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35:5-10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3:7-11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아멘.
누가복음서 21:25-28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성가대가 부른 찬양처럼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과 찬송은 모두 "거룩"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통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거룩한 길”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온 말씀을 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거룩한 길로 오시는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저희들이 메시아로 알고 그분이 오심을 기다립니다. 거룩함이 무엇일까요? 거룩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김새와 하나님의 성격을 말할 때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믿으며 왜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사야서 35장 5~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고,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고,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고,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곳에는 큰 길 하나가 생길 것이니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 길로 오시는 분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길로 하나님께서 오시며, 오신 길로 우리 모두를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죄지은 사람은 그 길로 올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만이 기뻐 노래하며 그 길로 올 수 있습니다. 기쁨이 영원히 그 길에 머물러있고, 그곳에서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나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보지못해 고난을 받고 있던 소경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떴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고 감사찬송을 합니다.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얻고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고 감사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드린 찬송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은 이사야서 35장의 내용을 곡으로 만든 것입니다. 마른 땅에서 물이 솟고, 사막의 모래밭에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렇게 사막이 온통 변합니다. 이 사막은 우리 가정일수도, 자기 자신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일수도 있고, 온 세상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앙상하던 사막에 물이 흐르게 하셨는데, 이 변한 사막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막 주변에 이런 급변의 사건이 생기면, 우리 삶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 생기면, 여러분은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오늘 이사야서 본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사막 가운데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생겼는데, 네게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사야는 ‘사막입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35장 1절과 같이 ‘제가 보는 것은 사막이 아니라 온통 백합 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사막은 백합꽃입니다. 오늘 242장 찬송의 작사자는 사막이라는 뜻의 황무지를 장미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변한 사막은 무궁화입니다?! 장미꽃입니다?!, 백합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의 삶과 세상은 온통 장미꽃입니다?! 다소 문학적인 표현입니다만, 이 표현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이런 것을 주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있던 곳에 작은 개척교회가 하나 생겼습니다. 서기 70년경 유대 사람들이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습니다. 모든 유대 성당과 회당이 망가지고 붕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죽임 당했습니다. 빌라델비아라는 곳에도 유대교 회당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유대인도 다녔고 또 예수 믿는 유대인이도 모여 예배를 봤습니다. 그러다가 유대교식 예배만 드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민족을 위해서 단결해야 한다며 예수 믿던 유대인들을 배신자라 하여 쫓아냅니다. 그래서 쫓김을 당한 사람들이 작은 동네에 찾아가서 어렵사리 예수 믿는 자들의 작은 개척교회를 세웁니다. 이 사람들은 쫓겨난 것에 모자라, 로마 제국과 유대사람들의 핍박에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가 있습니까”하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에게 오는 메시아는 다윗 왕에게 주었던 열쇠를 가지고 있다. 다윗의 열쇠를 지닌 사람이 너희들에게 와서 문을 열 텐데, 거룩한 하나님의 문을 열면 누구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모두들 다 들어온 뒤에 문을 잠그면, 누구도 문을 다시 열 수 없다. 열쇠를 가진 분께서 오시니 그분을 맞아라. 그 분이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예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찬송을 부를 때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상투스(sanctus)’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성가에도 많이 나오는 이 단어는 라틴어로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품속으로 모아 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품속에 모아진 사람들을 보호하고 축복 주시기 위해서 주변에 울타리를 치십니다. 울타리를 치고 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곳이 거룩한 장소이며 그 안에는 거룩한 사람들의 축복이 있습니다. 울타리를 친다는 말을 동사로 ‘산시레’(sanscire)라고 하며, 이 말을 명사로 바꿔서 상투스라고 했습니다. 상투스는 단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울타리를 치시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축복을 주신다는, "울타리 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를 뽑으셔서, 우리를 위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경동교회가, 우리가 믿는 이 공동체가 상투스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뽑아내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따라 거룩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울타리 치신 안을 상투스라고 하고, 울타리 밖을 속되다는 뜻으로 ‘프로파눔(profanum)’이라 합니다. 울타리 밖은 속되고, 울타리 안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 택함 받은 공동체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큰 길을 닦아 이곳으로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거룩한 공동체의 한 뜻입니다.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메시아가 되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분께서 프로파눔, 속된 곳에 오십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이 모든 속된 것을 에워싸고 있는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속된 것이 있는 말구유간에 오셨습니다. 이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속된 것을 구원하시려고 거룩하신 분이 속된 곳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하나님께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할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쫙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던 울타리가 없어집니다. 하늘이 울타리를 뚫고 이 세상에 오셨고, 속된 것, 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려 오셨습니다. 울타리 무너뜨리는 상투스, 그 상투스가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것은 이곳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뚫고 속된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속된 곳에 나아가서 속된 것을 거룩한 것으로 바꾸십시오.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답게 만드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죄악과 범죄가 머무르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속된 것을 바꾸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울타리를 치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울타리를 뛰어넘고 세상으로 나아가서 속된 세상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말 구유간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속된 사람이 회개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 고통 속에서 시달리는 사람이 기쁨을 누리고 나음을 받아 자유를 누리는 것, 그것을 보고 감사하며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합니다.
설교 뒤에 부를 찬송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272장) 가사를 몇 군데만 보겠습니다. “낭패와 실망 속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십자가 은혜로 기쁨과 영광이 있으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죽음의 길에 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옮겨지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병든 몸이 튼튼해지고, 빈궁한 살림이 부해지고, 슬픔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실망한 사람이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으면, 하늘이 기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멸망의 포구를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로 이행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꿔주십니다. 메시아는 그런 모습으로 옵니다. 메시아는 갑자기 오시기에, 우리는 그 때와 장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오십니다. 이 진실을 아십니다. 우리는 출발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힘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우리 사람은 속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이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메시아는 하늘에만 사시고 이 땅에서는 사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메시아, 속세를 거룩한 세상으로 만드시려는 메시아, 그런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상투스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속에 오셔서 거룩한 역사를 만드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 한분한분을, 우리 모두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은혜가 오늘 메시아가 오시는 날 풍성하게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