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65:17-19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멘.
베드로후서 3:8-13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5:1-13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멘.
설교문
저는 찬양하며 살수 있다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워야지 찬양이 나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행복하고 즐겁고 싶지만, 사는 동안 항상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힘들고, 목마르고, 도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일주일 전 포천에서 아주 생각하기도 힘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일흔 두 살 되신 할아버지가 열 두 살 된 외손자와 자살 한 일입니다. 외손자는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인 1급 이라고 합니다. 둘이 소 외양간에서 2미터 높이의 대들보에 끈을 묶어 손자 먼저 죽게 하고, 자기 스스로도 목숨을 끊은 사건입니다. 뉴스보도에 보니까, 간단한 유서를 썼더군요. "내 딸(아기엄마)의 아픔과 짐을 덜어 주고 싶다. 먼저 간다"는 내용입니다. 사람 죽은 이야기인데요. 이게 아주 특수한 사건입니까? 아니면 아주 예외적인 사건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라고 합니다. 멀쩡했던 사람이 불의한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살고 싶지만 불행한 일로 목숨을 잃으면 슬퍼서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데, 이렇게 할아버지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우리의 반응과 태도는 다릅니다. 아마 이 할아버지는 일주간 내내 이 뇌성마비 아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도와준다는 것이 주말에 이 아이를 데려다가 목숨까지 끊게 하여 딸과 이 손자의 아픔,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 하고 싶고, 복 받고 싶고, 축복 속에 살고 싶다는 거죠. 이 말을 지금 사회나 정계에서는 ‘복지’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제 복지라는 말이 모든 정치권과 사회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복지에 관한 정책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뇌성마비 아이에게 예수님의 손길이 미쳐서 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의술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럼에도 병이 낫지 못하면 뇌성마비,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그냥 존경하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장치가 마련되어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수 있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죽으면 안 됩니다. 심리적인 고통이나 정신질환으로 인해 자살하면 어쩔 수 없지만, 경제적인 여건과 같이 외부 여건 때문에 자살 한다면, 우리 사회는 선진사회가 아니겠지요? 복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 역할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가면 안 될까요? 조금 힘들지만 서로 나누면서 살면 안 될까요?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가 말하는 알찬 복지라고 생각하고, 오늘 성경말씀에 있는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새로운 선진사회가 되어 이런 사람들이 위로 받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오죽 하면 할아버지가 그런 극단을 선택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독일은 복지가 잘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도 한 10년 독일에서 살면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독일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독일은 많은 것이 보장이 되기 때문에 뇌성마비 환자가 경제적인 또는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사회는 아닙니다. 그런 일로 자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가면 외형적인 여건이 좋고, 남들 보기에 훌륭한 집안이지만 남들 알지 못하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상을 하신 분으로, 독일 통일까지 이룬 분입니다. 헬무트 콜(Helmut Kohl) 전 수상입니다. 오랫동안 수상을 한 분인데, 이 분의 아내가 총리를 그만두자마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내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정치인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치료를 많이 받았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콜 전 총리는 재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이 사람의 아들이 인생고백록을 써서 책을 출간했는데, 그 중에 한 줄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한테 가정은 정당이었고, 기독교민주당이 그의 가정이었다. (중략) 어린 시절 나는 고독 속에 살아야 했다. 항상 테러의 위험 속에 살아야 했다. 아버지 총리시절 아들로써 받은 특혜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정치장막 속에 가려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욕망과 정치인의 아들로 살아야 하는 여건 때문에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마지막 구절입니다. "나는 보통사람인 아버지를 갖고 싶다. 20년 동안 얼굴도 못보고 살아야 했다. 나는 평범한 가정이 그리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버지 재혼도 알지 못했고, 지금은 조금한 자동차 딜러로 일하고 있다면서 "나는 평범을 원한다.” 이렇게 썼습니다. 통계에 보면 독일의 정치인 중에 아들이 정치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문화 활동을 하던가, 예술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복지기 어떤것이어야 하는지 판단하십시오.
