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1999. 6. 20.
'쉬리'를 넘어서
(미가 4:1-5, 마가 5:1-15)
1. 들어가는 말: 냉전의 한복판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49년이 흘렀습니다. 20세기의 절반을 지배하던 냉전체제라는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숱한 전쟁의 포성들도 잦아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만이 아직도 분단되어 늘 냉전의 마지막 희생제물이 될 위험 속에 있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남북한 함정 사이의 교전은 이러한 현실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 사이의 교전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은 최근에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들입니다. 이들은 이른바 '신북풍'설을 제기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대북지원 및 포용정책이 '상호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처럼 형성되고 있는 남북대화의 기회가 다시금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북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서해에서의 교전이나 한나라당 및 보수언론의 행태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생활 속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우리의 무의식 속에 가라앉고 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냉전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합니다. 과거에는 정권 안보 차원에서 조작되고 강요된 이데올로기 주입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인 집단적 무의식이 형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영상매체들을 통하여 너무나 자연스럽게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전국적으로 58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영화"로 각광을 받고 있는 영화 '쉬리'는 이른바 '햇볕정책'에 대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직접적인 공격과 저항 못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리'는 긴장감 넘치는 액션과 서정적인 멜로 드라마적 요소로 포장하여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관객들이 무비판적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간첩영화, "간첩 리철진"도 결국에는 분단상황 극복보다는 분단상황이 초래한 편견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화 '쉬리'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분석함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 정신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쉬리' 유감
영화 '쉬리'는 서울의 관객을 243만 명이나 동원함으로써 영화 '타이타닉'이 동원한 관객수를 훨씬 앞질렀습니다. 이처럼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쉬리'는 전국적으로 관람료 수입만 140억의 수익을 올림으로써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헐리웃의 지배를 극복하고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됩니다. 또한 일본에 130만불에 판매되는 등 해외배급을 통해 약 500만 불의 수익을 올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결국 '쉬리'는 총 220억의 수익을 올리는 문화상품으로 경제학적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리에는 '쉬리 호프', '쉬리 다방' 등이 들어서는가 하면, 주제가가 담겨진 CD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젊은 강제규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1992년 9월-1998년 9월 사이의 한반도를 무대로 삼고 있는 대규모 첩보액션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북한 특수 8군단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은 여성 첩보원 이방희가 남한에 밀파되어 요인암살, 다리폭파 등 적화전략을 수행합니다. 이방희는 성형수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요양원에서 요양 중인 이명현(김윤진)이라는 여인 행세를 합니다. 이명현의 모습을 한 이방희는 수족관을 운영하면서 남한의 정보기관인 OP 요원, 유중원(한석규)과 열애에 빠지게 되고, 동시에 OP에 물고기를 납품합니다. 이방희는 물고기 뱃속에 넣은 수신기를 통해 OP 요원들의 대화를 도청하여 OP보다 한걸음 앞서서 적화전략을 수행하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이 비밀리에 개발하여 수송중이던 CTX 액체 폭탄이 북한에서 추가로 밀파된 특수 요원들에 의해 탈취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북한의 첩보요원들은 이 폭탄을 서울 시내 곳곳에 설치해 놓습니다. 고층건물이 파괴되어 아수라장이 됩니다. 유리창 파편이 눈 내리듯 흩어지고, 온몸에 불이 붙은 남자가 자동차 위로 떨어져 죽어갑니다. 자동차들이 서로 부딪쳐 폭발합니다.
번번이 정보누출로 인하여 작전에 실패하는 남한의 OP요원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내뱉어집니다: 이것은 "화해무드로 눈 가리고 뒤통수치기"이다; "발 밑의 함정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남한 정보원들의 발언은 극중에서 남북한 화해무드에 저항하는 북한 첩보원들의 책동 못지 않게 '햇볕정책'에 대한 거부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됩니다.
