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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말의 힘

윤응진·한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대학교회설교, 2001.1.14

성서본문

창세기 27:30-40, 야고보서 3:1-12

설교문

1. 말의 타락과 사회의 부패

사람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수한 점들 가운데 하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물들도 자신들 사이에 통하는 언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논리적인 언어인 '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따라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으므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위기입니다.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혹은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말도 나왔을 것 같습니다.

저는 유신독재체제 아래에서 정치적인 강압적 분위기 때문에 침묵을 강요받으면서, 그리고 독일유학생활 초기에 독일어가 서툴러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귀국하여 살면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 고통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치관과 관점들이 달라서, 또한 이해관계가 달라서 신앙인들끼리도 그리고 친척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실된 말을 나누다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말이 통하게 될 때 얻게 되는 기쁨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지요. 그런데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말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자 가운데 '믿을 신'(信)이라는 글자는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을 결합하여 형성된 글자입니다. 사람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만들어진 어휘지요.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신뢰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말로 하는 약속도 믿을 수 없게 되어 서약서를 써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신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계층이 정치인들입니다. 그들은 말 바꾸기를 밥먹듯 합니다. 말 바꾸기에 능숙할수록 정치적인 능력을 지닌 지도자로 뜨게 됩니다. 말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곳에는 거짓말들과 자기합리화를 바탕으로 하는 권모술수와 비방만이 판을 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의사소통이 될 리 없습니다. 아무리 영수회담을 한다고 법석을 떨어도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화결렬은 더 큰 불신을 조장하고, 그래서 새해벽두부터 정치판이 소란스럽습니다. 야당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하던 자민련의 김종필은 그의 선언을 백지화하고 다시금 여당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이른 바 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은 선거에서 안기부 예산을 1000억 이상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니까 '야당탄압'이라고 저항합니다. 자신들의 범죄적 행위를 정치논리로 희석시키려는 거짓말들과 사악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범죄집단이 갑자기 고난받는 야당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의원들을 자민련에 '임대'해주고서도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스스로가 정당정치의 기본원리조차 무시하는 행위를 감행하면서도 국민의 뜻을 거스른 데에 대한 반성은 추호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를 만들겠다는 그의 약속은 이미 파기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벽두부터 이처럼 헛된 말들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의 말에 진지하였던 한 신앙인을 만나보려 합니다.

2. 말에 대해 진지했던 히브리 신앙인

히브리인들의 생활에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말로 맺은 언약이나 맹세는 중요한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은 매우 신뢰할만한 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히브리 성서의 증언은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말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한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고대 히브리 족장 이삭의 가정 안에서 발생한 '축복쟁탈전'의 한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늙어서 눈이 어두어진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그의 뒤를 이을 족장으로 정하고 그에게 온갖 축복을 다 내려주고자 하였습니다. 이삭은 죽기 전에 마음껏 축복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하여, 에서에게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바치도록 일렀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사냥 간 사이에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고 맙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그 동안에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한 채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바치고 축복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충격을 받아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다"(창 27:33)고 합니다. 이삭의 충격과 분노는 단순히 아들 야곱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이미 야곱을 축복했으므로, 같은 축복을 에서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과 분노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삭의 경험한 이러한 충격의 이유는 우리에게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관념과 관습으로는 야곱에게 내린 축복을 취소하고 에서에게 다시 축복을 내리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간단하고 손쉬워 보이는 이 '해결책'이 이삭에게는 진정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인인 이삭에게는 그가 설령 속아서 내린 축복이라 할지라도 그 축복은 이제 그가 거두어들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가 한 말의 힘은 이제 이미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해 작용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의 인격과 존재를 대표하는 것이었으므로 히브리인인 이삭은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에서도 아버지의 충격을 이해하였으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통곡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에서는 아버지에게 단 한가지라도 축복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결국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내려준 '축복'(39-40)이란 차라리 저주에 가깝습니다: 즉 에서가 차지할 땅은 기름지지 않은 척박한 땅이 될 것이며, 에서는 칼에 의지하여 자신을 지켜야 하며, 동생인 야곱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에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애써 힘을 길러 자신의 목에 씌워진 멍에를 부수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그가 아끼던 에서에게 더 이상 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가 설령 속아서 축복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한 말에 성실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한 말의 힘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러한 히브리인의 태도는 오늘 날 우리에게 낯설기만 합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쉽게 말을 바꾸고 거짓말을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말의 힘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들도 사악한 지배자들처럼 일상생활에서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빈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것을 지혜로운 처세술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히브리 신앙인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한 말에 대하여 성실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히브리 성서는 인간과의 언약에 성실하려 노력하시는 '하나님'과 언약에 성실하지 못한 '인간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역사를 증언합니다. 신앙인들이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지하여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하려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히브리 신앙인들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신앙의 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의 말에 성실했던 이삭의 태도입니다.