노벨문화상을 수상한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가 있습니다. 토마스 만(Thomas Mann)입니다. 이 분이 독일의 현실을 보고 이런 사회평론을 썼습니다. 시민사회가 시작되면서- 아마 2차 대전 이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열씸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1세대는 짐승같이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그 다음 2세대는 그 돈으로 권력을 잡았고, 3세대는 돈과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화와 예술의 길로 들어섰고, 이제 마지막 젊은 4세대는 봉사와 자선이 인간의 최고 가치임을 깨닫고 봉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아마 틀린 분석은 아닐 것입니다. 이 분석은 유럽의 복지사회에 대한 분석만이 아니라 제가 보기에 오늘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사회의 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어도, 외향적 복지도 중요하지만, 또 마음의 복지도 중요하고, 영혼의 숨 쉼도 중요합니다. 행복은 외향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내적인 행복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가 다 같이 갖춰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구약의 본문을 보니까 이렇게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백성 너희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 주마". 이렇게 말할 때는 물론 바벨론 포로기 이었습니다. "새날이 오면 이전 것 기억하지 않겠다". 해방된 조국에 내가 선물을 하나 주겠는데, 그 선물의 이름은 새 하늘과 새 땅이고, 그 내용은 이사야의 말씀대로 "기쁨이 가득 찬 도성이 되고,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예루살렘의 도시는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내 즐거움이 되고,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는 더 이상 없게 하겠다". 여기서 오늘 본문이 끝나는데요, 그 다음에 본문 하나를 더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오면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왜 그렇겠습니까? 너무 열악하니까 출생하자마자 질병으로, 배고픔으로 인해 바로 죽어요.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장수라고 하는 것은 꿈같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 쓰여 있습니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고 있지요. 이제 백 살이면 젊은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60대인 저는 아직 젊은 층에서도 한 참 밑에 속합니다.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꿈인가요? 앞으로 그렇게 된답니다. "이런 날을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받아서 베드로후서는 말합니다. 우리는 두 세계를 삽니다. 하나는 "오늘"이라는 세계가 있고, 또 하나의 세계는 "천년"이라 이름 하는 세계 입니다. 오늘과 천년, 엄청난 수적인 차이 입니다. 성경말씀을 다 읽어 보면, 사실 성경말씀에서는 일 년 인지, 천 년 인지 숫자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요, 옛날 하늘과 새 하늘, 옛 땅과 새 땅에 관심 있습니다. 숫자의 길이에 관심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을 옛 하늘이라 하고, 천년은 새 하늘을, 새로운 땅을, 새로운 사람을, 새로운 세계를 의미합니다. 새 하늘이 곧 온다. 새 땅이 곧 이루어진다. 내일이 온다. 내일이 와서 오늘의 현실이 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처음부터 선포하셨죠. 그것을 이 땅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고 살았습니까요? 예수님의 살아 온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사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하루하루 살아가신 것을 보면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일까 하고 의심을 가질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새 하늘, 새 땅, 천년이라 이름 하는 전혀 새로운 세계는 이런 것입니다. 첫째, 맹인이 눈을 뜬 다음에 이루어진 세계가 천년입니다. 눈 먼 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면, 백년을 보든, 십년을 보든 보는 것 자체가 질적인 천년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지요.
또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풍랑이 일었습니다. 배가 뒤집힐 뻔 했습니다. 제자와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도야 잠잠해라. 바람아 멈춰라. 그랬더니 파다가 멈췄습니다. 파도가 일고 있는 세상이 오늘이며, 파도가 멈춘 세상은 천년의 세상입니다. 오늘 이루어진 두 세계 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살면서 파도가 일어납니다. 경제위기, 정치위기, 사회적 위기, 심리적 위기, 고난 등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파도야 멈춰라. 바다야 멈춰라. 그랬더니 멈추었습니다. 곧 전쟁이 없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화, 평안의 세계가 천년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하나의 작은 결실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살았습니다. 예컨데 직업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잔치를 베푸시며 말씀하십니다. 죗값은 치러야 한다. 허나 너희들의 죗값을 내가 짊어 질 테니. 나한테 죄짐을 맡겨라. 그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나한테 죗값을 맡겨라. 내가 죗값을 대신 치르마. 그런 말이죠. 이것이 바로 스스로 우리의 죄를 대신지고 사죄의 은총을 주시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죄짐을 맡긴 사람은, 죗값을 치루라고 맡긴 사람은, 회개한 사람은 의인으로 만들어 주마. 사죄를 베풀어 주마. 용서를 베풀어 주마.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씁하십니다. 모든 죄인이 회개하면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아픔에서 천년의 기쁨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 나한테 와서 짐을 맡겨라. 뇌성마비 아이를 돌보는 엄마야, 안타까움과 외로움을 나에게 맡겨 함께 고민하자. 내가 안아 주마. 실패와 좌절 속에 인생을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아, 나에게 와서 죽지 말고 나와 함께 살자. 