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아카이브

[윤응진] 하나님의 벗

한신대·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2000.10.8.
하나님의 벗
(창세기 12:1-4, 야고보서 2:14-26)

1. 문명탈출을 감행하라!

젊은이들은 부모의 집을 떠나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고 싶어합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훌쩍 일상생활을 떠나 여행하는 것은 젊은이의 낭만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자신의 삶의 터전에 정착하게 되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익숙한 터전에서 뿌리박고 싶은 것입니다. 나이가 든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기보다는 오히려 옛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삶의 터전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일흔 다섯의 나이에 이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훗날 아브라함으로 알려진 아브람입니다.
이 노인 아브람이 고향을 버리고 탈출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일까요?

아브람이 친숙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나게 된 것을 성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증언합니다.

히브리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류와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 인간의 역사는 죄악이 점점 더 증대되고 구조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은 것을 후회하시고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려 시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이 이룩한 역사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역사였습니다. 마침내 인간들은 힘을 모아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께 대항하여 스스로의 이름을 떨치려 시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의사소통을 방해하심으로써 이처럼 오만한 고대 바빌론의 도시문명을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와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인류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재창조하려 시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던 한 씨족을 선택하여 그 찬란한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그리고 작은 아들의 몸에서 태어난 손자 롯을 데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인) 갈대아 지방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데라는 고대 바빌론 문명의 중심지로부터 탈출하였으나, 아직 바빌론 문명권을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데라가 죽었을 때, 아브람은 아직 바빌론 문명권의 변두리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

이 말씀을 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많은 민족들 가운데에서 한 인간을 선택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아브람을 선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성서는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인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구원계획을 위해 한 인간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의 선택은 아브람에게 매우 어려운 결단을 촉구합니다. 고향이 되어버린 땅과 친척들과 가족들과의 유대관계를 끊어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오래된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이러한 유대관계를 끊고 떠난다는 행위는 신변에 대한 안전보장 장치들을 모두 포기함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이 그에게 친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편리하고 안락한 바빌론 문명권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지금 더 나은 문명권으로 진입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척박하고 개발되지 않은 땅으로 모험의 길을 떠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의 삶을 지탱해준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젖줄을 끊어버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그분이 보여주실 땅을 향해 떠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그가 지금 요청받고 있는 것은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일이 아니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세상의 현실을 거슬러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창조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브람에게 축복을 베풀 것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12:2-3 사이에는 축복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이 받은 소명은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이어집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브람의 뜻을 이어서 새로운 삶의 모델을 실천할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아브람은 "복의 근원"으로서 선택되었습니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 아브람이 선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의 삶, 이 역사 안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현실에 적응하고 안주하도록 하기 위한 축복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신앙인들에게 허락된 축복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모든 인류의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새 인류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아브람이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 참여는 기존의 문명권으로부터의 철저한 탈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탈출 요청과 축복의 약속에 이어지는 성서의 증언은 매우 간단 명료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12:4) 아브람은 아무런 질문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요청에 응합니다. 그는 거의 실행불가능한 요청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깁니다.

안락하고 편리하고 친숙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아브람이 내딛던 발걸음은 개인의 발걸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인류의 위대한 도약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땅을 향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창조에 대한 신뢰와 복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탈출을 감행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탈출 '행동'을 통하여 인류의 새 미래를 열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에 대한 믿음과 실천적 참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로마서 4:11)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행한 업적, 특히 할례 여부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6)는 말씀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구원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로마서 4:16).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열어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결코 실천 없는 믿음만을 권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믿음 외에 어떤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서 12:1).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신앙인다운 삶의 실천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신앙인들이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16-26)를 맺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실천 없는 믿음, 행동 없는 기독교를 정당화하려는 근거를 찾으려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이미 초대교회에서도 발생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실천 없는 믿음을 정당화하려는 당시의 풍조에 저항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보서 2:14) - 우리는 지금 야고보가 제기한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음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교회, 믿음을 또 다른 업적으로 선전하면서 믿음의 실천은 외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야고보는 추상적인 교리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실천없는 믿음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을 향해 말로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지닌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떤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귀신들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청한 바와 같이,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그 때에 이미,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과 믿음의 실천을 통하여 의롭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의 표현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야고보서 2:22)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벗'(야고보서 2:23)이라고 불리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벗! - 이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영예일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을 실천한 아브라함이 이 영예에 참여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 41:8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당시에 이미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과 다른 강조점을 선택함으로써 사실상 바울의 가르침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은 행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에게, 믿음만 있으면 되지 행동은 필요하지 않다고 변명하는 자들, '믿음만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을 향해 믿음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이냐 행함이냐 사이의 양자택일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의 행동을 통해 믿음이 완성되도록, 즉 구원하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살아있는 믿음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마틴 루터가 오해했듯이 또 다른 업적주의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등지고 탈출함으로써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철저한 복종,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뢰가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소유하고 머문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은 삶을 살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야고보는 또한 이방인 출신의 창녀였던 라합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 예로서 제시합니다. 라합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도왔던 여인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신뢰하고 행동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실천을 통하여 그녀는 가나안 문명권이 심판받을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모두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벗'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신뢰하고 참여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신앙'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창조를 '신뢰'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고백'과 '신뢰'에 머무는 믿음은 세계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고백과 신뢰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는 신앙인만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의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사랑, 즉 억눌리고 헐벗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오직 약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대한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으로 머물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되는 믿음만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혁명적인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 지상주의에 빠진 한국교회의 폐해를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수없이 세워지고 교인들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신앙인들의 믿음은 관념의 세계 속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세상을 밝혀주고 부패를 방지하는 빛과 소금의 직무를 담당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장로가 청와대의 권좌를 차지해도 그의 믿음은 한민족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공허한 믿음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S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교회입니다. 장로만 1,400명이고, 제직은 5만 명이나 되며, 1년 예산은 1300억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순수한 복음'만을 추구한다고 하는 이 교회는 '믿음'만을 앞세워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킨 모범 사례에 속합니다.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이 교회의 모델을 따라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 교회는 교회의 막대한 헌금이 사유화되고 있다는 의혹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의 아들(35세)이 스포츠 및 연예오락물을 다루는 신문 및 방송을 창간하거나 인수하는 과정에서 수백 억 혹은 그 이상의 교회헌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입술놀림에 불과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인들에게는 현실도피를 부추기면서, 교회와 목회자는 현실에 안주하고 말은 결과가 아닐까요? 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한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양적인 성장일변도의 부흥을 추구해온 한국교회들이 자체모순으로 인하여 회피할 수 없는 문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도 각종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믿음'을 앞세우며 난립하고 있습니다. 또한 담임 목사직의 세습 등으로 인하여 기독교계는 지금, 믿음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등대역할을 하기는커녕,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요청은 더 이상 경청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자체가 철저히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탐욕과 부정부패가 교회마저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편안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떠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철저한 '신뢰'(믿음)와 새로운 삶의 '실천'을 통한 참여를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벗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벗'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시는 '하나님의 벗'으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머물러 있으면서, 입으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위선자들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재창조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벗'으로서 살아가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으로부터 "떠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모두에게 허락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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