3. 바르게 말하라

신약시대로 접어들면서 아마도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인들의 언어생활에 변화가 발생하였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지하지 않은 사람들,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지배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을 통하여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던 초대교회 공동체에 발생한 분쟁의 원인이 서로가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려는 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만 옳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쥐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생 노릇만 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생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을 전제로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들은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늘 말에 실수를 저지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어 남을 지도할 사람은 더 큰 심판에 직면할 위험성을 인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잠언'은 이미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니, 입을 조심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잠언 10:19)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마태 12:36-37) 지금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가르침의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신앙인들의 언어생활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책임있는 삶의 한 부분이 되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말의 '실수'란 남보다 더 옳다는 독선적인 행동과 남보다 더 잘 안다는 오만한 태도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혀를 불에 비유합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 전체를 불태워버리듯이 작은 혀가 거짓말을 함으로써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 곧 삶 전체에 불을 지른다는 것입니다. 남을 중상모략하는 혀는 결국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이 경고는 추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되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경고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흔히 경험되고 있는 진리입니다. 고관대작에까지 오른 사람이 말의 실수로 하루아침에 사회의 지탄을 받고 추락하는 광경을 우리는 종종 목격했습니다.

야고보는 또한 혀는 '불의의 세계'(6)라고 부릅니다. 거짓말과 비방을 일삼는 혀는 신앙공동체마저 파괴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어떤 짐승이든 길들여 다스릴 수 있으나, 인간 자신의 혀는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8) 혀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불이며 전적으로 악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혀가 지니고 있는 모순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3:9-10)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이웃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모순되는 일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자주 보게 되는 현상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신앙인들의 혀가 지니는 이중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혀가 지닌 사악한 이중성을 지적한 야고보는 매우 짧게, 그러나 매우 확실하게 권면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3:10) 여기에서 우리는 야고보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혀가 지니는 파멸적인 경향성을 지적함으로써, 오히려 책임있는 말을 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형제자매에게 저주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입에서는 거짓말이나 비방이 아니라, 진실과 격려 그리고 위로의 말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스승 가운데 한 분인 문동환 박사님은 오랫동안 정말 어처구니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문 박사님은 본래 눈이 커서 어린 시절 퉁사발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이나 동네 부인들은 형님인 어린 문익환을 보면 "그놈 잘 생겼는데!"하고, 어린 문동환을 보고는 "그놈 눈도 크네!"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어른들의 말이 어린 문동환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서 "눈이 큰 못생긴 아이"라는 자아인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사랑이 실패한 후에는 눈에 대한 열등감에 더욱 시달리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아가씨를 사귈 마음이 내키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유학 시절, 한 미국 아가씨가 동양인이면서도 눈이 크다는 이유로 문동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문박사님은 열등감을 극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큰 눈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큰눈을 좋아하던 미국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토다케는 '선천성 사지절단', 즉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자입니다. 병원측에서는 오토다케의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 아기가 황달이 심해 치료를 받고 있다는 구실로 한 달간이나 모자 상봉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달만에 이루어지는 모자 상봉의 순간은 주변사람 모두에게 긴장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성통곡을 하다가 실신할 것을 염려하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오토다케의 어머니는 아기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
 
오토다케의 어머니는 끔찍한 기형아를 만난 놀라움이 아니라 그녀의 아기를 만난 '기쁨'을 말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정말 진실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을 긍정하는 말, 자식을 사랑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오토다케의 탄생을 긍정하는 말이었습니다. 오토다케가 엄청난 장애를 극복하고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그 말, 생명을 사랑하는 그 말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말은 이처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생의 용기를 주기도 하고 박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나오는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통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도 함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혼탁한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서로를 죽이는 말들만 쏟아져 나옵니다. 본래 정치인들의 말이란 믿을 것이 못되지만,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워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사악한 말들, 무책임한 말들, 거짓말과 비방들 때문에 더욱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지만 그들의 말은 변함 없이 거짓되고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사악하기만 합니다. 그들의 말은 야고보의 증언처럼 부정의의 세계에서 솟구치는 불과도 같습니다. 그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정치판을 불사르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한 말들로 인하여 심판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악한 말들이 난무하는 정치판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어떠한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말들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시간은 결코 새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 신앙전승 맥락에서 다시금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책임있는 말, 신중한 말,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도록 우리의 혀를 제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삭처럼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책임을 지는 신앙인들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악한 세상이 보다 더 신뢰와 사랑과 격려와 생명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혀에서 나오는 말을 통하여 죽어 가는 생명이 새 생명을 얻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불신과 거짓의 어둠이 걷히고 신뢰와 진실이 다시금 꽃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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