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 설교
2000. 7.23.
허준 신드롬
(시편 37:1-28, 야고보서 1:19-27)
윤응진
1. 허준 신드롬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허준'(MBC 월, 화 드라마)은 젊은 작가 최완규의 상상력과 명 PD 이병훈의 연출, 그리고 주요 배역들(허준역에 전광렬, 허준 부인 다희역에 홍충민, 예진역에 황수정)과 조역들의 열연, 조수미가 부른 주제가가 어우러져서 시청률 60%가 넘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허준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진한 감동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마침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이권확보를 위해 파업까지 불사했던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에게 환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허준의 헌신적 삶은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가 미취학 아동부터 노년층까지 시청한 '국민드라마'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이른 바 '허준 신드롬'이 발생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 저녁 10시에는 택시잡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택시기사들이 드라마 '허준'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몰려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허준 흉내를 내다가 병원신세를 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약초를 잘못 알고 복용하다가 배가 아파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청소년들은 허준 개그를 모르면 따돌림을 당할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 허준 때문에 한의원에 환자가 30% 증가했고, 한의사가 인기신랑감 후보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 허준처럼 병을 고쳐주기를 기대하는 환자들 때문에 한의사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환자들은 한의사들에게 의례 "허준은 하는데... 왜 당신은 못 고치는가?"라고 질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환자들은 허준이 중풍병을 치료하는 드라마를 본 후로는 "왜 나는 빨리 치료되지 않는가?"라고 항의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 사이버 세계에서도 허준의 인기가 폭발하여 허준 게임까지 등장했다고 합니다.
- 허준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초등학교 어린이에서부터 성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 허탈해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허준 드라마가 끝났으니, 무얼 하지? 이젠 무얼 보지?
허준은 대체 누구입니까?
허준(1546-1615)은 기생과 군수 사이에서 태어난 천한 신분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술(醫術)의 세계에 뛰어들어 집념과 의지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드라마가 보여준 허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의술을 베풀 뿐 명예나 돈을 탐하지 않았던 사람
-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닌 사람
- 자기를 포기하면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지닌 사람
허준 인기의 양면:
이제 허준은 민족적인 영웅으로 부활하였습니다. 허준 드라마의 인기는 곧 허준의 인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 앞둔 적령기 여성들의 여론 조사 결과, 여성들은 결혼 대상자로 가장 싫은 사람으로 허준을 꼽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허준은 답답하고, 경제력이 없고, 은근히 여성관계가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집에 잘 안 들어온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허준의 인품을 흠모하는 여인이었던 예진역을 맡았던 탈렌트조차 어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허준같은 인물은 자신의 남편감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허준이 훌륭한 인물임은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허준처럼 살아가기를 희망하면서도,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허준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 * * * *
허준 신드롬에도 불구하고, 허준에 대한 존경에도 불구하고, 허준이 이처럼 거부되는 모순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허준 신드롬 속에 내재한 이 모순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드라마 허준을 통하여 천민 출신 허준의 고난을 함께 아파하였고, 그의 방황을 함께 안타까워했습니다. 의술을 닦기 위한 그의 진지한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환자들의 생명을 보살피기 위한 그의 헌신에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함받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였고,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고 민초들을 보살피기 위해 낙향하는 그의 모습에 존경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의 삶이야말로 참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보람된 삶이었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허준 신드롬은 이러한 공감대 위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뜻 허준처럼 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자기모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은 고귀한 것이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 험난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한 삶, 평탄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그의 경쟁자였던 유도지(유의태의 아들)의 삶과 대조적인 것이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삶,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과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삶을 따라서 실천할 용기를 얻기 힘든 것입니다. - 허준을 존경하고, 한의사 남편을 얻기를 소망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들의 남편이 실제로는 허준보다는 유도지와 같은 한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허준 드라마에서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공감하였습니다. 허준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가치판단에서 일종의 '국민적 동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의학의 가치가 크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체 얼마나 많은 한의사가 허준처럼 살고자 하겠습니까? 대체 어느 어머니가 그의 자녀가 허준처럼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우리는 허준의 가시밭길을 외면하고 싶은 소망과 허준의 영광에 참여하려는 욕구 사이에서 모순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준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 이유는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길을 함께 걸을 용기와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허준 신드롬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모순을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우리의 메시야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 곧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길을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흔히 믿음만으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도 바울의 명제를 내세우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그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마치 요즈음 한국인들이 허준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허준을 실제의 삶에서는 거부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일상생활에서는 거부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2. 실천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야고보서의 증언은 예수님을 입으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삶에서는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 22)