그러면 새로운 힘을 얻어서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병 고침 이야기, 위로하는 이야기.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야기 이 속에 오늘과 천년, 옛 세상과 새 세상, 옛 하늘과 새 하늘이 완전히 달라지게 나타납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먼 나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천년 후에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고, 오늘 아름답게 둥지를 터야 한다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에게,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늘나라가 이루어 진다고. 이 사실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정치를 말하시는 예수님은 아니지만 정치의 근본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바꿔져야 합니다. 세상도 바꿔져야 합니다. 바뀜은 설령 그것이 작아도 아름답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을 오늘 베드로 후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오는데, "새 하늘 새 땅을 보니",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새 땅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하늘이 주시는 정의가 깃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정의가 무엇입니까? 정의, 그러니까 `부패`, 이런 이야기 빼고요, 정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제가 일상생활 속에서 그 답을 생각해내 보겠습니다. 우리 자라나는 젊은 세대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시험을 보고 대학에 갑니다. 국·영·수를 잘해야죠. 모든 과목을 잘해서 점수를 잘 받아야 하고, 그 점수로 뽑혀서 성적에 따라 대학에 갑니다. 그런데 독일 이야기를 하나만 하면 독일의 아비투어(Abitur)라는 대학입학자격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총 다섯 과목을 봅니다. 두 과목 곧 국어와 수리는 필수입니다. 세 과목은 선택인데, 한 과목 선택은 필기시험이고, 두 과목은 구두시험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두시험은 담임선생님이 출제/감독관으로 점수를 줍니다. 정말 신뢰관계의 정점인 셈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필수과목의 점수보다 자기가 잘하는 선택과목의 점수가 가산점이 붙어 더 높습니다.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국영수를 잘해야 합니다. 전공과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잘한다고 하는 과목이 점수가 제일 높습니다. 제가 느낀 점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각 자 다릅니다. 각 자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능력도 다른데 다른 것이 아름답죠. 각자에 있는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우리가 평가해 주자. 저는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준화라는 잣대 속에, 때로는 하향평준화 속에 걱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 일률적으로 재단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다 똑같이 축복해 주시지만, 각자 다양하게 아름답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존경받고, 도움 받고, 높여 주는 사회가 되면 진실로 정의가 깃든 사회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정사회이지요. 그런 사회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없습니까. 작지만 아주 큰 사회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우리는 무한한 경쟁 속에 살아갑니다. 혹시 아우토반(Autobahn)이라고 들어 보셨죠? 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입니다. 제가 가진 차 가지고 한 200km까지 달려 봤는데, 달리면 금방 차선을 비껴나야 합니다. 뒤에서 난리 납니다. 아우토반은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아우토반의 철학이 있습니다. "속도의 자유" 입니다. 경찰도, 정부도, 법도 제한하지 않습니다. 속도는 운전자 스스로가 결단하고 즐깁니다. 자유의 행사자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우리 사회는 민주사회고, 자유사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하고, 누구도 간섭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자유인가 봤더니 이런 자유입니다. 제가 자유롭게 차를 움직이다가 사고가 나면 그것은 제 책임입니다. 마음대로 달리는데 차가 망가지면 제 책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가 마음대로 달릴 수가 있지만, 다른 차가 있으면 아무리 달리고 싶어도 못 달리겠습디다. 저에게 주어진 운전 속도의 자유는 함께 차를 운전하는 이웃들과 함께 누려야 하는 자유였습니다. 말하자면 공동체 속의 자유였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 속의 자유였습니다. 곧 정의로운 사회 속의 자유였습니다. "나 홀로"의 사고방식과 나 홀로의 이념과, 나 홀로의 생각을 강요해서 사고 당하는 자유가 아니고요, 함께 사는 아름답고 화합하는 자유 이었습니다. 사실 이 아름다운 자유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 누리는 자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악과 속박에서 풀어주마. 완전 자유하라. 그러나 자유를 정말 즐기고 싶은 사람은 자유를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기억해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라. 또 그 하나님은 다른 동료에게도 자유를 주셨음을 기억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며 자유를 즐겨라. 사랑 안에서 자유하라. 서로 도와주면서 자유를 즐겨라. 서로 나누면서 자유하라. 이 것이 오늘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름으로 주시는 축복이자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껏 새 하늘 새 땅을 꿈꿉시다. 삽시다. 즐깁시다. 행복을 노래합시다. 그러나 나누며 함께 즐깁시다. 더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합시다. 그분이 오늘 오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신답니다. 이 나라를, 우리 가정을 복되고 살찌게 해 주신답니다. 각자 가진 다양한 재능과 은총을 높이 치켜 주신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