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0. 6.11.
평화의 영이여, 오소서!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13)
1. 들어가는 말
현충일과 남북 정상회담 사이에서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희생을 애도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사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평화로운 미래의 꿈을 담고 있는 정상회담 사이에서 성령강림을 기념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평화의 하나님의 영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의 현충일은 일종의 국가종교적인 기념일입니다. 현충일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죽음을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혹은 자유의 이름으로 예찬함으로써,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면 국가나 민족, 혹은 자유와 같은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도록 젊은이들을 권장합니다. 그들의 희생은 결코 어리석고 사악한 정치지도자들의 그릇된 통치행위와 전쟁행위의 결과로서 초래된 억울한 죽음이었음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른 바 '적'들의 죄악이 다시금 기억되고 그 '적'들에 대한 증오심이 부추겨집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대화와 협력의 관계를 확대해야 한다는 깨달음보다는, 안보와 경계태세가 강조됩니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보다는, 젊은이들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위하여 항상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부추겨집니다. 현충일에 젊은이들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사랑과 헌신, 거의 종교적 사랑과 헌신을 요구받습니다. 현충일은 바벨탑을 쌓는 문명의 결과이고 또한 동시에 바벨탑을 유지시키려는 술책으로 제정된 국가종교적 기념일인 셈입니다.
2. 바벨탑 문명을 해체시키는 하나님
고대, 특히 기원전 2천년대의 고대 바벨론, 즉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세계의 심장부요 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마다 지구라트(ziggurat)라는 주위에 계단이 붙은 웅장한 탑이 건축되어 그곳에서 여러 종교행사를 가졌다고 합니다.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대 바빌로니아 각지에 33기의 지구라트가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 바벨론의 지구라트는 수메르인이 착공했으나 미완성이었는데, 후대 신흥 바빌로니아 시대에 공사를 재개하여 기원전 6세기에 가까스로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탑을 완성시킨 왕은 느부갓네살 2세인데, 이 왕의 비문에 따르면 탑은 기반의 한변과 높이가 각각 90m이고 계단식 피라미드 모양이었다고 하며, 6층 위에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서가 바벨탑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지구라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신앙인에게 이 지구라트가 주는 웅대함은 가히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무력통치의 상징이었습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바벨론은 죄스러운 교만의 대명사로 통칭되고 있습니다(이사야 13:19 등). 성서기자는 지금 바벨론의 지구라트, 즉 바벨탑 건설을 통해 시도되는 강력한 세력 구축을 하나님께 대한 교만하고 적대적인 반역행위로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형성한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시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4) 예나 지금이나 높은 건축물을 짓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지역의 통치자의 능력과 권위를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높은 건축물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고, 모든 권력과 세력이 그 높은 건축물의 소유자로 집중됩니다. 오늘날도 각국이 높은 건물을 짓는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63빌딩이 높이 솟아 있어 남한의 기술과 가능성을 그리고 동시에 부유함을 상징적으로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도 주체탑을 비롯하여 거대한 건축물들이 솟아 있어 북한의 기술과 가능성을 그리고 동시에 권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마천루(摩天樓: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고층건물!)라 불리는 '엠파이어(=제국!) 스테이트 빌딩'(the 'Empire' State Building: 1931년 뉴욕에 세워진 지상 102층, 381m 높이의 고층건물)을 비롯하여 각 국의 높은 건축물들은 모두 그 나라의 기술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과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관광의 명소이기도 합니다. 고대나 현대나 그러한 건축물들은 주변국가들에게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상징물들로서 기능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첨탑을 지닌 거대한 교회당을 세우기 위해 경쟁합니다. 교회당의 크기는 목회자의 능력과 권세를 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서는 11:5에서 야훼께서 인간들이 짓고 있는 그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높이 계시고, 인간들의 건축물은 너무 작아서, 하나님은 가까이 내려 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대한 초월자 하나님과 너무나 작고 빈약한 인간들의 결과물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큰 도시문명을 구가해도, 아무리 높은 기념탑을 지어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보잘 것 없는 작은 시도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히브리 신앙인들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아무리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신격화할지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관철시키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초라하고 어리석은 시도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이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공모하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하는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편 2:1-4)
역사적으로 강한 지배자들이 그리고 강한 민족이 스스로를 신격화하였을 때, 수많은 피지배자들 그리고 주변의 약소민족들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했는가를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는다는 것 자체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쌓아진 바벨탑은 국가 내에서는 물론이고 주변 국가들을 향해 제국주의적인 강력한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고 또한 강요하는 상징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벨탑을 쌓는 문명은 무력과 폭력으로 그리고 마침내 전쟁으로 인류의 역사를 왜곡시켰으며, 지금도 그러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들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하나의 중앙체제에 집결시키는 작업이 내포하는 가능성들과 유혹들을 통찰하고 예방조처를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일치를 깨뜨리십니다. 언어를 혼란케 함으로써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는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이 설화의 의미를 숙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 신앙인은 '도대체 민족들과 언어들이 왜 그렇게 많아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설화는 실제 하나님의 심판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민족들과 언어들의 다양성을 인간들의 집단적인 죄악, 구조적인 악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일종의 '원인론적 설화'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강력한 지배권을 장악한 인간들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함과 오만함은 결국 인간상호간의 몰이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고대 바벨론시에 지으려 시도한 '하늘에 닿는' 바벨탑 건축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지배권 아래 묶으려는 제국주의적 시도가 실패하였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신앙인들은 그러한 실패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으려는 모든 시도들을 묵과하시지 않으십니다! - 바로 이 신앙고백에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닌 강자들에 의한 착취와 억압에서 고통받는 히브리 신앙인들의 희망과 기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성령강림의 의미