이 요청에 앞서서 야고보서는 1: 19-21에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들이 알아두어야 할 올바른 전제조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신앙공동체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하"여야 합니다(19). 즉 다른 사람의 말을 참을성을 갖고 귀기울여야 하며, 남을 화나게 하는 말은 더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분노하는 사람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어기게 되므로, 하나님의 정의를 행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규율을 방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노하기도 더디해야 합니다. 이러한 권고들은 초대교회 안의 싸움과 분쟁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21절의 말씀, 즉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라는 권고 말씀은 초대교회가 세례를 줄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지녔던 과거의 삶의 악덕을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야고보서가 세례 때의 권고를 다시 환기시키는 것은, 이 권고가 항상 새롭게 반복되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심어진 말씀"이라는 부분입니다. 말씀은 씨앗처럼 우리 마음 속에 심어진 것이므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미 세례학습 때에 '심어진' 이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곧 공손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죽음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옮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혼'이란 인간존재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 혹은 인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죽음의 영역에서 삶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말씀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구원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여 그것을 선한 행동으로 옮겨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권고(21)는 말씀을 "실천하라"는 요청(22)으로 이어집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종교적인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면서, "야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출 24:3). 예수님도 거듭 거듭 우리에게 말씀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9, 7:26-27, 요한 15:14).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서 2:13)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거울 속에서 본 자신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듣기만 합니다.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금방 잊고 맙니다.
반면에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25). 야고보는 율법이 자유를 준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율법이해는 히브리적 신앙전승에 충실한 바른 이해입니다. 율법은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에 머무는 사람은 율법이 끊임없이 실천을 요청한다는 사실, 즉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을 거울로 본 사람은 곧 그 얼굴모습을 잊어버리는 반면에, 율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일에 머무는 사람은 율법을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에 대하여 말합니다. 야고보는, 경건을 가장한 채 논쟁만을 일삼는 사람들의 경건을 헛된 것으로 단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깨끗하고 흠 없는 경건의 관건은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 즉 곤경과 불의한 폭력 아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 즉 타락한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건한 삶의 길! -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걸어갔던 길이며, 수많은 히브리 신앙인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 야고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걸어가기를 요청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걸어간 이 참된 경건의 길을 걷는 사람들보다는 입술로만 주님을 따른다는 '신앙인들'이 더 많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는 주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거짓 경건과 거짓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어지럽힐 뿐입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허준을 존경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허준 신드롬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의 풍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여전히 악한 자들이 잘되고, 불의한 자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은 당장은 고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을 실천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시편 저자는 그가 깨달은 놀라운 삶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시편 37:1-2)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야훼)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5-6)
시편 저자는 악한 자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결국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11)을 내다봅니다.
악한 자들이 신앙인들을 괴롭힐지라도 "주님은 오히려 악인을 비웃으실 것"(13)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종말이 다가옴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허준은 이렇게 정의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한 채, 외롭게 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으나,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삶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 신앙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길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허준보다는 더 큰 행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준 신드롬이 허준의 삶을 실천하는 운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하여 작은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허준을 존경하면서도 허준의 험난한 삶을 따르기를 망설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참된 경건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저자가 그의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세상의 유혹을 이길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23-24)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