준에 관한 극도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과실수를 맺어라. 열매를 맺어라 하십니다.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에 농사를 지어 추수할 때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벼이삭이 나오고, 보리이삭이 나오지요. 이 모든 것을 나무 스스로 하는 것입니까? 나무가 최선을 다해 열매를 맺을 수는 있으나, 풍성한 밤, 감, 사과를 추수합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바람, 햇빛, 공기와 같이 나무가 아닌 밖에서 오는 힘이 합쳐져야 열매가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신앙가지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밖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합쳐져야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왜 바람과 공기와 물과 신선한 햇빛이 있을 구멍을 막고 나에게 올 때는 회칠한 무덤을 가지고 오느냐? 사람이 죽어져 있는 무덤 있는 그대로 가지고 와라. 회칠한 무덤은 내가 살려낼 수가 없다. 병든 마음과 찢긴 마음을 가지고 와야 내가 고쳐 줄 수 있다. 왜 회칠한 무덤처럼 거짓을 나에게 가져 오느냐, 그것은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 신앙의 열매는 있는 모습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가지고 와서 진실로 호소하면 내가 은혜로 갚아서 고쳐주고, 새롭게 해준다.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단순히 열매를 많이 아는 걸로, 많은 스펙을 쌓는 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열매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 신앙입니다. 회칠한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실을 담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햇빛과 물이 같이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하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만든 구원을 가지고 있다며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 하늘이 들어갈 공간을 내어 주지 않는 것, 공간이 꽉 찼다고 거짓말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찍어서 불쑤시개로 써야 할 것이지, 열매로 축복받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나도 함께 일하고 싶다. 나도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싶다. 막지마라. 그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명성을 얻으려고 스스로 의롭다 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명성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은 명성을 잡을 수 없다. 명성이 항상 빠르니까. 명성을 포기하고 피하여 도망가는 사람은 명성을 와서 피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명성을 준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면 은혜가 와서 진정한 신앙을 붙들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우선권을 드립시다. 그분이 동참할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과 함께 찬양합시다. 서두에 스티븐 호킹박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이 분이 개막연설 마지막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발밑을 쳐다보고 살지 마십시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 별들이 반짝입니다. 별들과 함께 사십시오"라교요. 하늘 쳐다보고 사십시다. 그리고 땅에서 열매 맺읍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