나세렛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쌓아 놓은 바벨탑을 유지 보존하려는 최후의 위협수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위협수단도 무릅쓰고 로마의 바벨탑을 헐어버리려 투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바벨탑을 정당화하고 또 유지 보존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파괴하였습니다. 폭력과 권력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질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려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이 해체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그 바벨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희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바벨탑 위에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주변에는 예수를 살해한 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권력체계만이 아니라 식민지 이스라엘의 지배권력체계들도 여전히 견고하기만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두려움과 회의에 사로잡혀 어느 다락방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그들의 신비한 경험을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2:2-4에서 읽은 바와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보도 내용을 문자대로 이해하여 같은 경험을 스스로 체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한 것은 종교적 호기심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 보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재현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실제로 어떤 신비체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같은 경험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의 의미, 곧 제자들에게 발생한 변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언이란 외국어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이 외국어로 통역되어 각국에서 몰려든 유대인 교포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바벨탑 건축 시도로 인하여 갈라졌던 말들이 이제 하나로 통일되어 의사소통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결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방언'의 기적을 왜곡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 이른 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방언으로 축복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승객들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방언으로 여러분을 축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행전에 보도된 방언이란 신비한 말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유대인 교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였으며, 그들은 그 외국어를 통하여 제자들의 말의 내용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 기적이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지껄임이란 결코 성서가 말하는 방언일 수 없는 것입니다. 방언이 필요했던 이유는 '의사소통'을 위해서였습니다.
인간들이 더불어 살기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의사소통'입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은 국내에서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같은 한국말로 말을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친한 친구간에도,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간에도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면서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각자의 사고방식과 지향하는 가치 혹은 습관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 여당과 야당 사이에, 호남과 영남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각각 이해관계와 관심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50여년이나 남한과 북한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들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족이면서도 서로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내리는 성령은 바로 이러한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일차적인 장애인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저 바벨탑의 심판을 극복하는 은총의 영으로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럼 성령강림을 통해 모든 언어를 뛰어 넘어 전달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성령강림 사건보도는 베드로의 설교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담대하게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의 핵심은 36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과 증언 안에 성령강림으로 인한 인식의 변화와 태도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에게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증언할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방언 기적에 몰두하여 그 방언의 핵심 내용 안에 담겨진 새로운 깨달음과 제자들의 삶의 변화를 간과하곤 합니다. 그러나 방언 기적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진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로마제국의 바벨탑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사형수였던 바로 그 예수가 '주('주'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칭호로서 당시의 주는 로마 황제였다!)와 그리스도'라는 깨달음과 신앙고백은 혁명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로마 황제를 비롯하여 강한 자들이 주님으로, 즉 신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로 숭배되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러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형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깨달음은 인간의 일반적 인식을 철저히 뒤엎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도 제자들은 아직 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그들의 인식은 철저한 혁명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살인자들을 피해 숨었던 그들은 담대하게 그 깨달음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살인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신앙의 투사들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을 모아 공동생활에 들어갑니다. 고대 신분 사회 한 복판에서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오아시스가 형성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결과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는 시도, 즉 강력한 힘을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시키고 또 과시하려는 인간들의 음모는 늘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없이 처형당한 유대 청년 예수를 통하여 인류를 다시금 하나로 결집시키려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간들을 변화시켜 힘과 권력을 추구하고 동료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옛 인간성을 버리고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새로운 인간들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 새로운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를 새롭게 하려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강림을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혁명 프로젝트입니다. 이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4. 마치는 말
이제 우리는 이 성령강림절에 한반도를 변혁하는 평화의 영으로 오시는 성령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동-서 양진영이 쌓았던 바벨탑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 있는 한반도에 철조망을 거두고 새로운 언어로 의사소통의 물꼬를 트는 평화의 영으로 오십니다. 이제 우리는 냉전의 바벨탑을 쌓던 모든 노력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남과 북이 하나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우리 모두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 곳곳에, 우리들의 삶의 자리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서로 사람과 사람으로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해 애쓰시는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신동엽 시인의 시를 되새기면서, 성령께서 이 땅에 남아있는 모든 부자연스러운 '껍데기'들, 곧 냉전시대의 바벨탑의 흔적을 파괴하고 새로운 평화통일의 미래를 허락하시기를, 남북정상회담이 바로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서,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19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