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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칼럼] 동산 중앙의 나무는 손대지말라(창3:1-7)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창세기 타락설화는 오늘의 우리들 이야기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베리타스 DB

적어도 향후 10년동안 한민족의 국운에 결정적 영향을 줄 대선결과를 앞두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간 초접전 상태가 향후 열흘간 더욱 격렬해지고 판세가 요동칠 것이다. 상호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난장판 같은 현실정치판 앞에서 교회다니는 점잖은 교인들은 ‘사이비정치 초월 신앙인’이 되던지 ‘진지한 정치관심 신앙인’이 되던지 두 입장이 갈라진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초월은 현실역사를 외면하면서 ‘역사 밖으로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현실역사를 직시하고 역사탁류에 부대끼면서도  ‘역사 한 복판에로 초월’을 하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역사에서  구원사와 세속사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별도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한 구원사가 세속적 역사와 별개로 분리되어 전개된다고 믿는 신앙을 영지주의 신앙 혹은 관념주의 신앙이라 부른다. 예수의 말구유 탄생사건이나 십자가 사건은 ‘역사 한 복판에로의 초월’을 통하여 발생했고,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현실역사’에 매몰되어서는 않되지만 역사에서 초탈한척 해서는 설익은 믿음인 것이다.
 
창세기 타락설화(창3:1-21)의 이해에 있어서도, 그 위대한 이야기가 높고도 심원한 상징성과 신화적 설화 형식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그 설화를 역사초월적 진리 곧 태고시대 맨 처음 조상과 유혹자 뱀의 이야기일뿐, 현실역사와 관계없는 이야기로 해석한다면, 성경을 관념적으로 읽는 것이다. 창세기 타락설화는 왜 보시기에 “좋다!”고 축복하신  생명세계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고통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비극적 현실이 발생하게 되었느냐를 묻는 실존적 진지성과 공동체의 책임성에서 서술되었다. 타락설화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타락설화를 연극무대로 올린다면 3막극으로 구성될 것이다. 제1막은(창3:1-7) ‘환희’라는 의미를 지닌 에덴동산에서 유혹자 뱀의 꾀임을 받아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줌으로써 그들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결과까지다. 제2막(창3:8-19)은 자기생명 깊은 곳에 균열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동산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간을 찾아오셔서, 생명동산의 근본명령을 범하게된 자초지종을 심문하고 그들에게 범죄한 댓가를 선고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제3막은(창3:20-24) ‘환희’의 동산인 에덴의 동쪽으로 그들을 쫒아내지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그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땅을 갈면서 살도록 배려하시는 자비의 하나님 품성의 한쪽 끝을 보여주면서 위대한 드라마는 막을 내릴 것이다.

타락설화 제1막에서 주목할 두가지: 동산 중앙, 뱀의 화술

오늘 칼럼에서는 타락설화 내용중 제1막극에 국한하고, 제1막 드라마와 극중 장면에서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다고 했는데 ‘중심의 상징’에 주목하려한다. 그리고  뱀과 여자 사이에 오가는 언어의 교묘한 변용에 주목하고 그 상징적 이야기가 오늘 대선정국에서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고자 한다.

(1) 동산 중앙의 상징

창세기 2장에 이미 에덴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다고 보도한다(창2:9). 에덴동산 안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동산 각종나무열매를 맘대로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지말 것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를 내리신다(창2:17).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인지했음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는 만지지도 말라고 명하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것은 자기들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제한 한 것이 아니라, 먹거나 만지면 죽을까 염려하여 배려하시는 어버이 맘 때문에 그리하셨다고 여자는 이해하였음을 나타낸다.(창 3:4) 
 
타락설화 제1막 연극전개에서 특히 대선정국과 관련하여 묻고자 하는 것은 ‘동산중앙’이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며, 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건드리거나 그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가의 궁금증이다.
 
