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본문
루가 1:57-66, 80
설교문
오늘은 연중 12주일이면서 세례요한의 탄생 축일입니다. 앞으로 정확하게 6개월 후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루가복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지... 그 예수님이 어떤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이야기 앞에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요한 뒤에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다 분명하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곧바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VIP가 방문하기 전에 미리 선발대가 와서 사전 점검을 하지요. 너무 기쁜 소식이든지 너무 슬픈 소식을 전하면 놀랄까봐 미리 암시를 하여 준비를 시키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기쁜 성탄을 앞두고 대림 절기를, 그리고 은혜로운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사순 절기를 보냅니다.
교우 여러분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시는지요?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고 짧다 여기며 지내겠지만...
만약에 우리가 대부부의 시간을 보내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 그리고 전화가 없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삶 안으로 하느님이 찾아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시길 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삶 보다 훨씬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정말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보람과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기도와 금식, 자선의 삶을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런 종교적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구원을 고대하고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하느님의 구원은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에게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한 후 계속되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잠시 귀환과 독립을 경험한 때도 있었지만 페르시아의 고레스, 그리스의 알렉산더,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쿠스 4세의 혹독한 박해 그리고 로마의 통치와 지배를 받으며 살아온 삶은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백성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제국들은 때로 마치 사나운 사자와 곰처럼 그리고 표범과 같이 그들의 삶을 짓밟고 유린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느님이 좀 더 직접적으로 이 역사에 개입해 주시길 고대하고 갈망했습니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메시아는 다니엘서에 의하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초월적인 인자로, 엘리야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베푸는 예언자로, 다윗과 같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적 지도자가 나타나서 지금 그들을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불의한 세력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국을 세워 줄 그런 메시아 구원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 세상을 심판할 묵시적 종말을 갈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의 탄생은 바로 이런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례요한의 부모는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입니다. 이 두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거나 결혼은 해도 아기를 갖지 않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지만 요한이 태어난 시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세상의 조롱거리였습니다. 하느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복 없는 여인이었고, 죄 많은 여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사벳이 바로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친척들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놀라운 자비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과 함께 기뻐하였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 세상에 이런 일이 TV프로에 나올 법한 황당무계한 이야기로만 여기겠지만 성서의 전통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하느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원의 역사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늘그막에 아들 이사악을 낳았고 비로소 기쁨의 웃음을 웃었으며, 하느님의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었고 순명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복 없는 여인으로 취급받던 라헬은 요셉과 벤냐민을 낳고 비로소 복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성소에 가서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사무엘을 낳았고, 사무엘은 훗날 판관시대와 왕조시대를 이어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전해주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아기의 탄생을 통해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에 참여했던 믿음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 도래의 징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희망의 씨앗을 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즈가리야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 노래하는 가운데 요한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예고합니다.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길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게 되리니”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세례요한의 탄생이야기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늙은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개인이나 그 가족의 기쁨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의롭고 경건한 한 개인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전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세례요한 뒤에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예비 작업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느님의 구원과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훗날 세례요한의 선포는 이제 곧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지금 당장 죄를 회개하고,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하며 그런 표식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선포는 마치 강력한 불을 뿜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 모습은 구약성서에서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하느님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와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세력에 복수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불로 태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무서운 징벌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철저히 비폭력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요한은 먹지도 안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즐기셨습니다. 요한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우울하지만 예수님의 분위기는 잔칫집처럼 흥겹습니다. 세례요한은 임박한 종말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요한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는 임박한 미래였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현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차이는 요한은 하느님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개입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관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고, 그런 삶을 살아낼 때 그 나라는 계속해서 자라날 것이며, 그렇게 그 나라를 세워갈 때 그 나라는 지금 이곳에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416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당신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199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는 어거스틴의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서 인용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없이는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이나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나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드린 소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과 나라를 위해 협력해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과 축복은 바로 기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 전체는 그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쁨가운데 살아가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드시리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하늘에서 정의가 굽어보리라. 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바로 기쁨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체험과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임하고 자라는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쁨의 소리와 노래를 부를 이유가 많겠지만 하느님은 부족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으로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드림으로 인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면서 그 일로 인해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위해 길을 닦고 준비하는 삶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이 땅에 더욱 힘차게 퍼져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시 한번 투투 주교님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없이는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일 할 수 없습니다.” (이경호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