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0. 8.27.
성서의 사회주의
(레위기 25:14-19, 35-43; 야고보 2:1-9)
1. 들어가는 말
남북 이산 가족들의 상봉으로 인해 조성되었던 뜨거운 열기가 식어가면서, 이제는 힘을 잃고 한반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 같던 냉전 이데올로기가 보수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들을 통해 다시 기세를 떨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 야당인 한나라당은 여전히 냉전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최근(2000. 8.25.) 김영삼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부의 통일정책이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개념을 규정한 헌법 제4조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 {월간조선} 9월호의 논조 역시 냉전논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각종 특권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이 분단체제로 인하여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이해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또 한반도의 분단으로 각종 이익을 챙기고 있는 주변의 강대국들이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덕주의적인 순진함일 뿐입니다.
그런데 분단체제의 수혜자들이 아니면서도 평화통일의 장애물 역할을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입니다. 미국식 친자본주의적인 보수신앙에 세뇌된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과 자본주의 체제를 일치시키는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반공의식을 강화시켜 왔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월간조선} 9월호는 지난 7월 하순, 시카고에서 개최된 제4차 '한인 세계선교대회'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모퉁이돌 선교회의 이이삭 목사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싣고 있습니다. 이목사는 "김정일 회개하라"는 공개서한에서 "김정일은 실패한 정치인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군대와 공산당을 해산하고 무장을 해체하고 항복하여 죄악을 용서받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목사 개인의 입장이지만, 보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입장이 크게 다를 리 없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이른 바 '신앙인'들의 독선적인 태도는 모처럼 트인 평화통일의 물꼬를 막아버리는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분단체제를 고착시키려는 세력을 지원하는 정치적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것은, 기독교신앙은 결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평화통일의 방향은 자본주의 체제로 북한을 흡수하는 길일 수 없습니다. 한국의 평화통일은 남한식 자본주의 체제도, 북한식 공산주의 체제도 아닌 제3의 사회체제 모형을 개발하고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향해 비판해야 한다면, 북한이 인민들의 권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북한 사회가 그러한 사회주의 이념에 철저하기보다는 새로운 계급체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북한과 대화를 시작한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북한에 대한 비판보다는 먼저 우리가 속한 사회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먼저 겸허하게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작업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는 통일한국을 위한 제3의 길을 제시할 능력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흡수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통일을 위해 기독교 교회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 이념 사이에 대화를 위한 공동의 관심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현시점에서 남한의 기독교인들의 주요 과제가 아닐까요? 우리는 이 시간 성서적 신앙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사회주의적 관심을 재확인함으로써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2. 성서적 관심은 사회주의적이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레위기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제 이웃에게 무엇을 팔거나, 또는 이웃에게서 무엇을 살 때에는, 부당하게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된다."(25:14) 17절 말씀에서는 부당하게 이익을 남기지 말라는 요구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경고'를 통하여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요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 설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상의 미덕은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추구하고, '신지식인'을 예찬하는 배후에는 바로 이러한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누군가 사업을 하여 성공을 하였다는 것은 근면 성실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부당한 이익을 정당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국가간의 교역에서도 부당한 이윤추구들이 국제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됩니다.
우리의 사회 안에서 변호사와 의사가 돈 잘 버는 특권계층이라는 것은 그들이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노동하고 땀흘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배우고 익힌 전문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많은 이익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그들처럼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법대나 의대에 보내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입니다.