마침 서울에서는 남북한 친선 축구 대회가 열리고, 남북의 요인들이 관람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첩보원들은 화해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전쟁을 유발시키기 위해 남북한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경기장에 폭탄을 설치하고 폭발하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을 눈치챈 남한 특수요원인 유종원이 사투를 벌여 가까스로 폭발을 저지하게 됩니다. 작전이 실패한 것을 감지한 이방희는 스스로 북한 요인을 암살하기 위하여 뛰어 듭니다. 이방희는 요인암살을 막으려는 유중원의 저지를 받습니다. 서로 두 사람은 상대방을 향해 총을 겨누고 서 있습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면서 동시에 각각 남과 북에 속한 첩보원들로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서 있는 것입니다. 관객들의 숨이 멎는 순간이 지나가면, 이방희는 총구를 북한요인의 승용차로 옮깁니다. 그 순간 유중원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여인 이방희는 결국 이념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어갑니다. 쓰러진 약혼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중원은 뒤돌아 걸어갑니다. 나중에야 그는 약혼녀의 진심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와 털실로 곱게 짠 쉐터를 발견합니다. 결국 북한 강경파들의 이른바 "전쟁책동 시나리오"는 남한 첩보원들의 활약으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며칠 전, 한 TV방송사에서는 '쉬리가 남긴 것'이라는 특집을 마련하여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여러 측면에서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는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여론조사 결과 관객들이 감동을 받은 장면들은 헐리웃 스타일의 액션 장면이 아니라 남북의 두 첩보원들의 사랑을 담은 감상적 장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냉전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영화는 헐리웃 스타일의 특수효과와 액션장면들을 통하여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의 첩보원들이 1990년대 남한 사회에서 요인들을 암살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도 적화전략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픽션일지라도 영화는 한국의 현실을 실제보다도 더욱 위기상황으로 그림으로써 모처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 첩보대장 격인 박무영(최민식)의 액션이 인기를 끌면서 북한 첩보원 박무영의 냉정하고 잔혹한 이미지가 그대로 북한주민들의 모습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약혼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이방희의 이중적인 삶에서 북한의 대화나 화해 제스처는 속임수에 불과할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북한 첩보원들에 비하여, 남한의 첩보원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며 무능할 정도로 순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더구나 남한 첩보원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라는 귀결은, 헐리웃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민족의 생존여부가 소수의 첩보원의 손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안전과 평화통일은 정보요원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처럼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해에서 교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미 영화관에서 그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남북 첩보원들 사이의 교전을 '관람'하였습니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흥행하는 그 영화를 즐겼습니다. 헐리웃 스타일의 영화로 헐리웃을 극복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극복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 영화사상 어떤 영화보다도 더 분단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의 흥행 성공에 대한 갈채를 뒤로하고, 우리는 하필이면 이런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결코 DJ 정권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포용정책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오늘의 '귀신'추방
끈질기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삶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구조와 문화까지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냉전 시대의 논리와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원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우리의 힘을 능가하는 강제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슬픈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거라사 지방에서 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고난받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거라사 지방은 본래 갈릴리 호수 동남방 60km에 위치하여 있던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설화는 호숫가에 직접 붙어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라사 지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갈릴리 호수 동남방 10km에 위치한 가다라 지방(8: 28)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의상 본문에 나타난 지명인 거라사 라는 도시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시에 무덤은 도시 바깥에 암벽에 구멍을 파서 만들었습니다. 무덤은 귀신들이 즐겨 거주하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아직 살아있지만, '이미' 죽음의 영역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습니다(5:5). 악령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를 돌보고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의 의지를 능가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 사로잡혀 그는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죽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학적인 행위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 두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여 쇠사슬과 쇠고랑마저 부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일에 집중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냉전체제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슬픈 모습을 바라봅니다. 남북이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서로를 파괴하기 위하여, 결국에는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하여 살상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습니다. 온 힘을 한반도와 한민족의 생명을 보전하는 데에 바쳐도 부족할 터인데, 우리는 한반도가 마치 남의 땅인 것처럼, 한민족이 마치 남의 백성인 것처럼 효과적으로 파괴할 궁리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북 교전 상황을 보도하는 아나운서는 남한의 무기가 북한의 무기보다 더 발달한 최첨단 과학무기이므로 북한을 격파하였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무기 때문에 죽어간 병사들도 다름아니라 우리의 동족이라는 사실은 전하지 못합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를 지배하는 귀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 외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는 지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의 세력과 자기자신을 동일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를 지배하는 세력의 운명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해방, 그의 구원 가능성에 직면하여 오히려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국제사회에서 살아 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마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인양 괴로워하고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예수에게 저항합니다: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문제삼지 않는 그런 메시야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판 귀신인 냉전 이데올로기를 추방하려는 메시야는 그들에 의해 철저히 거부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대체 어떻게 이처럼 인간이 철저히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까? 