줄여서 말해보자. 고대 여러문명의 신화에서 그리고 문학과 철학과 종교에서 ‘중심의 상징’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인간성의 신비를 드러내는 특징으로 언급된다. 얼른 생각하면 ‘중심’ 곧 특정공간의 ‘한 가운데’는  원의 중심점같이 공간의 중심부를 상징 하지만   단순히 공간상의 중심이라는 뜻을 넘어선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예들면, 우리 생활속에서 중앙청, 검찰조직부서에서 중수부,  중앙우체국, 중앙역, 중추신경계, 유신시절 악명높던  중앙정보부, 등등은 모두 ‘중앙’의 상징이 힘과 정보의 집중처로서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편, 종교사에서 ‘중심’의 상징은 우주삼계(宇宙三界)를 연결하고 꿰뚫고 있는 중심축을 상징한다. 모든 성전이나 왕궁 건축은 우주중심터요 우주배꼽에 자리한다고 믿었다. 타볼산이나 그림심산이나 예루살렘은 우주중심이라고 믿는다. 우주목(宇宙木)은 마을의 당상나무일지라도 하늘과 땅을 잇는 소통의 축이다. 이 중심은 신성하고 거기에만 진정으로 생명이 있고 신이 강림한다고 여겼다. 그런의미에서 ‘중심’은 거룩하고 신성하여 함부로 범접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 성막의 지성소도 중심의 상징이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이 임한다.
 
사실을 말하면 콤퍼스를 종이에 대고 원을 그릴때, 콤퍼스의 뾰쪽한 바늘끝이 종이에 고정되면서 원주를 만들고 난후 콤퍼스를 종이에서 떼면 바늘침이 꼽혔던 흔적만 남듯이, 중심의 상징중에서도 최고의 상징이랄수 있는  원의 중심은,  크기도 길이도 없고 위치만  알려주는 점이다. 인간은 마음으로만 완전한 원을 그릴수 있지 실재로는 완전한 원을 그릴수 없는 존재이다.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원이라고 그려놓은 중심 바늘자국은  삐뚤삐뚤 들락날락 톱날같이 그려졌을 것이다. 중심의 상징이 힘과 정보의 집중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태풍의 눈’처럼 사실 중심은 고요하고 텅비어 있고 맑은 ‘충만한 진공’일 뿐이다. 그러나 그 태풍의 눈이 있는 한 태풍은 위력이 있지, ‘태풍의 눈’이 살아지면 열대성 저기압으로 변해버리고  먹구름의 비바람이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신화적 상징성을 글자그대로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현실 생명계 속에서 ‘신성하고 침범해서는 않되는 에덴의 중심’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의 지성소를 말한다. 신성한 인간 양심을 말한다. 칸트가 강조한대로 어떤 경우일지라도 사람의 인격은 목적자체로 대해야 하고 결코 수단으로 대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성과 양심이 ‘에덴의 중심’이다. 이 에덴의 중심은 그 누가, 그 어떤 정치적 야욕자와 그 집단들, 정치이념적 단체나 종교 교권적 세력이 침범 하거나 훼손시킬 수 없고, 손도 대서는 않되는 에덴의 중심나무, 에덴의 한가운데 중심의 신성 이다.
 
타락설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 대선경쟁에서 온갖 사이비 언론과 정치술수와 권력자의 꼼수들이 에덴의 중심, 곧 인간의 양심과 인격성과 생명의 지성소를 맘대로 짓밟고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있다. 오늘의 현대판 유혹자 뱀의 정체는 그 옛날 신화적 존재가 아니고, 변질된 지식인과 언론인과 권력하수기관으로 전락한 방송기관 행정책임자들이다. 그들의 죄값은 결국은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동산의 중심을 범하는 정치세력은 망한다.

(2) 간교한 뱀의 화술 
 
타락설화 제1막의 가장 절묘한 장면은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대화장면이다. 거기엔 달콤한 유혹도 없고, 강압적인 협박도 없고, 둔갑하는 변모술책도 없다. 오직 교묘하게 왜곡하는 ‘언어의 마술 행위’가 있을 뿐이다. 여자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여자의 반응과 내면의 궁금증을 유발해내는 그야말고 간교하기 그지없는 대화술인 것이다. 여자는  인간존재인데, 말로써 유혹당하고 타락하고 언어 때문에 마취당하여 주체적 인격성을 상실하고 군중이 된다.
 