더 나아가,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형성된 '재벌'들도 근면 성실한 노력의 결과로 그 막대한 재산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부패한 정치권력들을 등에 업고 챙긴 부당한 이익들을 폭로하고 있는 물증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부러워합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돈을 잘 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부당한 이익들을 합법화해주는 제도적 장치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들은 이처럼 성공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서 선전하였고, 그러한 사람들을 교인들로 만드는 것이 교회부흥의 지름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른 바 '자유로운' 질서인 이윤추구 동기 자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낯선 하나님을 뵙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은 비기독교인들에게만 낯선 것이 아니라 이른바 기독교인들에게도 낯선 분입니다. 흔히 교회의 설교단에서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축복하여 단시간에 막대한 부당이익을 얻도록 보장해주는 전능한 존재로 선전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재벌들이나 특권계층의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정당화하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그러한 부당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 그러한 부당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밝히는 일은 외면하였습니다. 결국 교회들은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미국을 통해 전래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유일한 기독교적인 체제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없는 기독교 신앙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질서와 가치를 근본부터 뒤엎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노선은 결코 친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랍게도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낯 설을 것은 하나님께서 부동산 투기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로서 선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23)
여기에 이른 바 토지 공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의 하나인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를 거부하는 신앙적 근거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은 재산 증식의 수단일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을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빌려쓰는 것일 뿐입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므로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35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의 생존을 돌보아 주도록 요청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36, 비교 37절)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들이 가난 때문에 노동력을 팔기 위한 종의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종 부리듯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보살펴주라고 요청하십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부자들의 재산증식을 정당화하는 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하여 애쓰는 은총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시는 이유는 바로 '출애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이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은 위험한 일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통일 한국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출애굽의 하나님의 사회주의적 관심과 요청에서 남북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출애굽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 - 오늘 우리가 경청한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간차별에 대한 이러한 경고는 이미 초대교회 안에 인간차별의 풍조가 침투해 들어왔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원시 교회공동체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갈 2:10, 고후 8:9, 사도 11:29). 예수와 그의 친척과 사도들도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역시 주로 하층계급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자들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사도 8:27- 에티오피아의 재정관, 10:1-,가이사리아의 이방인 대장 고넬료, 13:7-12, 17:34 ). 그 당시에 특히 심했던 계급차별이 예수의 공동체에도 흘러 들어왔으므로 초대교회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흐리게 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위기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인간에 대한 차별대우와 연결시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차별대우는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메시야가 됨으로써 인류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 부자들이 "영광의 주"인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자들이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마저도 그들을 특별대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교회 안에서 인간을 세속적인 물질의 소유에 따라 차별하는 풍조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회공동체 내부에서 부자에게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천대하는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교회 신도들 사이에서 발생한 인간차별은 히브리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각과 행하심에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교회 내에서 이미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비교해서 부당히도 너무 큰 존경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바로 그들을 선택하시며 사랑하셨는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6) 하나님의 선택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은총의 선택의 결과로 선택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한 이웃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 잠언 14:21 - "자기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자, 그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 6-7: 부자들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들:
- 예레미야 5:26-27. 상류계급에 속한 자들로서 크고 부유하게 된 자들을 사악한 자들로 지칭. 왜냐하면 그들은 술책을 써서 재산을 모으고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 미가 6:11-12. 엉터리 저울을 쓰고 거짓말을 하며 폭행을 일삼는 자들로 비난.
- 이사야 53:9. 부자는 파렴치한 자들(=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 에스겔 22:6-13, 아모스 3:10, 5:7-12 등 부자들에 대한 반복되는 비난은 고정된 것이며, 개인이 아니라 계층을 향한 것이다.
야고보도 히브리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을 가난한 신앙인들을 억압하는 파렴치한 세도가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권세있는 부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7) 적대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으뜸가는 계명으로 상기시키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이웃사랑의 계명을 파괴하는 범죄행위로서 규탄합니다.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사람들은 '최고의 계명'에 어긋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율법 자체에 의해 계명을 어긴 자라는 판결을 받는다는 것입니다.(8-9).
* 잠언 14: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 그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이웃은 곧 가난한 자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야고보는 지금 히브리인들의 역사 속에서 계시된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관심과 선택,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근거를 두고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인간차별을 성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대접 받던 유일한 공간, 오아시스와도 같던 그 초대교회마저도 인간차별의 풍조에 물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간차별을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것을 사회주의적 관심이라고 부른다면, 야고보는 분명히 성서의 사회주의적 전통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한국교회의 거듭남을 위하여
세계의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양적인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서적 사회주의 전통을 외면하였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노예가 되었고, 교회 안에는 이미 세속적 가치 기준에 따라서 인간을 차별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교회성장 이데올로기는 부자들에 대한 의존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력은 확장되고 교회는 비대해졌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변혁시킬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봉사할 능력을 상실한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를 들여다보면, '자유 민주주의' 질서가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철저히 왜곡되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김영삼에 의해 초래된 IMF사태는 부자들과 권세를 누리는 자들의 '자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백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문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송자 교육부장관이 지난 2년간 삼성의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부당이익을 16억이나 챙겼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철저한 변혁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도 부당이익을 챙기던 기존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파업을 전개하고 있는 의사들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혁명적인 변혁을 요청하는지 명백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와 구조적 부정부패, 철저한 인간차별의 체제를 극복하고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과제들을 위하여 먼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방향전환이 시급히 요청됩니다. 우리는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만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들과 신앙인들은 낡은 역사와 함께 묻혀야 합니다.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의 생각에서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에서 이웃을 차별하는 나쁜 풍조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청산하고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만을 살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