그를 악령으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마저도 원망하고 거부할 만큼 그렇게 철저히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거라사 지방의 고난받는 사람을 지배하는 악령은 스스로의 정체를 "레기온"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표준번역 성서는 "군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악령의 이름이 "군대"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점령세력은 로마 군대였습니다. "레기온"이란 약 6000명으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 군대의 한 사단"을 의미했습니다. 거라사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이름이 바로 로마군대의 사단 이름과 같았다는 것은 정치적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수 많은 "군대" 귀신들은 예수께 그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 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실제로 그 지역을 점령한 로마군인들은 그 지역을 떠날 의도가 없었습니다. 점령세력에 의하여 그 지역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이 설화는 이러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도 다름아니라 한반도를 점령한 강대국들에 의해 주입된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주체적으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지 못합니다. 북한에 대한 회담의 파트너는 아직도 미군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주체적으로 분단극복을 위해 북한과 평화협정을 전개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아직도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그랬듯이 우리의 운명은 철저히 강대국들의 군사적 논리와 이해관계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남북 양측에는 군사문화가 백성들의 삶 깊숙히 침투하여 삶의 스타일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강대국의 '보호' 아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군사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안전하게 생존하도록 돕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예수께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말고 돼지 떼 속에서 살아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돼지를 사육할 리 없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의 이방 땅이므로 그곳에서는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의 간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의 바램은 성취되었으나, 결과는 귀신들이 예기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귀신들은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와 함께 호수에 빠짐으로써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악의 뿌리가 제거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군대' 귀신은 거라사 사람에게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마침내 제정신이 들어 단정한 모습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기를 애원하는 그 사람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냅니다. 죽음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삶의 한복판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귀신이 추방되어야 사람은 비로소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고통스런 만남을 통하여 거라사 사람은 마침내 구원받은 삶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귀신의 종말이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악귀추방 사건은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자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는 구세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군대' 귀신 추방이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악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저 거라사의 고통받는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와의 '고통스런 만남'을 감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악한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우리의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이데올로기를 추방하는 구원자로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4. 맺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꿈을 노래하자
서해에서의 교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 대다수의 태도는 너무나 차분하였습니다. 94년 6월, 이른 바 "북핵" 문제로 인하여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절, 전쟁발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국민들에 의해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과 부탄가스에 대한 사재기가 발생하였으며, 심지어 방독면이 불티나게 팔렸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입니다. 증권시장이나 달러에 대한 환율에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금강산 관광 예약 승객의 97%나 되는 사람들이 교전발생 직후에 유람선에 올랐습니다. 이제는 국민의식이 성숙한 것입니다. 이제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야당이나 보수언론의 선동과 위협이 더 이상 국민들을 우롱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미 냉전질서와 냉전적 사고의 틀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던 냉전 이데올로기를 추방하는 사역을 전개하시는 것입니다.
포용 정책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는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은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으로 저 거라사에서 악령을 추방한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지나간 시대의 사악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냉전 해체를 위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시대에 허락된 신앙인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대북 포용 정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현실적이며 불가피한 노선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북 양측의 지도자들이 긴장완화와 화해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기조를 강화할 것을 천명하였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남조선 당국자들이 긴장상태를 완화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베이찡에서 차관급 회담이 성사되리라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6월 25일이 돌아옵니다. 이 날이 오면 우리는 이렇게 노래부르곤 하였습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릴 쫓고도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며 성장했습니다. 애국심에 취하여 눈을 부릅뜨고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우리의 자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이 노래를 부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더 이상 이 땅에서 '쉬리'와 같은 영화가 상영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대 히브리인들처럼 이렇게 평화의 시대를 꿈꾸고 싶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살상무기들을 녹여서 생명을 가꾸는 도구로 만들고, 무의미한 노동인 군사훈련도 하지 않으며, 노동의 대가를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세상!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면서도 이처럼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꿈꾼 히브리 신앙인처럼, 우리도 함께 같은 꿈을 꿈꿀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는,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꿈은 현실로 된다"고 말했다 합니다.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아니, 이미 우리보다 앞서서 평화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면서, 6월 25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