뱀은 다음같이 질문함으로서 언어의 화술로써 여자를 유인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더냐?”. 이 말을 던지는 뱀은 그 이름그대로 간교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질문 속에는 본래 하나님의 명령의 일부를 내포하면서, 슬그머니 눈치채지 못하게 그 내용의 외연을 부풀려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 하시더냐?”라고 본래 언어내용을 살짝 변용하여 표현함으로써 순진한 여자의 내면을 요동시킨다. 여자는 하나님의 배려심으로 말씀하신 신적 금지 명령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간교한 뱀은 그러한 여자의 내적충동을 연결고리와 미끼로 삼아 여자로 하여금 ‘금지명령’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본래 자비로운 마음에 ‘호기심과 회의심’을 일으키게 유도한다. 
 
여자는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변호하지만, 대화중 간교한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3:5)고 은근히 부추긴다. ‘선악을 안다’는 말은 무엇이 선한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인지 구별하는 능력이 아니라 ‘전지’(全智)를 의미한다. 뱀의 말을 듣고 새삼스런 눈으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본즉 그 나무와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야성적 생리적 충동), ‘먹음직스럽기도 하고’(심미적 심리적 충동), ‘지혜롭게 할만큼’( 지성적 영적 충동) 탐낼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이야기는 계속 하지 않아도 결과를 우리가 안다.
  
이 제1막 대화극 둘째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놀이의 악마성’이다. 오늘의 대선정국에서 우리는 간교한 ‘언어놀이’로써 대중을 유혹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고 , 사안의 본말을 전도시키는 간교한 뱀같은 정치권력 술수꾼들을 본다. 정치권력 쟁취를 위한 사활을 건 정치투쟁에서 한편이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쓰면 다른 한쪽도 아무리 자제할려고 해도 대응적으로 ‘네거티브 전략’에 휘말린다. 여당이나 야당, 보수정치권이나 진보정치권이나 어느 한쪽만 ‘언어놀이 악마성’ 유혹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더 찬찬히 깊이 들여다보면 어느쪽이 더 교활하고 악마성을 지닌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다. 그 작은 차이를 “똑 같은 놈들이다!”라고 말해버리면 현대판 뱀꾼들이 펼쳐놓은 언어놀이 마법적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현실적 책임윤리는 ‘작은 차이’를 중요시 한다. 상황윤리에서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이 책임적 윤리행동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새누리당 선거캠프 선거본부가 훨씬 의도적이고  강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사용하기로 작정하고, 보다 간교한 ‘언어놀이’로써 분별력 약한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온갖 달콤한 약속과 안보위협 협박으로 ‘에덴의 중심’을 공략한다.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속담이 건재한다.  성경적으로 보면 단서가 붙는다. ‘민심’이 깨어있거나,  간교한 뱀같은 무리들이 언어놀이를 통해서 민(民)의 판단능력에 마취제를 주입하지 않을 때라는 단서가 붙는다.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 이로다”라고 칭송하는 이스라엘 민심은 천심이었다. 그러나, 밧세바를 권력으로  빼앗고, 장군요압을 충견처럼 부리고, 다윗왕궁을 짓고, 법궤를 독점관리 하게된  영웅 다윗 군주에게 “만세무강하옵소서”라고 환호하는 민심은 천심일 수 없다.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킨 세무리 장본인은 유대종교지도자, 로마총독 권력자, 그리고 어리석어 부화뇌동하는 예루살렘 민심이었음을 교회는 잊지 않는다. 어리석은 민심은 역사와 대의를 망친다. 오직 생각하는 민심만이 자신과 역사를 살려낼 것이다.역사는 곧 세계심판 법정이다.한민족은 심는대로 거둘 것이다(갈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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